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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ㅡ정약용과 '寶林茶, 寶林寺'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4/07/21 14:55 조회수: 947

ㅡ정약용과 '寶林茶, 寶林寺'



 

-'보림차,보림백모, 보림금설' 茶 명칭이 정약용 관련서적에 꽤 언급된다.

그런데 '보림차' 산지로 '강진 보림사(康津 普林寺)' 문구가 종종 나온다.

어떤 옛글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진 普林寺'와 '강진 寶林寺' 표기가 혼용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보림사'에 대한 소개없이 한글로만 '보림사'를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의 보림사는 오로지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일 뿐이다.

長興 寶林寺는 통일신라 시대, 759년에 창건된 千年 고찰이다.

그간에 그 寺名이 바뀐 적은 전혀 없었으며, 그대로 '寶林寺'이다.

千年을 넘겨온 '천년석탑, 천년석비,비로자나불 철상' 등이 국보 보물로 남아있다.

강진 지방에는 '보림사' 명칭의 어떤 절도 없음은 물론이다.



 한편,정약용 당신이 '강진 보림사'라고 말한 적은 전혀 없다.

정약용은 '장흥'지방과 '장흥 보림사'를 잘 알고 있었을 입장이다.



 먼저 정약용과 '長興'을 살펴본다.

1801년 신유사옥에 남쪽으로 쫒겨간 여섯 유배객이 있었다.

그들중에 정약용은 강진으로, '치교 이관기'는 '옆고을 長興'으로 유배를 왔다.

두 사람 간에는 서신 교류도 있었다.

정약용이 '치교 이관기'에게 보낸 長詩도 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연담 유일(1720~1799)의 제자 혜장을 만나게 된다.

연담 유일은 정약용이 유배오기 전에 '長興 보림사'에 머물다가 입적을 하였다.

연담 유일의 시문 필적을 강진 보은산방에서 발견하고 정약용은 감회에 젖기도 한다.



 정약용의 다신계 제자에  '長興 출신, 영광 정씨 정수칠'이 있었다.

'長興 반곡(반산)'에 거주하면서 강진을 오갔다.

長興의 丁씨 집안은 이미 유배 전에 서울 남산의 정약용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 집안의 가승문서 정리를 정약용에게 부탁했었던 것이다.

강진 유배객 정약용은 '장흥 반산' 丁씨 집안에 부탁의 편지를 수차 보내기도 하였다.

또다른 長興의 丁씨 집안 사람에게 '영호정 팔경'시를 주기도 하였다.

'長興 丁씨'라는 표현도 하였다.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에서 앞바다 건너편에 멀리 보이는 산이 '長興 천관산'이다.

그 일대에서 가장 높다.

정약용은 '장흥 천관산'에 관련하여 사회비판詩, '蟲食松'을 남겼다.

정약용이 다녀간 '강진 정수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



 여타 <경세유표> 등에도 인근 지방과 더불어 '長興' 사정이 간간히 언급되고 있다.

정약용은 말했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ㆍ강진ㆍ영암ㆍ長興 등 모든 바닷가 고을은 茶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또한 그럼에도 정약용은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를 아예 몰랐을 것인가?

과연 '강진 普림사'와 '장흥 寶림사'를 구별하지 못했을까?

정약용이 '장흥 寶림사'를 잘 알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사정이 있다.



 정약용의 글, "소경에게 시집을 간, 강진 여자(道康 瞽家婦 詞)"이다.

'나이든 소경에게 팔려 시집을 간, 강진성 동촌 마을 여자'의 고통과 안타까운 현실을 그렸다.

강진 동촌 여자는 '장흥 寶림사'로 첫 도망을 가서 출가를 하였다가 붙잡혀온다.

다시 두번째 도망을 가 '장흥 보림사' 북쪽의 '화순 개천사'에서 다시 붙잡혀 오는 내용이다.

'장흥 보림사'를 '普林'이 아닌 '寶林'으로 정약용은 표기하고 있다.



글 전문에 드러난, 피난처 위치에 관한 전체적 맥락을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정약용은 강진 여자의 도망길에 관한 사정을 잘 알았음에 틀림없다.

'강진성 동촌 - 장흥 보림사 - 화순 개천사'라는 지리적 경로에 정통하였던 것이다.



 ㅡ소경에게 시집간 여자...정약용

[道康瞽家婦 詞]



 ...(전략)....

兒今計已定  /저는 이제 마음을 정했으니 

無復顧女行  /다시는 여자의 도리 돌보지 않으렵니다

久欲投淸池  /진작부터 깊은 淸池에 몸을 던지자 했으나

寸腸苦未硬  /성질이 모질지 못해 어려워요

傳聞寶林北  /들으니 (장흥) 寶林사 북쪽 계곡에

窈窕有僧房  /조용한 僧房이 있답니다

兒今計已決  /저는 그리 가기로 작정을 했으니

勿復生阻搪  /제 발길을 막으러 마옵소서

..(중략)....

遂與爲弟昆  /마침내 더불어 舍兄舍弟 되었지요

法名是妙靜  /法名은 묘정妙靜이라 이르고

燃臂受戒言  /聯臂를 하고 受戒도 하였지요

已習般若經  /벌써 般若心經을 외웠고

每飯念世尊  /每飯 때마다 念佛을 한답니다.

今始吐情實  /이제야 비로소 情實을 고백하고

說住城東村 /강진읍내 東村에 자기 집이 있다면서

遣我報阿母 / 나더러 어머님께 소식을 전해 달라 하고

兼付此衣裙  /兼하여 이 치마 저고리 싸줍디다

...(중략)..

中宵又逃身 / 한밤중에 또 다시  몰래 도망을 나와

趲程凌帶嵲 / 산마루 지대를 넘는 바쁜 趲程길 끝에

行至開天寺 /그 다다른 곳이 (화순) 개천사 절이라

留滯十餘日 /이 절에서 십여 일 묵었을 제

瞽家尋到此 /소경(瞽家)이 거기에서 찾아냈더라오

....(후략)....



 

돌이켜보면, '강진 普林사' 해프닝은 한 사람의 사소한 착각에 기인할 뿐이다.

'보림茶'에 관련하여 '강진 普林사'로 혼동됨은 '귤산 이유원' 때문이다.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의 착각은 두 가지.

'보림사' 위치에 관련하여 정약용의 유배지역 '강진'에 있을 것으로 오해하고 만 것.

'보림사' 명칭에 관련하여 '普'와 '寶' 사이에 혼선을 일으킨 것.

그리하여 <임하필기> 등에 '강진 普林사'로 표기한데서 그런 오해가 통용되고 말았다.



 한편,이유원은 '강진 만덕산 백련사' 역시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표기한 적도 있다.

'강진 백련사(만덕사)'를 '강진 보림사'로 간주하고서 단순 오기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이유원의 경력을 보면, 그가 강진 보림사 현지를 직접 방문한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보림다'의 製茶者를 '열수 정약용'에 연결시키다보니 그런 오해가 시작되었을 것., 

유배객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관내에 위치한, 강진지역사찰로 그 절을 오해한 것이리라..

그래서 "普林寺 在康津縣"이라 가볍게 말했을 것.



 다른 한편으로, 이유원은 '호남 四種'이란 글에서는 '강진 寶林寺'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삼여탑'이란 글에서는 '寶林茶'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니 제반상황을 종합해보면, '강진 普림다'는 '장흥 寶림다'의 단순착오 표기일 것이다.



 정리하여 본다.

'보림다(寶林茶)'는 '長興 寶林寺'에서 시작된 '보림사 죽로차'를 말한다.

'보림사 雨前茶'이다.

귤산 이유원이 언급한 '보림사 竹露茶'와 같다.

'떡차 병차(甁茶)'이다.

'보림백모(寶林白茅), 보림금설(寶林禽舌) 작설차'로 널리 명성이 높았다.

일제 1930년경의 조사기록에 의하더라도 '長興 寶林寺'의 '떡차 죽로차'가 확인되었다.

장흥 지방에는 그간에 '돈차(錢茶),청태전(靑苔錢)' 명칭으로 전승해왔다.

또한 보림사 대밭(竹田)의 '작설차'가 유명하였다.

앞서말한 보림사 천년석비, '보조선사 창성탑비(884년)'에 '茶藥' 두 글자가 나온다.



 이하.정약용의 글과 이유원의 글을 소개한다.

이유원의 '강진 普림사' 표기부분을 '장흥 寶림사'로 고쳐 이해하면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강진 지방에는 '보림사'란 명칭의 어떤 절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정약용이 '장흥 보림사'를 직접 다녀간 기록 역시 찾을 수 없었다.



 

ㅡ경세유표, 동관공조 - 사관지속....정약용

"...살피건대, 남방 여러 고을에서 산출되는 차(茶)는 매우 좋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ㆍ강진ㆍ영암ㆍ長興 등 모든 바닷가 고을은 茶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내 생각에는 茶가 나는 모든 山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초목(樵牧)을 금지하여 그것이 무성해진 뒤 해마다 몇 근씩을 임형시에 바치면 

그 茶를 다시 만하성(滿河省)에 보내 좋은 말을 사다가 목장(牧場)에 반급(頒給)하는 것도 

또한 나라의 쓰임을 넉넉하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



 

ㅡ임하필기 ........이유원

"...백월비(白月碑)는 옛날에는 영천(榮川)에 있었는데, 중간에 그 소재를 잃었다. 

상고자(尙古子) 김광수(金光遂)가 영천의 이웃 고을에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 비를 어느 밭에서 찾아내서 운반해다가 관아의 헛청에 두었는데, 그 탁본이 세상에 나다닌다. 

뒤에 홍이계가 영천에 가서 그 비를 찾아보았더니, 폐허가 된 정원에 버려져 있었다. 

얼른 사람들을 시켜서 메어 오게 한 다음, 

주인에게 부탁하여 목갑(木匣)을 짜서 바람과 비를 막게 하였다.

그리고 홍이계는 김생(金生)의 글씨를 널리 찾았는데, 

계림(鷄林)에서 태로원(太櫓院)의 작은 편액을 발견했고, 

강진(康津)에서 ‘萬德山 白蓮社’라는 여섯 글자의 대자(大字)를 발견하였다. ..(후략)





 ㅡ임하필기 - 삼여탑(三餘塔)........이유원

-임신년,1872년.



 大芚寺 승려 草衣가 그의 선사인 玩虎大師를 위하여 삼여탑(三餘塔)을 건립한 다음 

都尉 해거(海居 洪顯周)에게 명(銘)과 시(詩)를 부탁하고 

자하(紫霞) 신위(申緯)에게 서문을 부탁하면서

보림차(寶林茶)를 선물하였다. 



 서문에서, “별이 오자 왔다가 진(眞)이 떠나가자 떠나갔으니, 이는 生死의 두 꿈이다. 

叢林의 맹주가 되어 華嚴을 강講한 것이 19년이고, 

金碧 광채의 장엄 玉像을 새긴 것이 1003개이니, 

이것은 두 꿈 중간의 공화 사업(空花事業)이다.” 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뒤에 門人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과거도 그와 같고 현재도 그와 같고 미래 또한 그와 같다.” 하여, 

드디어 ‘삼여(三如)’로써 대사의 시호를 삼고, 그 탑에 ‘삼여지탑(三如之塔)’이라 썼다. 



 내가 임신년(1872년) 상원(上元)에 사시향관(四時香館)에 있으면서 

고경 선사(古鏡 禪師)와 보림차(寶林茶)를 마시다가 <草衣錄>을 언급하게 되었다. 

탑의 명(銘)과 서(序)를 서로 보니, 초의는 박금령(朴錦舲)과 가장 교분이 두터웠다. 

보림차(寶林茶)는 강진(康津)의 죽전(竹田)에서 생산되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품질이다. 



 

ㅡ임하필기 - 호남 四種지품........이유원



 "강진(康津) 보림사(寶林寺) 대밭의 차는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은 보이차(普洱茶) 못지않으며, 

곡우(穀雨)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해남(海南) 등지에 생달나무가 있다. 

열매에서 기름을 취하여 응고시켜 초를 만들면 품질이 기름초[膩燭]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부녀의 유종(乳腫)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쓴다. 

이 또한 정열수(丁洌水)가 고안한 방법이다.



제주(濟州)에서 나는 수선화(水仙花)는 추사(秋史)가 처음 알았다. 

올바른 방법으로 키우면 강남(江南)에서 나는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토에서는 오색화(五色花)가 피지만 바다를 건너면 색이 변하고 만다.



또 황차(黃茶)를 취하는데, 燕京에서 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히 괜찮다."



 

ㅡ가오고략(嘉梧藁略) -죽로차........이유원

<주> 가오고략은 1871년 전후에 일단 완성을 하여 만년에 추가 편집을 한 것으로 추정.



 普林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普林寺在康津縣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縣屬湖南貢楛箭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寺傍有田田有竹

대숲 사이 茶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竹間生草露華濺。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世人眼眵尋常視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年年春到任蒨蒨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何來博物丁洌水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敎他寺僧芽針選

....(후략)



 

ㅡ참고자료

-귤산 이유원(1814~1888)



본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 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 급제, 예문관검열 · 규장각대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 함경도관찰사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수원유수로 좌천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68년 고종이  ‘가오(嘉梧)’  서사(書賜) 

1872년 고경선사와의 만남. ,'삼여탑'에서 '보림다' 거론.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 영중추부사.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 청나라 이홍장으로부터 해외 열강에 관한 통상 및 교류 반대에 관한 지침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임하필기(林下筆記) · 가오고략(嘉梧藁略) · 귤산문고

덧글 ()

박형상  / 2014-07-21-14:59 삭제
,,역시 긴네..ㅎㅎ

앞 뒤 부분을 분리하여 ...뒷쪽의 첨부 자료 부분이야 그냥 넘어가도 무방할 듯.



..남도 지방의 茶,.

..정약용의 유배지 사정.

..장흥, 강진 사정...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일독해주시면 감사할 일....
김원배  / 2014-07-21-16:17 삭제
인내심을 갖고 읽었네.

장흥 강진쪽의 차가 예로부터 유명했군.

요사히 보성의 차밭 대부분이 세월호의 유병언 소유라는 소문인데

이제 그 차밭을 누가 물려받을지......

아 참! 또 보성하면 조석현 대감이 나올 차례인가?
박형상  / 2014-07-21-17:19 삭제
《Re》김원배 님 ,

아..ㅎㅎ..보성 지방에도 원래의 전통 차가 있었을 것이지만 

....요즈음 매스컴에 뜨는 보성 다원 차밭들은 일제 시대에 산업적으로 경작된 것들..ㅎㅎ

조대감이 섭섭해 하려나 ㅎ



얼마전에 그곳 대한 다원을 가보았는데... 역시 상쾌한 공간!



...그리고 ..원배의 남다른 인내심을 경하하네...ㅎㅎ
조석현  / 2014-07-22-10:21 삭제
현 보성차밭은 일제 시대 개발된 지역을 근간으로 한 것은 맞네

그런데 일제가 이곳을 차밭으로 일군데는 자생차가 가장 많은 차재배지 적지라 선택한 것 같네

보성은 명실공히 자생차의 중심지. 101곳으로 전국의 77%를 차지한 전남의 43%, 전국의 33%나 되네



가장 많은 자생차가 있는 지역이지만 차의 역사 발굴이 미흡해 내가 정리한 부분이 다음과 같이 있네



조선 후기 보성의 다인과 차생활

http://blog.naver.com/gohongik/80178745233
이세경  / 2014-07-23-10:06 삭제
茶건 술이건 결국은 입으로 가는 물건인데 너무 의미 두니 거창하기도 하고 



미식가 별로 좋아 않는 스타일이라,,,

 하기야 뇌과학자인가 유전학자인가 하는 분 노가리 들으니까 인간이 130만년? 전쯤 부터인가 화식으로 요리를 하면서 음식 섭취시간이 대폭 줄어 유인원은 하루 9시간을 음식 드셔야 하는데 요리하며 대폭 줄었다는 주장,,

뇌로 가는 열량 영양 혈량이 골이란 게 골 때리는 게 송장 전체 근수의 2%밖에 안되는 게 

열량 혈류량은 전 송장의 20%를 써 드신다네,,, 



맛 좋은 거 좋아하는  거야 부르조아 아니 사대부 땡초 먹사들 주특기인 건 아네만,,

허균같은 혁명가인지 혁명가 껍딱쓴 철새내지 권세기생충인지 모르는 천재시인(이건 인정한다)도 屠門大爵인지처 드시는 데 조예 깊은 글 (쉽게 말하면 나의 미식 자랑기) 쓴 판인데 갸가 도마나 잡아 봤겠어 과도를 밥아봤겠어? 









그저 편하게 기분 좋게 좋구나 하고 드시면 그게 행복 아닌가 하네,, 



陸羽의 鴻漸이네 수질 따지고 그릇따지고 



艸衣 意詢인가의 茶神이네 따지면 복잡한 거 싫어하는 체질상 전신에 아토피 발생할 지경이고 



내 생각으로는 秋史하고 茶山이 차 문화 다 버려 놓은 게 아닌 가 하는 생각 들고 



倭式 茶道인지 茶法인지에 저항한답시고 쌍용 김성곤이 마누라 김미희인가가 

茗園文化財團인가 만든 거로 아는 데 틀릴 지도 모르고 



내딸 이름도 명원인데 차싹 茗자를 쓰려다가 인간이 어찌 풀 따위 이름 쓰나 해서 

周易 卦象 짚어 地火明夷 나와 明을 땄다네,, 3류 작명가 솜씨이지만,, 



또 말이 샜네,, 박변의 高雅한 글에 흠내서 미안하이.. 海諒하시길,,



어르신들 말대로 먹는 거로 장난하면 벌받느니 하는 생각으로 간소하게 건강하게 안 굶어 죽을 정도로만 

들고 골때리는 활동은 계속 해야 되지 않나 하는 게 불량 골통 생각일세..
박형상  / 2014-07-23-12:56 삭제
《Re》이세경 님 ,

..아니.......한가지....잘 지적하였네



강진에 온 유배객, 다산 정약용은 

이른바 '茶의 맛과 멋'을 말한 '茶人'이 결코 아니었다네..



어떤 茶 전문가는 차를 '구도를 위한 이상적 정신 음료'... 운운 하던데...

정약용에겐 그런 식의 茶詩는 단 한편도 없다네..

뭐 '茶禪一味''茶半香初' 이런 식의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네...



茶人의 法道와 몸가짐,

茶人의 깨우침을 말한 적도 물론 없고...

이른바 茶人의 風流,, 

정도 이상의 茶具 타령을 과장한 일이 전혀 없다네...



그러니 요즘 벌이는 행사..

 ...'정약용 茶人상'..은 ....하나의 해프닝!

'조선 茶 중흥조'..라는 말 역시 꽤나 이상한 말..



그 시절 정약용은 '실용주의자'였을 뿐...

한 개 표주박을 겸용하여 술과 茶를 함께 마시기도 한 분.

茶 산업과 國富를 연결하여 생각하신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로는 '餠茶(떡차)' 만들어놓고.....

때로는 주변에 선물을 보내주고, 

때로는..용돈 벌이(?)도 하신 분.



정약용에 관한 여러 神話와 誤解들중 하나가 

.....'정약용 茶생활'에 관한 부분!



그분은 그저 아픈 당신 몸 추스리느라.

...<茶藥>,,으로만 음용하신 분..



해배 후 고향에 돌아가서는 

강진에서 보내오는 茶藥을 간절히 기다리신 분.
문영완  / 2014-07-25-00:31 삭제
난 전직이 선생이어서 그런지 여길 와 보면 "늘 아깝다 아까워"하는 탄식밖에 안나와

참 세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인재들을 안키운걸 보면……
이세경  / 2014-07-25-17:40 삭제
《Re》문영완 님 ,

인재란 건 인간사 災殃덩어리이나니 ㅎㅎ
박형상  / 2014-07-25-18:56 삭제
《Re》문영완 님 ,

ㅡ영완이,세경이.....우리 고향절, 보림사 창성선사비(884)엔 우리나라에 딱 하나인 문구가 있다네



...<무위 자연>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말......<무위임운(無爲 任運)>....



<심우도>와는 조금 다른 <십우도>,

, <목우 十牛圖>에 '임운任運'이 나온다네...



....찾아 잡아서 길들이던 소를 ...아예 풀어놓고 .....그냥 나도 눈을 감고 자는 제6단계.

..그것을 두고 ....임운(任運)이라하데..
문영완  / 2014-07-26-21:15 삭제
<<Re>> 박형상 님,

오늘 낮잠을 자고나니 다섯 시데 그려

당연 임운은 아니지만…

전직 수학선생 두들겨서 나게 하는 소리, 

마른하늘 천둥인지 형상대사 죽비인지

번개를 못 본 걸루 봐서 중국산 천둥임이 분명컸다.

“無爲 任運”

終도 始도 如一하니 법대로 나대로

깨워줘서 고맙네
문영완  / 2014-07-28-20:39 삭제
《Re》조석현 님 ,

링크 따라 갔다가

"역리(易理)로 본 다도(茶道)" 잘 읽었네

제대로 읽은 건지 아닌지 확인 해 주시게나

초의 선사 언급부분에 중부가  괄호 속에 巽上坎下로 씌어져 있네. 

다음에 만나거든 포차 한 번 베풀게나.
문영완  / 2014-07-28-20:50 삭제
《Re》이세경 님 ,

세경이의 "징" 소리 한 방이면 그 운이 십리는 간다네
이세경  / 2014-07-30-01:17 삭제
《Re》문영완 님 ,

中孚면 風澤인데??  巽上坎下면 風水환 (水+奐) 인데? 아마 잘못 쓴 卦名같네,, 

陸羽가 鴻山노래 부른 것도 風山漸 卦辭에서 따온 걸로 아는데,,
문영완  / 2014-07-31-11:53 삭제
《Re》이세경 님 ,

오래된 글이라…

옛 적에는 미스프린트가 심심찮게 있었던지라 그로 인한 에피소드도 다양했지않나

또 친구나 스승의 중요성도 일깨우는 부수적 효과도 있었고…

특히나 스승의 중요성은 더욱 도드라질밖에

학덕있는 스승은 지원책을 강구해서 재량과 권위로 제자를 키우도록 해줘야했었는데

돈 몇 푼 쥐니까 스승을 경멸하고 돈으로 학덕을 품평하는 세태가 유행했었지.

민주라고 들이대면서 너도 한 시간 그 도 한 시간, 그 놈도 그 분도 같은 인간 같은 선생, 네 글도 한 편 그 글도 한 편, 장수나 글자수로  뒷줄 탄 놈은 목소리가 커지고 사진발 흥행으로 에듀테인먼트를 강요했었다네.
조석현  / 2014-08-04-16:26 삭제
《Re》문영완 님 ,

졸고를 관심있게 보아주고 오류를 발견해 주니 감사할 따름일세

兌로 수정해 놓았네. 고맙네 ~
조석현  / 2014-08-05-11:20 삭제
《Re》박형상 님 ,

곽안의 십우도의 소는 참나인데 자네가 말한 보명의 목우도의 소는 에고인 것 같네

단계는 6단계가 無碍 7단계가 任運으로 나오네

목우도를 점오라고 하고 십우도를 돈오라 말하는데

아마 목우도의 1부터 5단계까지 견성의 단계(날 뛰는 소 - 고삐 잡기 - 제어하기 - 머리들기 - 길들이기)를 표시하고 십우도에서는 3見牛에서 바로 4得牛로 표시하여 돈오를 나타낸다 보는 것 같네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란이 많았으나

깨침의 순간을 표현하면 돈오가 맞고 목우도의 점오가 배척되나

근본적인 돈오 전에 점오도 있을 수 있다고 보네



일반적인 과정을 보면

점수(돈오를 위한)-돈오-점수(돈오에 의한)오 보네만

이것은 내 경험에 의한 것이고

성철 스님은 자신의 경험으로 돈오돈수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니

누가 틀리고 맞고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을 수 있네



돈오뒤에 점수가 없다는 것은 논점 차이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것도 돈오를 점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돈오 뒤에 배우는 것을 점수로 표시한 것이라 보네



분명 돈오뒤에 진짜 (돈오에 의한)공부와 삶이 펼쳐지는 것은 확실하네

돈오전엔 가짜를 진짜를 알고 살다 진짜를 알고<돈오>

돈오후엔 진짜에 의한 삶이 펼쳐지는 데, 끝었는 배움과 그에 따른 순수한 행이 따르네

꿈꾸던 知行合一은 돈오후의 이야기이고 참행복도 돈오후 이야기....

깨치고 나면 왜<깨침>을 강조하는 지 알 수 있네



근기가 다르고 사정이 다르니 둘다 맞을 수 있고

문제는 산을 오르지 않고 산봉우리 가는 길과 하산길을 논한다는 것이네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솔직히 내가 보면 십우도나 목우도나 둘다

명쾌하지 않고 잘 다가오지 않네

너무 단계를 늘여 놓고 특히 7에서 10단계까지는 그렇네

아마도 저자도 경험하지 못한 단계를 늘어놓고

나 또한 그 단계는 그러니 그렇네만



직접 길을 가보야 알 수 있고

단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찌됐던 내가 직접 가고 알고 행하는 일일세
문영완  / 2014-08-06-23:52 삭제
《Re》조석현 님 ,

入廛垂手의 경지에 이름을 축하하네.

누구는 푸른 소를 타고 다녔다는데,

이오(Io) 아니라도 흰소는 꿈속에서도 매력을 느꼈었다네
조석현  / 2014-08-07-12:58 삭제
《Re》문영완 님 ,

입전수수 경지야 꿈 아니겠는가?

연꽃을 좋아할 뿐 그 깨끗함과 향기에 어이 미치겠는가?
박형상  / 2014-08-08-17:43 삭제
《Re》조석현 님 ,

아..나로서는 그냥 <무위 임운> 정도에만 관심이 있다네...



ㅡ그리고 예전에 '해인사 성철의 돈오돈수'와 '송광사 보조의 돈오점수' 논쟁을

나름 지켜본 적이 있는데...

양쪽이 '과연 돈오 단계는 어떤 의미의 어떤 단계를 뜻하는지?'에 대해 

논쟁의 수단으로서...

'돈오개념' 정리를 먼저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마치 이기론 논쟁처럼 

서로 다른 '돈오' 잣대을 가지고 논쟁한다는 것은 영원한 평행선 아닐까 싶었네..

'궁극 절대지의 돈오, 높은 수준의 돈오, 어느 일정한 수준의 돈오, 

높낮이에 관계없는 돈오',..등을 구별해 놓고 논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너 한번 앉어나 봤냐? 

너 한번 깨쳐냐 봤나?..등은 언어 폭력 아닌가 싶어..



ㅡ개인적으로는 '돈오점수' 쪽이라네..

정말이지,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론'은 한국 불교의 어두운 그늘로 간주하고싶더군..

성철이 나름 훌륭한 스님이긴 해도 ..그 논쟁하는 모습이나 논지를 읽어 보노라니...

.솔직하게 말하면...또 다른 의미의 땡중이 아닐까 싶었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대승,소승' 개념도 기실 꽤 우스운 것 아닐까?



그는 정말 궁극적인 돈오를 하였다는 것일까?

그가 제시한 돈오는 과연 어떤 절대적 경지일까?

그가 정말 석가모니 돈오 경지를 깨쳤을까?



성철 스님이 이른바 돈오를 이루고서 대승 구제를 어떻게 하셨다는 것인지?

우리들이야 사실 '점오점수'의 길이라도 꾸준하면 족한 것 아닐까?싶네
조석현  / 2014-08-09-09:40 삭제
깨침의 경험을 해보면 그 내용은 고불이래로 다 같다는 것을 아네

실제 경험하지 않고 이야기하면 언어에 메이고 

자신의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해석하게 되니 어렵네

불립문자라 하지 않나



내가 곧 부처(꼭 부처가 아니라도 관계없네)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데--- 경험의 정도는 다르다 생각하네



그래서 확철대오와 구별도 되고~

의식의 상승과 확장의 차이가 있네

그에 따라 행도 달라지고

따라서 지행합일의 정도를 보면 깨침의 깊이가 헤아려지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 얼마나 걸림이 없는가 등도...

나와 남을 배려하고 이익되게 하는가?



내 마음이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가?

수행이 많이 될수록 분명 마음은 어린아이가 되네



좋지 않는 습관도 즉시 끊을 수 있는가? - 이것 쉬운 일 아니네

(잠재의식,무의식이 참나에 조복하여 운신된다)



나를 비난해도 억울함을 당해도 화가 나지 않는 지?

아니 화가 나는 모습을 관조하고 초연할 수 있는 지?

수행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보는 힘

회광반조의 빛은 커지네



사실 작은 많은 깨침이 있고

그 깨침도 점점 커질 수 있네

그런데 통상 돈오라 함은

사람의 근본 원리와 우주의 원리를 깨달음으로 근본적인 깨달음이고

그 순간만큼은 담박 깨치는 돈오의 깨달음이지만

수수많은 점수와 점오의 결실이라 볼 수 있네

(현생이 오히려 적고 수많은 전생의 결과라 볼 수 있다)

돈오후에 진짜 확연히 드러나긴 하지만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경지에 잠깐 오른 것이고
조석현  / 2014-08-09-10:23 삭제
성철의 돈오돈수에 대한 내 생각도 비슷하네

상당히 위험하네



대승이라 하지만 소승에 자꾸 머무르는 상황에

한번 깨치면 끝이다는 식으로 오해할까봐



나는 이렇게 이해해 보네

성철의 깨침이 워낙 강렬하고

확연해지고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을 정도여서

돈오돈수를 주장하지 않았나?



나는 그 부류가 아니고

많은 사람 역시 비슷할꺼라 보네



성철의 열반송에서 고백?한 것 같은데

세상 사람들을 속여 죄가 많은데

(진리가 아닌 말을 많이 했다는 건데

 - 좋게보면 내 말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일게고)

그래도 한바퀴 진리는 붉게 온 세상을 비춘다

(一輪吐紅掛碧山)



마지막엔 돈오로 알은 진리가 변함없음을 말하고 있네

뭐 알든 모르든 변하는 자리가 아니네만은



나에게 머무르면 작은 수레

남에게까지 이르러 함께 타면 큰 수레

크든 작든 수레는 수레이니 한 수레

옜날 걸어가는 것보다 수레타고 가면 빠르고 좋았겠지 뭐



혹 출가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하면 잘못 되었고

확실한 건 생활 자체가 수행, 수도이고

깨달아 끝났다면 정말 그릇이 작은 소승이고

더 이상 진보가 없으니 불행한 일이고

깨달음의 마디가 이제 본게임의 시작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네
문영완  / 2014-08-09-19:33 삭제
《Re》조석현 님, 박형상 님



성철 스님 말인가? 

그 분 말일세…,     

한 깨달음 얻다보면 지난 득의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지 않나?

도에 관해서는 워낙 스크루우지 같은 양반이라 자신의 벽에 안팎으로 온통 칼침을 박아놓고 그 안에 용맹정진하신 것 같으니 만일 그러셨다면 일견 허무하지도 않으셨겠나 싶네.

‘무소유’라…, 한마디로 줄 것 없다. 그러니 받을 것도 없다. 기대하지 말아라. 원래 한물건도 없던 것이었는데 

너무 거창해서 미안하다. 

공부했다고 몇 마디 떠든 것이 세상을 속인 셈이 되었구나. 

꼭 그 말씀을 하고 싶으셨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네.

덧붙여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드셨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또, 그쯤 되는 스승은 완전해야 한다거나 ‘무오류의 존자’여야 한다고 보지 않네.

그런 스승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스스로가 그런 인연을 얻을 그릇이 못됨을 아니 어쩌겠는가, 

그런 생각을 허할 수밖에.

다 이 세상이 낳은 것이니 그 테두리를 안고 갈 수밖에.

…… …… ……

이런 생각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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