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정약용과 '寶林茶, 寶林寺'
-'보림차,보림백모, 보림금설' 茶 명칭이 정약용 관련서적에 꽤 언급된다.
그런데 '보림차' 산지로 '강진 보림사(康津 普林寺)' 문구가 종종 나온다.
어떤 옛글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진 普林寺'와 '강진 寶林寺' 표기가 혼용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보림사'에 대한 소개없이 한글로만 '보림사'를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의 보림사는 오로지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일 뿐이다.
長興 寶林寺는 통일신라 시대, 759년에 창건된 千年 고찰이다.
그간에 그 寺名이 바뀐 적은 전혀 없었으며, 그대로 '寶林寺'이다.
千年을 넘겨온 '천년석탑, 천년석비,비로자나불 철상' 등이 국보 보물로 남아있다.
강진 지방에는 '보림사' 명칭의 어떤 절도 없음은 물론이다.
한편,정약용 당신이 '강진 보림사'라고 말한 적은 전혀 없다.
정약용은 '장흥'지방과 '장흥 보림사'를 잘 알고 있었을 입장이다.
먼저 정약용과 '長興'을 살펴본다.
1801년 신유사옥에 남쪽으로 쫒겨간 여섯 유배객이 있었다.
그들중에 정약용은 강진으로, '치교 이관기'는 '옆고을 長興'으로 유배를 왔다.
두 사람 간에는 서신 교류도 있었다.
정약용이 '치교 이관기'에게 보낸 長詩도 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연담 유일(1720~1799)의 제자 혜장을 만나게 된다.
연담 유일은 정약용이 유배오기 전에 '長興 보림사'에 머물다가 입적을 하였다.
연담 유일의 시문 필적을 강진 보은산방에서 발견하고 정약용은 감회에 젖기도 한다.
정약용의 다신계 제자에 '長興 출신, 영광 정씨 정수칠'이 있었다.
'長興 반곡(반산)'에 거주하면서 강진을 오갔다.
長興의 丁씨 집안은 이미 유배 전에 서울 남산의 정약용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 집안의 가승문서 정리를 정약용에게 부탁했었던 것이다.
강진 유배객 정약용은 '장흥 반산' 丁씨 집안에 부탁의 편지를 수차 보내기도 하였다.
또다른 長興의 丁씨 집안 사람에게 '영호정 팔경'시를 주기도 하였다.
'長興 丁씨'라는 표현도 하였다.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에서 앞바다 건너편에 멀리 보이는 산이 '長興 천관산'이다.
그 일대에서 가장 높다.
정약용은 '장흥 천관산'에 관련하여 사회비판詩, '蟲食松'을 남겼다.
정약용이 다녀간 '강진 정수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
여타 <경세유표> 등에도 인근 지방과 더불어 '長興' 사정이 간간히 언급되고 있다.
정약용은 말했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ㆍ강진ㆍ영암ㆍ長興 등 모든 바닷가 고을은 茶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또한 그럼에도 정약용은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를 아예 몰랐을 것인가?
과연 '강진 普림사'와 '장흥 寶림사'를 구별하지 못했을까?
정약용이 '장흥 寶림사'를 잘 알고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사정이 있다.
정약용의 글, "소경에게 시집을 간, 강진 여자(道康 瞽家婦 詞)"이다.
'나이든 소경에게 팔려 시집을 간, 강진성 동촌 마을 여자'의 고통과 안타까운 현실을 그렸다.
강진 동촌 여자는 '장흥 寶림사'로 첫 도망을 가서 출가를 하였다가 붙잡혀온다.
다시 두번째 도망을 가 '장흥 보림사' 북쪽의 '화순 개천사'에서 다시 붙잡혀 오는 내용이다.
'장흥 보림사'를 '普林'이 아닌 '寶林'으로 정약용은 표기하고 있다.
글 전문에 드러난, 피난처 위치에 관한 전체적 맥락을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정약용은 강진 여자의 도망길에 관한 사정을 잘 알았음에 틀림없다.
'강진성 동촌 - 장흥 보림사 - 화순 개천사'라는 지리적 경로에 정통하였던 것이다.
ㅡ소경에게 시집간 여자...정약용
[道康瞽家婦 詞]
...(전략)....
兒今計已定 /저는 이제 마음을 정했으니
無復顧女行 /다시는 여자의 도리 돌보지 않으렵니다
久欲投淸池 /진작부터 깊은 淸池에 몸을 던지자 했으나
寸腸苦未硬 /성질이 모질지 못해 어려워요
傳聞寶林北 /들으니 (장흥) 寶林사 북쪽 계곡에
窈窕有僧房 /조용한 僧房이 있답니다
兒今計已決 /저는 그리 가기로 작정을 했으니
勿復生阻搪 /제 발길을 막으러 마옵소서
..(중략)....
遂與爲弟昆 /마침내 더불어 舍兄舍弟 되었지요
法名是妙靜 /法名은 묘정妙靜이라 이르고
燃臂受戒言 /聯臂를 하고 受戒도 하였지요
已習般若經 /벌써 般若心經을 외웠고
每飯念世尊 /每飯 때마다 念佛을 한답니다.
今始吐情實 /이제야 비로소 情實을 고백하고
說住城東村 /강진읍내 東村에 자기 집이 있다면서
遣我報阿母 / 나더러 어머님께 소식을 전해 달라 하고
兼付此衣裙 /兼하여 이 치마 저고리 싸줍디다
...(중략)..
中宵又逃身 / 한밤중에 또 다시 몰래 도망을 나와
趲程凌帶嵲 / 산마루 지대를 넘는 바쁜 趲程길 끝에
行至開天寺 /그 다다른 곳이 (화순) 개천사 절이라
留滯十餘日 /이 절에서 십여 일 묵었을 제
瞽家尋到此 /소경(瞽家)이 거기에서 찾아냈더라오
....(후략)....
돌이켜보면, '강진 普林사' 해프닝은 한 사람의 사소한 착각에 기인할 뿐이다.
'보림茶'에 관련하여 '강진 普林사'로 혼동됨은 '귤산 이유원' 때문이다.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1814-1888)의 착각은 두 가지.
'보림사' 위치에 관련하여 정약용의 유배지역 '강진'에 있을 것으로 오해하고 만 것.
'보림사' 명칭에 관련하여 '普'와 '寶' 사이에 혼선을 일으킨 것.
그리하여 <임하필기> 등에 '강진 普林사'로 표기한데서 그런 오해가 통용되고 말았다.
한편,이유원은 '강진 만덕산 백련사' 역시 알고 있었으며, 그렇게 표기한 적도 있다.
'강진 백련사(만덕사)'를 '강진 보림사'로 간주하고서 단순 오기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이유원의 경력을 보면, 그가 강진 보림사 현지를 직접 방문한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보림다'의 製茶者를 '열수 정약용'에 연결시키다보니 그런 오해가 시작되었을 것.,
유배객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 관내에 위치한, 강진지역사찰로 그 절을 오해한 것이리라..
그래서 "普林寺 在康津縣"이라 가볍게 말했을 것.
다른 한편으로, 이유원은 '호남 四種'이란 글에서는 '강진 寶林寺'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삼여탑'이란 글에서는 '寶林茶'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니 제반상황을 종합해보면, '강진 普림다'는 '장흥 寶림다'의 단순착오 표기일 것이다.
정리하여 본다.
'보림다(寶林茶)'는 '長興 寶林寺'에서 시작된 '보림사 죽로차'를 말한다.
'보림사 雨前茶'이다.
귤산 이유원이 언급한 '보림사 竹露茶'와 같다.
'떡차 병차(甁茶)'이다.
'보림백모(寶林白茅), 보림금설(寶林禽舌) 작설차'로 널리 명성이 높았다.
일제 1930년경의 조사기록에 의하더라도 '長興 寶林寺'의 '떡차 죽로차'가 확인되었다.
장흥 지방에는 그간에 '돈차(錢茶),청태전(靑苔錢)' 명칭으로 전승해왔다.
또한 보림사 대밭(竹田)의 '작설차'가 유명하였다.
앞서말한 보림사 천년석비, '보조선사 창성탑비(884년)'에 '茶藥' 두 글자가 나온다.
이하.정약용의 글과 이유원의 글을 소개한다.
이유원의 '강진 普림사' 표기부분을 '장흥 寶림사'로 고쳐 이해하면 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강진 지방에는 '보림사'란 명칭의 어떤 절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정약용이 '장흥 보림사'를 직접 다녀간 기록 역시 찾을 수 없었다.
ㅡ경세유표, 동관공조 - 사관지속....정약용
"...살피건대, 남방 여러 고을에서 산출되는 차(茶)는 매우 좋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ㆍ강진ㆍ영암ㆍ長興 등 모든 바닷가 고을은 茶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내 생각에는 茶가 나는 모든 山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초목(樵牧)을 금지하여 그것이 무성해진 뒤 해마다 몇 근씩을 임형시에 바치면
그 茶를 다시 만하성(滿河省)에 보내 좋은 말을 사다가 목장(牧場)에 반급(頒給)하는 것도
또한 나라의 쓰임을 넉넉하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
ㅡ임하필기 ........이유원
"...백월비(白月碑)는 옛날에는 영천(榮川)에 있었는데, 중간에 그 소재를 잃었다.
상고자(尙古子) 김광수(金光遂)가 영천의 이웃 고을에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 비를 어느 밭에서 찾아내서 운반해다가 관아의 헛청에 두었는데, 그 탁본이 세상에 나다닌다.
뒤에 홍이계가 영천에 가서 그 비를 찾아보았더니, 폐허가 된 정원에 버려져 있었다.
얼른 사람들을 시켜서 메어 오게 한 다음,
주인에게 부탁하여 목갑(木匣)을 짜서 바람과 비를 막게 하였다.
그리고 홍이계는 김생(金生)의 글씨를 널리 찾았는데,
계림(鷄林)에서 태로원(太櫓院)의 작은 편액을 발견했고,
강진(康津)에서 ‘萬德山 白蓮社’라는 여섯 글자의 대자(大字)를 발견하였다. ..(후략)
ㅡ임하필기 - 삼여탑(三餘塔)........이유원
-임신년,1872년.
大芚寺 승려 草衣가 그의 선사인 玩虎大師를 위하여 삼여탑(三餘塔)을 건립한 다음
都尉 해거(海居 洪顯周)에게 명(銘)과 시(詩)를 부탁하고
자하(紫霞) 신위(申緯)에게 서문을 부탁하면서
보림차(寶林茶)를 선물하였다.
서문에서, “별이 오자 왔다가 진(眞)이 떠나가자 떠나갔으니, 이는 生死의 두 꿈이다.
叢林의 맹주가 되어 華嚴을 강講한 것이 19년이고,
金碧 광채의 장엄 玉像을 새긴 것이 1003개이니,
이것은 두 꿈 중간의 공화 사업(空花事業)이다.” 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뒤에 門人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과거도 그와 같고 현재도 그와 같고 미래 또한 그와 같다.” 하여,
드디어 ‘삼여(三如)’로써 대사의 시호를 삼고, 그 탑에 ‘삼여지탑(三如之塔)’이라 썼다.
내가 임신년(1872년) 상원(上元)에 사시향관(四時香館)에 있으면서
고경 선사(古鏡 禪師)와 보림차(寶林茶)를 마시다가 <草衣錄>을 언급하게 되었다.
탑의 명(銘)과 서(序)를 서로 보니, 초의는 박금령(朴錦舲)과 가장 교분이 두터웠다.
보림차(寶林茶)는 강진(康津)의 죽전(竹田)에서 생산되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품질이다.
ㅡ임하필기 - 호남 四種지품........이유원
"강진(康津) 보림사(寶林寺) 대밭의 차는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이 체득하여
절의 승려에게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은 보이차(普洱茶) 못지않으며,
곡우(穀雨) 전에 채취한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이는 우전차(雨前茶)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해남(海南) 등지에 생달나무가 있다.
열매에서 기름을 취하여 응고시켜 초를 만들면 품질이 기름초[膩燭]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부녀의 유종(乳腫)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쓴다.
이 또한 정열수(丁洌水)가 고안한 방법이다.
제주(濟州)에서 나는 수선화(水仙花)는 추사(秋史)가 처음 알았다.
올바른 방법으로 키우면 강남(江南)에서 나는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토에서는 오색화(五色花)가 피지만 바다를 건너면 색이 변하고 만다.
또 황차(黃茶)를 취하는데, 燕京에서 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상당히 괜찮다."
ㅡ가오고략(嘉梧藁略) -죽로차........이유원
<주> 가오고략은 1871년 전후에 일단 완성을 하여 만년에 추가 편집을 한 것으로 추정.
普林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普林寺在康津縣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縣屬湖南貢楛箭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寺傍有田田有竹
대숲 사이 茶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竹間生草露華濺。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世人眼眵尋常視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年年春到任蒨蒨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何來博物丁洌水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敎他寺僧芽針選
....(후략)
ㅡ참고자료
-귤산 이유원(1814~1888)
본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 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 급제, 예문관검열 · 규장각대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 함경도관찰사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수원유수로 좌천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68년 고종이 ‘가오(嘉梧)’ 서사(書賜)
1872년 고경선사와의 만남. ,'삼여탑'에서 '보림다' 거론.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 영중추부사.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 청나라 이홍장으로부터 해외 열강에 관한 통상 및 교류 반대에 관한 지침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임하필기(林下筆記) · 가오고략(嘉梧藁略) · 귤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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