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 알려드립니다.
  • 본 사이트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준수합니다.
  • 회원은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내용과 타인의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및 기타 권리 를 침해하는 내용물에 대하여는 등록할 수 없으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주민번호, 휴대폰번호, 집주소, 혈액형, 직업 등의 게시나 등록을 금지합니다.
  • 만일 위와 같은 내용의 게시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게시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제목

-10년전 글,안개낀 장충단 공원.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11/06 13:27 조회수: 419

ㅡ안개낀 장충단 공원



ㅡ그 시절에 <증구문예>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남산 오솔길은 사시사철 그 분위기가 달라진다.

초봄의 개나리부터 진달래, 벚꽃, 아카시아를 거쳐 

마지막 전령, 은행나무 노란잎이 등장하면 가을 끝자락이다.

그 가을에 장충동 쪽에서 ‘장충단 비’를 지나 남산에 오르는 날이면, 

쟂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지고 낙엽이 수북하게 쌓이는 그 막바지가 되면, 

어떤 이들은 회상의 골짜기로 어김없이 빠져들게된다.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 때문이다. 

그 안개 속의 폐사지 석탑처럼 ‘안개낀 장충단공원’이 단단하게 서있다. 



“안개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최치수·작사/배상태·작곡)” 



 그 안개가 지금도 있을까? 

그 낙엽송 고목은 어디에 있을까? 

‘안개낀 장충단공원’, 그 안개 속에는 기억과 망각이 얼키설키 엉켜져있다. 

가을 햇빛 아래서도 기억과 망각이 조용히 힘겨루기 씨름을 한다.



 배호, 

그는 스물 아홉에 요절했다. 

그렇게 짧게 마감했음에도 온갖 시련을 이겨낸 중년 연륜으로 토해내는 듯 

‘깊고 두터운 중저음’으로 여유롭게 노래했다. 

절제된 흐느낌이었다



경박하다할 정도로 들떠있는 그 트롯 가수들을 보라. 

현, 송, 설, 태..이른바 뉴트롯 4인방과 비교해 보라 

그들에게는 없다. 

혼자 간직해온 색깔, 혼신을 다하는 떨림이 없다. 

그들에게는 ‘사무치는 순정, 싸나이 눈물, 삼키는 사연, 돌아서는 길’이 없다. 

그들에게는 ‘떨어지는 낙엽, 감싸주는 안개’가 없다. 

그들에게는 ‘남자의 무게’가 없다.

‘밀고 당기는 울림’이 없다. 



 배호가 있었던 1960년대.

영국의 비틀즈가 미국 땅을 한창 요란스럽게 만들던 때이다. 

한국에서는 이미자와 배호의 시대였다. 

1963년에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로 배호는 ‘굿바이’로 등장하였다. 

드디어 1966년에 ‘돌아가는 삼각지’가 히트하였고, 

1967년에는 ‘안개낀 장충단공원’이 온 세상에 넘쳐났다. 

그 해에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남진의 ‘가슴아프게’, 정훈희의 ‘안개’가 있었다. 

남진의 ‘미워도 다시한번’과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그 후 1969년의 일이다. 



 중학 2년을 중퇴한 채 부산에서 상경하였다. 

야간 업소에서 - 우리 중구 을지로 5가에 지금도 남아있는 ‘천지 카바레’라던가 - 

10대의 힘으로 드럼을 마음껏 두들겼다한다. 

라틴 리듬과 팝까지 보태면서 외로움과 서러움을 거침없이 토해냈다던 그 목소리. 

색소폰 소리를 짙게 깔고서 고향 그리움과 서울 생활 고달픔에 북받쳐했던 그 몸짓, 

꺾음목을 통해 ‘굵게 가늘게 높게 낮게’ 심금을 울렸던 그 바이브레이션 창법. 

남진·나훈아와는 또 다른 세계였었는데, 그 둘 보다도 훨씬 앞서 갔는데, 

그는 그만 날아가버렸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은 5,60대에게 무상 무심한 세월의 피난처이다.

록, 댄스, 발라드, 힙합, 테크노, 랩으로 뒤범벅된 그들끼리의 가요판, 

젊은이가 아니면, 아니 어린애들이 아니면 알아챌 수조차 없는, 

그 찢어지고 갈라지는 괴성들이 갈 곳  잃은 중년의 가슴에 가을을 앓게한다. 

어찌 ‘배호의 트롯트’를 촌스럽다고 말할 것인가. 

이미자의 그것과도 전혀 다르다. 

배호는 오빠부대, 박수부대의 원조격이다. 



'굳게 다문 두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던 그의 반항기 서린 비장감에 

도시 서민의 애환과 실향민의 긴 한숨이 한껏 죽이 맞았다. 

서울 밤거리를 떠돌며 두끼만 먹고 살았다는 배호의 배고픔,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며 폐결핵과 신장병에 내내 시달렸다는 그의 병고, 

그렇게 박수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인 양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소통의 즐거움’, 아니 '대리 만족'이었다. 



 오늘도 ‘50대 중년 남성들’의 노래방에선 배호가 단연 짱이다. 

‘오로지 배호’라는 배호 매니아들이 건재해 있다. 

여기저기서 ‘나도 배호’라고, 그 가짜들이 진짜처럼 행세한다. 



그의 낮고 높은 목소리를 닮아보고자 애써 공들이며 지나간 젊음을 아쉬워한다. 

떠나온 고향과 부모님과 그 곳에 남겨둔 가난과 어린 시절의 상처를 되새겨보는지 모른다. 

변화무쌍 세상사가 버겁기에 차라리 ‘먼저 죽은 배호’를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새롭고 낮선 디지탈 전자파가 두렵고 혼돈스러워 ‘가는 세월’을 붙잡고자 

거기 '안개낀 장충단공원의 배호' 앞에서 마냥 서성거리는지 모른다. 



가창력보다는 얼굴 모양새와 몸매를 앞세우는 요즈음 세상 기준이 싫다싫어, 

‘실력으로만 살았던 배호’에 아직껏 집착하는지 모른다.  



 ‘배호式 트롯트’, 

그 ‘안개낀 장충단공원’에는 우리들 중년 남성의 삶이 농축되어있다. 

너무 속절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좀더 낮게, 좀더 느리게, 좀더 높게, 때로는 남모르게 혼자서 흐느끼고싶은’, 

남자의 흔들리는 욕망이 녹아있다. 

그의 고독한 운명, 치열한 삶에 공감하며 중년의 상실감을 달래보는지 모른다. 



 소설가 송영은 배호를 ‘세인트 裵’, 즉 ‘성(聖) 배호’로 대하자고 말했다한다. 

배호라고 어디 '엘비스 프레스리'보다 못 할리 있겠는가.

배호는 '신화가 된 사람', 아니면 '영원토록 신화가 되어야 할 인물' 아닐까? 



 장충단 공원’은 공식적으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공원이다. 

1984년경에 남산공원으로 흡수되고말았다.

행정적으로는 그냥 ‘남산공원 장충지구’라고 지칭된다

오늘 이 순간, ‘장충단공원’은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다. 

'동대입구'라는 3호선 지하철역 명칭에 ‘장충’이나 ‘장충단’은 쫒겨났다. 



 기실 장충단 공원의 '그 장충단’ 이름마저도 오래 전에 사라진 역사적 유물이다. 

‘장충단’은 을미사변때 명성왕후 지키려다 순국한 충신열사들을 기리려 1900년에 만든 제단인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폐사되고 말았다. 

남아있던 사당 건물은 6·25 전쟁때 마저 무너져버렸으며, 

그 ‘장충단 석비’만 신라호텔 부지에서 1969년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장충단공원은 지금 분명 존재하고 있다,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 속에.



 그때 ‘돌아가는 삼각지’는 20만장,

 ‘안개낀 장충단공원’은 50만 장이 팔렸다한다. 

용산구 쪽 ‘삼각지 교차로(로타리)’ 옛터 그 장소에는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대신 서있다. 

우리 중구 장충단공원에도 큰 돈들인 노래비는 아니더라도 

‘안개낀 장충단공원 표석’이라도 하나 조그맣게 세웠으면 한다. 

배호는 ‘비내리는 명동거리’, ‘퇴계로의 밤’도 불렀다. 

1993년부터 4년동안 장충단공원에서 배호가요제가 열렸었다. 



 '짧은 5년' 노래 생활에 '무려 250곡'을 남기고 간 그.

 ‘마지막 잎새’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잎새처럼 떨어져 가버린 그. 

우리들 가슴속에 ‘장충단공원’을 안겨주고 안개 속으로 떠나버린 그. 

그런 그를 위하여, 

「안개낀 장충단공원, 배호(1942 ~1971)」라고 야무지게 새겼으면 한다.



그 안개에 젖은 ‘그 이름’, ‘그 글씨’, ‘그 발자취’를 그 표석에 고이 지켜나가면, 

어느 먼 훗날에 그 누가 ‘안개낀 장충단공원’을 모르더라도, 

‘장충단공원 그 이름’ 만큼은 영원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기억과 망각의 갈림길에 외롭게 서있는 우리 중년들. 

그 ‘안개낀 장충단공원’만이 오늘도 변함없이 '가을길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덧글 ()

박형상  / 2013-11-06-13:29 삭제
ㅡ오래전에 썼던 글입니다.

ㅡ서울 중구민을 상대로 <중구문예>에 게재한 글입니다.



ㅡ송기병 친구의 <배호 찬가>에 덧붙여 올려봅니다.

ㅡ마침 <배호 기일>이기도 하고요....
송기병  / 2013-11-06-14:50 삭제
대단허이!

'배호사랑'과 더불어 전직 서울의 중심, 중구의 首長다운 '중구사랑'이 가득하구먼!

나머지 부분은 자네가 捲土重來 후 머잖아 이루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만,

배호! 오직 그만의 유일무이한 창법을 표현한 부분은 참으로 기가 막히네.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마치 온갖 시련을 다 겪은 중년이 토해내는 듯한,

'깊고 두터운 中低音', '절제된 흐느낌', '폐부로부터 올라오는 비장함' 이런 것들이

요즘 트롯한다는 아이들의 그 '경박스런 바이브레이션'과 어찌 비교를 하겠는가?

박변의 '기막힌 표현'에, 형님의 기일을 맞아, 다시한번 경의를 표하는 바이네. 대단허이!!
박형상  / 2013-11-06-17:33 삭제
《Re》송기병 님 ,

ㅡ읽어주어 감사하이,,그래도 질다는 소리 안해서 다행이네ㅎㅎ
조석현  / 2013-11-07-17:16 삭제
재미있으면 진 것이 짧아지네~~~

연번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파일
44 연재(8) (1) 박형상 2016/07/21 689  
43 연재(7) (0) 박형상 2016/07/21 573  
42 연재(6) (0) 박형상 2016/07/21 525  
41 연재(5) (0) 박형상 2016/07/21 517  
40 연재(4) (2) 박형상 2016/07/16 558  
39 연재(3) (0) 박형상 2016/07/16 555  
38 연재(2) (0) 박형상 2016/07/16 510  
37 친구들 의견을 구하면서 ㅡ 연재1, 천경자 미스터리 (1) 박형상 2016/07/16 518  
36    답변글[RE]Re..반갑네 (1) 박형상 2016/07/16 354  
35 ㅡ 의행(義行) 법사를 애도하며(2) (0) 박형상 2016/03/10 473  
34 ㅡ 朋友(붕우)와 友情(우정) (3) 박형상 2014/09/16 456  
33 ㅡ&lt;자산어보&gt;인가?&lt;현산어보&gt;인가? (20) 박형상 2014/08/20 834  
32 ㅡ정약용과 '寶林茶, 寶林寺' (22) 박형상 2014/07/21 946  
31 ㅡ퍼스트 터치, 퍼스트 키스 (11) 박형상 2014/07/14 430  
30 현재 보고 있는 게시글-10년전 글,안개낀 장충단 공원. (4) 박형상 2013/11/06 419  
29 ㅡ가을 바람 (18) 박형상 2013/10/07 509  

맨처음이전 5페이지123다음 5페이지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