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다는 것
이 비 그치면 가을은 어느새 오겠지. 일월의 운행은 어김없다. 사람도 예외일 리 없다. 아무리 물리쳐도 귀밑머리에 서리가 앉기 마련이다. 자라는 것이 순리이듯 이제 차차 나이듬도 자연스럽지 않은가?
청춘 그 자체가 아름다울 때가 있다. 푸르름 그 자체가 좋을 때. 그러나 마냥 푸르를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가을이 되어도 푸르른 과일은 그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과일이 익을 때는 노랗게 익어야 하지. 푸르스름 덜 익은 과일은 맛도 없거니와 외면만 당할 뿐이다. 제 때에 딱 그만큼이면 된다. 너무 빨리 익어도 너무 잘 안 익어도 꼴불견. 곧 자연과 순리를 따름 아니겠는가?
나이듬이 벼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나이가 들어서도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면 익지 않는 벼와 같지 않을까? 알이 속이 찬 사람일수록 겸손하다. 아무리 지위와 권세가 높고 부유할 지라도 겸손치 못한 이는 알이 차지 못한 사람이다.
낱알이 영글지 못한 벼는 고개를 빳빳이 하늘로 높이 쳐든다. 영이 영글지 못한 이는 하늘을 우습게 본다. 땅에서 아무리 잘난 다 뽐내도 추수 때면 농부의 낫을 피하지 못하리.
가을에 논을 가면 세가지 부류가 있다. 잘 익은 벼, 낱알이 영글지 못한 벼, 깜부기 먹이가 된 벼. 잘 익은 벼는 농부의 즐거운 밥상에 올라 새로운 차원(인간의 피와 살이 됨)으로 상승할 것이다. 하나 쭉정이는 베어져 논밭에 버려질 것이다. 그리고 거름이 되면 새 벼를 기다려 생명의 윤회를 하겠지. 마지막으로 깜부기는 불에 태워져 없애 버릴 것이다.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지
우리가 벼라면 하늘은 농부다.
과일이 익듯 익어가는 우리의 당도는 과연 얼마일까? 우리는 얼마나 곱게 익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영양소는 과연 얼마나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일까? 과일 하나가 열리고 자라서 익은 것이 과일 그 자체의 목적일 리 없다. 누군가 잘 먹어 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태어나 자라서 나이듬에도 우리 자체가 목적이 아닐 것이다. 우리를 만든 이가 있고 그 목적이 있지 않을까? 세상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은 분명 아니고 우리도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은 아니다. 단지 대부분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리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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