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 알려드립니다.
  • 본 사이트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준수합니다.
  • 회원은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내용과 타인의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및 기타 권리 를 침해하는 내용물에 대하여는 등록할 수 없으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주민번호, 휴대폰번호, 집주소, 혈액형, 직업 등의 게시나 등록을 금지합니다.
  • 만일 위와 같은 내용의 게시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게시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제목

정약용, 장다리꽃을 보던 시절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7/26 11:03 조회수: 313

ㅡ기왕에 마저 올립니다.

ㅡ강진 유배객 정약용의 장디리꽃과 나비에 관한 시절을 짐작해 본 글입니다.





ㅡ정약용과 '1807년,묵재 시절(2)'

-제자 '이청(이학래,1792~1861)'의 집에서 정약용은 1년 반 남짓 살았다.

겨울을 두번 넘겼다.



그간 '고성사 보은산장'에 머물던 큰 아들 정학연이 1806년 한식일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약용 역시 '보은산방'에서 동문 주막(동천여사)로 내려왔다.



1806년 가을에는 '이청(이학래)'의 집으로 옮겼다.

1808년 3월경에 다산초당으로 다시 옮겨갈 때까지 그 집에 있었다.



 이른바 묵재(墨齋) 시절이다.

이청(이학래)은 강진 아전의 아들이었다.

1807년을 정월 초하루를 정약용은 묵재에서 맞이하였다.



엉성한 울타리가 쳐진 초옥에 그 부근에 장다리밭이 꽤 넓게 있었다.

거기 한쪽을 치우고 정약용은 부지런히 대나무도 심었다.

공간을 아늑하게 감싸주는, 대 울타리(竹欄)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집에서 비로소 '전라도 보릿국'을 먹었다.

냉이처럼 맛있다고 했다.

1801년에 내려온 후 그간에는 '7년 惡食'이었다고 했다.



 1807년 3월에 '제자 황상'의 부친이 죽고 그 아들이 태어난다.

정약용은 그 만시를 쓴다.

그 무렵 스승은 약식 상례를 치루려는 제자에게 꽤 엄한 질책을 해댔다.

'황상'은 부득불 시묘살이에 들어간다.



 그 봄에 정약용도 오래 앓던 病을 이겨내고 일어났다.

'病起'라는 말이 거듭 등장한다.



장다리꽃 채화가 좋았다.

꽃을 찾아오는 나비를 보았다.



5월에 학연의 아들,장손 대림이 태어났다.

7월에 '조카 학초'의 부음을 듣는다.

그 충격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정약용은 '이청'의 집과 생활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안 남겼다.

침묵하였다.

'墨齋'가 '默齋'로 되고 말았다.



정약용과 이청의 사이가 나중에 틀어졌기 때문에 산삭된 것일까?

예컨대, <제자 이청에게 주는 증언> 같은 것도 없다.

 단 '이청'앞으로는 하나의 짧은 글이 있을 뿐이다.



 <금초 이청의 詩卷에 題함>



ㅡ 이금초(李琴招)가 나이 14세 때에 나와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는데, 

내가 우연히 운서(韻書)를 보게 되었다. 

시험삼아 한마디를 꺼내 묻기를,

“대(大)ㆍ양(羊)이 합하여 ‘달(羍)’ 자(字)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작은 염소라고 하는가?”

하니, 이금초가 즉시 그 소리에 응답하여,

“범(凡)ㆍ조(鳥)가 합하여 ‘봉(鳳)’ 자가 되었기 때문에 신조(神鳥)라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의 총명이 이와 같았다. 

그의 시는 굳건한 기상이 조금 부족하지만, 

세월을 두고 더 연마한다면 아마 손색이 없이 진취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사정을 추측해본다.



정약용이 '묵재'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은 혹 질병 때문은 아닐까?

동문매반가, 주막집의 조악한 환경 속에서 살다가 옴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옴은 전염성 질환이다.

그래서 읍내에서 떨어진 어촌 쪽으로 급히 격리된 것 아닐까?



제자 이청 역시 '묵재'에서 배운 흔적이 없고, 고성사에 계속 머무르며 공부를 하였다.

결국 1807년 봄에 자주 나오는 '病起'는 '옴에서 치유되었다'는 뜻 아닐까?



정약용도 그 봄에 쓴 시에서 '고질적으로 앓고있는 옴'을 거론했었다. 

"내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옴이 근래에는 더욱 심해 손수 神異고(膏)를 만들어 바르고는 나았다"



 그리고 '묵재'의 위치는 바닷가 적두, 어촌에 있었던 것 아닐까?

(혹 이청의 집은 읍내 쪽과 바닷가 쪽 두 곳에 있었던 것 아닐까?) 



 1807년경 시에서 '묵재'의 장소적 특징을 잡아볼 수 있다.

그 묵재 시절의 詩는 꽤 남아 있다.

그 기간의 저서는 <예전喪具訂>이 있다.



'석교'를 건너게되고 '운계'가 흘러가는 곳,

('적두' 부근의 '운계'도 추상적 미칭이 아니라 구체적 고유명사로 보여진다.

백련사에 놀러갈 때 역시 '운계'를 건너가고 있기 때문이다)

'적두'의 조수를 구경할 수 있는 곳,

막걸리를 마시는 주막 목로집이 있는 곳,

밀물이 들어오면 푸른 평야처럼 변하는 곳,

"혜장이 오다"에서 나오는,'沙繞野堂深'에 해당하는 장소,

배가 출발하는 남포 항구와 가까운 곳,

차가운 조수가 턱 밑에 차올라오는 해변가,

그래서 '바닷가 마을, 탐진포'라는 직접적 표현이 가능했던 아닐까?.



묵재 시절에 관련하여 몇 사정이 포착된다.

주변 주민들과 가장 가깝게 접촉한 시기이다.

인사를 나누는 이웃집 영감도 생겼다.

'묵재'를 베이스 캠프로 삼아 '적두 주막, 백련사, 남포'등으로 돌아 다녔다.



특기할 만한 별다른 저서 작업은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방문객,친지들이 찾아왔다.

'혜장,규전(정수칠?),윤규렴,윤공윤'..등이 찾아왔다.



 묵재(墨齋) 시절,

'窮居'라고 했다.

"오갈이 든 窮居 신세 날 찾는 자 다 싫은데 / 窮居畏約厭人過"



병을 앓던 처지에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어떤 이의 수발을 받지 않았을까?

거기에서 장다리꽃에 나비가 찾아오듯 어떤 사랑의 인연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집 밭의 '장다리꽃, 菜花'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그 때부터 정약용은 '장다리꽃과 나비'의 사연을 꿈꾸었던 것일까?



바닷가 마을에 툭 터져 있고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는 공간이었다.

책을 보고 사색을 하는데에 여러모로 부적절햇다.

마음도 이래저래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808년 3월경에 다산초당, 숲속 조용한 곳으로 다시 옮겨간다.

이제 강진 다산 초당 시절이 시작된다.



 



 ㅡ월출산 정상에 올라서....1806년 8월17일

[登 月出山 絶頂] 8월17일



 높다란 뿔 하나가 창공에 꽂혀 있어 / 岧嶢一角揷晴空

남쪽 나라 진압하는 그 기세 당당하네 / 平鎭南邦石勢雄

두힐로 봉했던 곳 청해 안이 거기더냐 / 豆肹提封淸海內

탁라의 성곽들은 저녁 연기 속이어라 / 乇羅城郭暮煙中

골짝에선 孫登의 휘파람소리 절로 나고 / 巖阿自發孫登嘯

阮籍의 막다른 길 걱정한 자 누구던가 / 天地誰憂阮籍窮

昌德宮 지붕 꼭대기 어디가 기라더냐 / 昌德觚稜何處是

서기 어린 붉은 구름 赤裳山이 막고 있네 / 赤裳遮斷瑞雲紅

 

[두힐(豆肹) :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회진폐현(會津廢縣)의 백제(百濟) 시대 이름. 《新增東國輿地勝覽》

[탁라(乇羅) : 제주(濟州)의 옛 이름.



 

ㅡ'혜장'이 오다

[惠藏 至] ㅡ정묘년(1807) 봄 강진에 있을 때임



 굳건하고 어질고 호탕한 사람 / 矯矯賢豪志

때로는 표연히 산을 내려온다네 / 飄然時出林

눈 녹아 비탈길은 미끄럽고 / 雪消厓徑滑

모래 둘러싸여 들집이 움푹하네 / 沙繞野堂深

얼굴에는 山中의 즐거움 가득하고 / 滿面山中樂

세월 따라 변하는 몸 마음 안 쓴다네 / 安身歲暮心

말세 인심 대개가 비루하고 야박한데 / 末流多鄙薄

지금 이렇게 진실 솔직한 자도 있다네 / 眞率見如今





ㅡ장다리 꽃에 나비를 읊다....1807년 봄

[賦得 菜花蛺蝶]



사랑채 아래 세 두둑 밭의 장다리 / 舍下三畦菜

성긴 울타리 나무 옆에 피어났네 / 疎籬傍樹開

꽃은 보면 가만히 있으려 하건만 / 且看花欲靜

누가 부추겨 나비를 오게 했는지 / 誰起蝶先來

病든 날개는 꽁꽁 얼어붙었어도 / 病翅猶全凍

꽃 탐하는 마음은 그래도 동하나봐 / 芳心獨未灰

봄바람은 신의가 대단해서 / 春風大有信

언제든지 너희와 함께 돌아온단다 / 每與爾同回





ㅡ비를 대하여 '逵典'에게 보이다....1807년 봄

[對雨 示 逵典] 정수칠(丁修七)이다



올 때는 반곡길로 왔는데 / 盤谷來時路

구름 시냇가 백 리나 머네그려 / 雲溪百里遙

우연히 오월달 비를 만나 / 偶逢梅子雨

여기 있으며 荻頭의 조수 구경하네 / 留賞荻頭潮

골 깊어 꽃이 길에 널려 있고 / 巷僻花鋪徑

봄 무르익어 풀은 다리를 덮었네 / 春深草沒橋

막걸리가 비록 값 없는 술이로되 / 濁醪雖薄惡

情이 중하니 맛도 먹음직하리 / 情重味應饒

                                   ㅡ강진 고을 성문 밖에 적두(荻頭)라는 마을이 있는데 港口에 위치하고 있다





ㅡ'손암'에게 받들어 올리다......1807년 봄

[奉簡 巽菴] 소자유(蘇子由)ㆍ소자첨(蘇子瞻)이 서로 주고받고 했던 여러 시의 운에 차한 것임



ㅡ제4수

장다리꽃 정원에 먼지라곤 하나 없어 / 菜花庭院一塵空

病을 털고 일어나 옛 도서를 다시 들추네 / 病起圖書續舊功

꾀꼬리가 오지 않아 봄은 그저 적적하고 / 黃鳥不來春寂寂

녹음이 점점 짙어 대낮인데 침침하네 / 綠陰初漲晝濛濛

옷은 남아 釆石江 배 안의 비단인데 / 衣餘釆石舟中錦

밥은 없어 東坡의 지붕 위 구리라네 / 飯乏東坡屋上銅

沙尾로 집을 옮겨 살 수만 있다면야 / 但得移家沙尾住

파도라도 갈 길 없다고 울지는 않으련만 / 溟波誰復泣途窮 



.............중형이 그때 사미촌(沙尾村)에 살유배살이를 하고 있었음







 ㅡ蘇東坡의 과령시에 화답하다......1807년 봄

[和 東坡 過嶺韻]



귀양살이 7년 惡食으로 살았기에 / 囚居惡食七年堪

보릿잎 국이라도 냉이처럼 맛있다네 / 麥葉羹來已薺甘

타관異縣의 生涯, 硯北에 의지하는데 / 異縣生涯依硯北

중국 위도로는 여기가 바로 淮南이지 / 中原緯度直淮南

                     ㅡ유자가 강진(康津) 땅만 벗어나면 탱자가 되어버림

백자술을 새로 빚어 風濕을 제거하고 / 新醅白刺除風濕

黃連을 잘못 먹으며 장독瘴嵐을 막으려 했네/ 謬服黃連禦瘴嵐

                    ㅡ백자(白刺)는 오가피(五加皮)이다 

病들었다 일어나서 그 회포를 뉘게 말하랴 / 病起幽懷無處說

문 앞길에 장다리꽃 휘늘어지게 피어 있네 / 菜花門徑落毿毿





 

ㅡ'유합쇄병'을 부쳐온 운에 화답하다......1807년 봄

[和寄 餾合刷甁韻] 내가 앓고 있는 고질적인 옴이 근래에는 더욱 심해 

손수 신이고(神異膏)를 만들어 바르고는 나았으므로 

이를 자산(玆山)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이놈의 옴(癬疥) 근질근질 늙도록 낫지 않아 / 癬疥淫淫抵老頹

몸뚱이를 茶 볶듯이 찌고 쬐고 다 했다네 / 身如茶荈備蒸焙

데운 물에 소금을 타 고름도 씻어내고 / 溫湯淡鹵從淋洗

썩은 풀 묵은 뿌리 뜸 안 뜬 것이 없다네 / 腐草陳根莫炙煨

벌집을 배게 걸러 거기에서 즙을 짜고 / 密濾蜂房須取汁

뱀허물을 재가 안 되게 살짝만 볶은 다음 / 輕熬蛇殼恐成灰

丹砂 넣어 만든 약을 同病상련 마음으로 / 丹砂已熟憐同病

玆山의 심부름꾼 오기만 두고서 기다린다네 / 留待玆山使者來





 

ㅡ4월3일 백련사에서 놀다......1807년 4월3일

[四月三日 游 白蓮社]



病 앓고 일어나 가볍게 입고 새벽놀 헤치면서 / 病起輕衫拂曙霞

말을 타고 모래밭 가 어부 집을 지나가네 / 沙邊騎馬過漁家

밀물 때라 평야에도 잔물결이 일고 있고 / 潮來野有漣漪水

봄은 갔어도 산에 아직 때 늦은 꽃이 있네 / 春去山留晼晩花

폐물이라 남이 다 버려도 달게 여긴 지 오래 / 頹廢久甘人共棄

淸狂만은 세상에다 내놓고 자랑이라네 / 淸狂敢與世相誇

구름 시내 한 굽이를 간신히 지나치고 / 雲溪一曲崎嶇度

지팡이 짚고 누대 오르니 해 기울기 전이로세 / 杖策登樓日未斜





ㅡ담박(淡泊).....1807년 4월3일~4월15일



淡泊을 좋게 여기니 아무런 일도 없어 / 淡泊爲歡一事無

타향살이도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다네 / 異鄕生理未全孤

客이 오면 꽃 아래서 詩卷을 들고 보고 / 客來花下攜詩卷

僧 떠난 침상가엔 念珠가 떨어져 있지 / 僧去牀間落念珠

장다리밭 한낮이면 벌들이 들끓고 / 菜莢日高蜂正沸

麥芒風 따스하면 꿩들이 서로 부르지 / 麥芒風煖雉相呼

다리 위에서 우연히 이웃에 사는 영감 만나 / 偶然橋上逢隣叟

조각배 함께 타고 술을 실컷 기울이기로 했네 / 約共扁舟倒百壺



 



ㅡ'금호 윤규렴'이 왔다......1807년 4월15일 이전

[琴湖 尹奎濂 至]



오갈이 든 窮居 신세 날 찾는 자 다 싫은데 / 窮居畏約厭人過

눈물바람으로 서로 보니 그대가 웬일인가 / 沾灑相看奈爾何

다정한 벗 말로에 와 흙 버리듯 다 버렸는데 / 末路交歡如棄土

대를 이은 故家 文采 그 여파는 있네그려 / 故家文采見餘波

세 번 쫓겨난 展季가 슬퍼했단 말 못 들었고 / 不聞展季悲三黜

九歌를 지어 부른 靈均을 꽤 배웠다네 / 頗學靈均作九歌

어찌하면 숲 속에다 이웃 가까이 집을 짓고 / 安得園林卜隣近

남은 생애를 우리 몽땅 함께 지내며 보내볼까 / 盡將餘景共婆娑

 



[세 번 쫓겨난 전계 : 魯의 大夫 유하혜(柳下惠)가 士師로서 세 번씩이나 물리침을 당하고서도 노 나라를 떠나지 않았음. 

그는 자(字)가 계(季)이고 이름은 획(獲)이다. 《荀子 成相》

[구가를 …… 영균 : 초(楚)의 굴원(屈原)이 내쫓김을 당한 뒤 동황태일(東皇太一)ㆍ운중군(雲中君)ㆍ상부인(湘夫人) 등 구변의 노래를 지어 불렀음. 영균(靈均)은 굴원의 자(字)임. 《楚辭 九歌》



 

 ㅡ'아우 윤금호'가 비에 막혀 있는 것이 좋아서....1807년 4월15일 이전

[喜 尹弟滯雨]



客을 잡아둘 방법이 없더니만 / 無謀留客住

내 뜻대로 부슬부슬 비가 내리네 / 如意雨霏霏

슬쩍 스치니 뽕나무꽃 떨어지고 / 細撲桑花落

가볍게 젖어 장다리는 살찌겠네 / 輕沾菜莢肥

나막신이 빠지도록 땅이 질어 다행이고 / 深泥欣沒屐

옷이 젖을 만큼 빗방울 날려 잘됐네 / 飛沫喜侵衣

언젠가 호수 위 하늘이 푸르거든 / 直待湖天碧

네가 가도록 그때는 놔두련다 / 纔須放汝歸



 

ㅡ南浦行. 次 杜韻하다.......1807년 4월15일

[南浦行 次 杜韻] ㅡ정묘년(1807) 4월 보름날 고을 사람 몇이서 

날 데리고 구십포(九十浦)로 가 배를 띄우고 놀다가 

늦게야 월고포(越姑浦)에다 배를 대고 달빛을 이고서 돌아왔음 

 

康津 野老들도 진기한 걸 좋아하여 / 康津野老能好奇

포구도 호수처럼 물이 맑다 말을 하네 / 爲言浦水如湖陂

밀물이 앞에 차면 天地가 광활하고 / 潮來滿前天地闊

靑玻璃 물결이 미풍 앞에 부서지는데 / 微風破碎靑玻璃

키를 틀고 물결을 쳐가며 興 따라 들어가서 / 捩舵撇漩乘興入

한 잔씩 지레 돌리며 작은 모임 가졌다네 / 徑行一盞成小集

입이 있어 마실 수 있고 말도 할 수 있지마는 / 有口可飮又可談

文人學士야 어떻게 따라나 갈 것인가 / 文人學士嗟何及

금사산 석름봉이 마주보고 열려 있고 / 金砂石廩相對開

궂은비는 말끔히 개어 먼지 하나 없는데 / 宿雨淨洗無纖埃

石靑과 푸른 고목은 번갈아서 숨바꼭질하고 / 石靑空翠遞隱現

달리는 듯 나는 듯 奔陗飛峯, 배를 따라 오락가락 / 奔陗飛峯去復來

서쪽을 바라보니 험악한 사미 마을 / 沙尾西望險莫測

넘치는 눈물을 혼자 자꾸 닦았다네 / 涕泗汎濫翻自拭

날던 새가 힘이 빠져 中流에 떨어졌는데 / 力盡征鳥墮中流

울퉁불퉁 그려진 墨石 언제나 검을 뿐이지 / 嶙峋墨石終古黑

悲歌 부르며 손뼉 치다 앞산을 보았더니 / 悲歌拊節見前山

어두컴컴 그 사이에 쓸쓸한 절이 있고 / 蕭蕭寺閣空濛間

뒤를 따르던 거룻배는 그물 걷어 돌아가는데 / 艓子相隨捲網去

漁村에 해는 지고 문도 이미 닫혔다네 / 漁村落日門已關

二更에 달이 뜨고 진주 같은 별 보이니 / 二更月出星迸珠

큰 고기는 풀쩍풀쩍 뒤따르는 새끼떼들 / 大魚奮躍群趨鮞

주흥은 도도하고 안주는 동이 나고 / 酒闌鱠殘情未已

포구에 물풀들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 浦秀渚芽痕有無

삐걱삐걱 노젓는 소리 어둠이 깔리는데 / 櫓聲伊軋暝色至

조용히 울리는 음향이 마음에 와 닿네그려 / 靜響柔婉愜心意

즐거움이 다하면 슬퍼짐을 어이하리 / 哀樂相生可奈何

예부터 부평초 신세 나 같은 이 많았느니 / 古來萍梗如我多





ㅡ대를 심고.........1807년 5월1일

[種竹] 5월 1일

 

새 삶터 꽤 맘에 들게 / 新居頗愜意

草樹 둘러 있어 푸르르네 / 草樹繞芳綠

하나 안 된 것은 담장 안에 / 所嗟堵牆內

一枝竹도 전혀 없는 것이었네 / 仍少一枝竹

남새밭을 몇 발쯤 떼내어 / 蔬圃割數丈

터가 줄어든 것 아예 걱정도 않고 / 未暇憂地蹙

물 주고 북 주고도 손수 해야지 / 澆壅手自劬

객지에 심부름할 동자도 없으니 / 旅琑無僮僕

쓸쓸하게 서너너덧 그루지만 / 蕭蕭三四枝

마음과 눈 맑히기에 족하다네 / 已足淸心目

이렇게 아마 몇 해가 가고 나면 / 庶幾年歲久

寒玉대나무가 눈 앞에 가득 보이리 / 滿眼見寒玉

부슬부슬 하룻밤 내린 비에 / 霏霏一夜雨

新筍이 대여섯 개나 돋았으니 / 新筍擢五六

두고두고 보자던 본뜻과는 달리 / 本意持遠圖

효과가 그렇게 빠를 줄이야 / 食効乃爾速

잘 가꾸어 藩蔽울타리가 되도록 / 愛護作藩蔽

茸鹿 버섯 키우듯이 키워야겠네 / 情如養茸鹿

이웃에선 날 어리석다 비웃으며 / 隣人笑余愚

산골짝 천지가 왕대라고 하네 / 篔簹滿山谷





 

ㅡ小雨에 국화를 대하여. '공윤'에게 보이다......1807년 가을,

[小雨 對菊花 示 公潤] 공윤은 윤종하(尹鍾河)임



곱고 예쁜 국화 빛깔은 / 娟妙黃花色

죽란舍 그 시절과 변함 없으리 / 依然似竹欄

衣冠은 이미 옛모습이 아니고 / 衣冠非舊日

비바람 속에서 제각각 늙었구나 / 風雨各衰顔

가교 만들어 습기에서 지탱시키고 / 修架支殘濕

울을 더 막아 추위 견디게 해야지 / 添籬護薄寒

가까이 이웃해 사는 것만 같으랴 / 何當卜隣近

남고 소고, 二皐 사이에서 늙어가리오 / 投老二皐間



쓸쓸한 두어 그루 대나무와 / 飄蕭數枝竹

서로 어울려 맑은 가을을 느끼네 / 相伴作淸秋

시들은 덩굴, 城眼에 드리워지고 / 敗蔓垂城眼

차가운 조수, 나무 위까지 올라오네 / 寒潮上樹頭

외진 땅에서 무슨 장래 설계를 하랴 / 地偏無遠策

재주가 적어 愁心 역시 적다네 / 才薄少閒愁

그 전날 은자의 巖棲處 / 疇昔巖棲處

지금 와서 왜 그리 멀어졌을까 / 如今路阻脩

덧글 ()

박형상  / 2013-07-26-11:11 삭제
또 길어진 글이지만 앞 부분만 대충 읽으셔도 무방할 듯..



정약용의 인생을 소테마 별로 나누어서 <연대별 씨리즈>로 계속 써보고 있는 중입니다.
송기병  / 2013-07-26-12:14 삭제
ㅋ ㅋ 넘 질당께는...
조석현  / 2013-07-26-13:48 삭제
질리지 않을 묘책이 있을까?

줄이고 줄이는 게 시라면



주제를 살리는 데 필요한 건 부각시키고

시 전문보다 과감히 싹뚝싹뚝...가위질해

요점만 남기고 감동만 전하는 거~



잘은 모르지만 다산 자신이 너무 길게 시를 쓴 거 아닌가?

너무 지성이 감성을 넘어서

자꾸 길어진 거 아닌가?



줄이고 줄여

한!
박형상  / 2013-07-26-14:34 삭제
ㅡ아..... 실제 우리 홈피 일반 독자들은 앞 부분만 읽고 ..뒷쪽 시 자료 부분은 제목만 대충 읽어도 무방...

 그렇게 독해를 하여도 무방하다는 의도로 앞뒤 부분을 구분하여 써놓은 글들...



ㅡ그리고 정약용은 실제로 <단형 절구 율시>를 상대적으로 잘 쓰지 않았지.

 대부분 <장형 고시> 또는 <장편시, 연작시...>....

심지어는 단형 정형시의 형식적 제약요건에 나름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고...
박형상  / 2013-07-26-14:41 삭제
ㅡ 지금 내가 시도하려는 작업은..



ㅡ몇 명제에 따라 수행하고 있는 것.

정약용이 남긴 시 2500여수는 그의 일기이다..

마치 이순신의 난중일기처럼 연대적 기록물에 해당한다..

그러니 정약용 평전을 구성함에 있어  시 2000여수를 필히 반영해야 한다.

정약용 연보에 나오는 몇  사건만을 단순 나열하는 식으로는 인간 정약용을 이해할 수 없다.

시에 제시된 <시점, 장소,상황>요건에 따른 콘텍스트 맥락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도적 목적과 차원에서 특정 시공간 상황에 결부된 관련시들을 디비 차원에서 수집 정리하고 있는 중. 

.....여기에 간간히 올려보는 글은 그 일부 초안에 해당합니다. 

일부 독자들의 지적과 조언에도 경청할 겸....



...나중에는 편집 전문가가 싹둑 가위질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초안 글입니다.
조석현  / 2013-07-26-15:10 삭제
요는 수용 대중성의 문제까지....

이왕 나오면 많은 사람이 재미까지 느끼고

한마디로 인구에 회자되는 대박을 바라다 보니

노파심들이 많나 보네



너무 어렵고 기니

나를 포함 현 세대들이 얼마나 진득하게 볼까?

하는 노파심........



재미있게 한다는 것

참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아



맛있어야 몸에 좋은 음식도 먹을테니
박형상  / 2013-07-26-21:40 삭제
ㅡㅎㅎ..

설령 잘 쓴다고  가정해도......대중용 배스터셀러는 전혀 불가할 일...



..단지 ..정약용에 관한 소수 매니아층을 위한 자료집.......

..기존의<사암선생 연보>와 병존할 수 있는 <연대별  자료집> 정도?...



........그것도 과연 잘 될까?...의구심이지만.......

..홈런이 아니라 1루 베이스 진루 정도?를 꿈꾸어본다네.....

...........많은 지적 조언바라네.....
나웅인  / 2013-07-27-09:56 삭제
참 대단허이.

그런데 내 짧은 소견으로는

연대별로 그 당시 다산의 소회를 나타내는 대표시들을 몇몇은 전문 소개하고

비슷한 것들은 일부 좋은 귀절이나 의미를 대표하는 싯구만

소개하며 종합하여 설명하고

그 시들의 전문은 주석이나 별책 형식으로 따로 실어 

그 싯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찾아보고 전문을 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네만.

워낙 내 가진것이 없어서 .....

그냥 생각 나는대로 적어 봤네.
조석현  / 2013-07-27-11:34 삭제
《Re》나웅인 님 ,

좋은 생각이라 생각되네 2분하는 것이

일반인 전번, 주석이나 별책은 더 공부하고 싶은 전문가용



실제 전문을 앞에 배치하면

길어져서 핵심이 자꾸 흐려지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하품을 하지



그리고 한자어가 섞인 글의 편찬 원칙이 꼭 필요~~

나는 보통 그렇게 하네

무조건 한자 자체만을 쓰고 않고(한자를 모르는 사람 배려)

- 이 홈피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바로 한자말을 쓰기도 했네만~



"한자(漢字)" 이렇게 한자는 괄호에 넣고



음이 다르나 한자말이 필요할 땐 [   ]으로 표시하여 음이 같은

(    )과 구분( 예 :  띳집[茅屋] )



글을 읽거나 이해하는데 바로 필요한 간단한 것은

각주처리하고(이를 미주처리하면 바로 짜증)

아주 길거나 전문적인 것은 미주 처리



그리고 시의 원문인 어떤 형태는 나타내어

독자가 원문까지 참조하도록~~~



사족(蛇足)이었네~~~~~~~~~
박형상  / 2013-07-28-15:35 삭제
,쌩유 ,,고맙네들..지금서야 장흥에 다녀와 집에 들어왓네...



ㅡ여기 올리는 것들은 1차 기초 작업이네..

다음에 정밀 책으로 출판할 것 같으면 

두 분이 거혼하는 편집 작업을 필히 거치게 될 일이고 

실제로 그 부분 일에 관한 가위질 전문가들이 따로 있다네..



ㅡ그런데 나로선 <정약용 2500수 시>를 가칭 <정용 일기>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므로,

 그의 시들을 하나 하나 아나롤그적으로 날짜 순서로 배치해보며 

한시의 배경으로서 시간과 공간, 상황에 관한 재확인 작업을 일일히 하고 있다네.. 



 그런 상태에서  여기 올려본 글이라서 기실 그 초고에 불과하다네.



ㅡ그간에 정약용 시들을 연대기적으로 배치하는 작업을 한 선행 학자도 있긴 있었지만  

그 주장논지와 시 내용을 매치시키는 방법으로  <시간>은 물물이고 

<공간, 상황>에 관한 사정을 일일히 확인한 경우는 없었고 ...아마 내가 처음일 것 같아..



ㅡ 그래서 그렇게 일일히 매치 확인하다보니 

..지루하고 길어지고 있지만....... 어차피 한번은 필히 거쳐가야 할 작업..같아.



ㅡ또 그 학자분의 주장에 내가 반론을 제기하는 개별적 사례가 꽤 되므로 

그런 사정에  관련된 시 자료를 한곳에 모아두어야만 할 형편.....





ㅡ결국...위와같은 의도를 살린  전체적인 작업을 먼저 끝낸 다음에 

.....여러분들이 조언해주는 ...정서,퇴고,보완,수정, 윤색,.. 과 더불어 

..기능적인 단문으로 만들어내는 <가위질 편집> 작업을 하려는 것.



ㅡ다른 한편, " 다 익지도 아니한 감을 함부로 올린다"는 비판을 할 수 있겠으나..

이번 <장다리밭 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 현지와의 주고받음을 통해서



,...1807경 정약용의 주거 조건을 구체적으로 더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된 것

ㅡ지금 까지의 학설은 ..

1807년경 정약용이 거주한 이청의 집, 즉 묵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는 실정..

그런데 1807년경의 시공간 상황에 관한 시를 일일히 배치 확인해보면서,

 내가 추정하는 그때의 주거 장소를 입론해 보앗던 것.. ....



..그런데.....거기에 다시,..... 주변에서 제기하는 의문이나 지적들...

예컨대  현지와의 주고 받음을 통해 추가적으로 드러나게되는 사정을 보태보게되고

나로서는 여기 올린 초고를 다시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네....



.
박형상  / 2013-07-28-15:48 삭제
ㅡ아, 그리고 한자 병기의 필요성은 당연한 것이지만..

.....아직 초고 수준에다가.. .....한글 오타마저 많은 터에.............

...한자 병기. 한글 병기는 정말 꽤 시간이 걸리는 일..ㅎㅎ 



 ............미안합니다
조석현  / 2013-07-31-10:53 삭제
책을 펴는 일이 보기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

보면 볼수록 수정사항이 나오고 

오탈자도 자신의 눈은 가려져 안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

전문 교열자로 필요할 정도 아니겠는가?



글로 남는다는 것이 정말 신중이 요구되는 일

논란과 공격꺼리도 될 수 있고



그나저나 책 출간이 기대되네....

연번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파일
28 ㅡ어떤 마지막 선택 (15) 박형상 2013/09/23 486  
27 현재 보고 있는 게시글정약용, 장다리꽃을 보던 시절 (12) 박형상 2013/07/26 313  
26 정약용과 '장다리꽃,채화' (31) 박형상 2013/07/15 328  
25 정약용-몽우일매-꿈속의 여인 (13) 박형상 2013/07/11 331  
24 ㅡ정약용과 '良友樂(1)' (14) 박형상 2013/04/15 325  
23 ㅡ정약용과 '약초(1)' (2) 박형상 2013/03/31 280  
22 ㅡ정약용과 '약초(2)' (0) 박형상 2013/03/31 283  
21 ㅡ정약용과 술(2) (11) 박형상 2013/03/27 363  
20 Re..ㅡ정약용과 술 (8) 박형상 2013/03/16 322  
19 ㅡ정약용과 '부추' (6) 박형상 2013/03/09 342  
18 정약용과 '처녀풍,소금비' (8) 박형상 2013/01/20 326  
17 창녕조씨,장흥조씨ㅡ조정통? (7) 박형상 2013/01/10 357  
16 창녕 조씨에 관한 어떤 한시? (5) 박형상 2013/01/10 309  
15 창녕 조씨 조석중 (7) 박형상 2013/01/10 323  
14 ㅡ그간에 모아둔 배호 詩 (7) 박형상 2012/12/16 375  
13 -정약용, 詩 '치교에게 보내다' (4) 박형상 2012/11/01 311  

맨처음이전 5페이지123다음 5페이지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