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지난해 11,26자로 써둔 글인데,
이번에 현지의 댓글에 답변도 드리면서 한번 올려봅니다.
ㅡ정약용과 '장다리 꽃, 채화'
-정약용의 시문에 '채화(菜花)'가 수차 나온다.
'채화호접(菜花蝴蝶)','채화정(菜花亭)'이 나온다.
그 '채화(菜花)'를 두고 '채소꽃 일반'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나물꽃,채소꽃'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그렇게 옮기는 편이 정확할련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적 분위기를 살려,남쪽 강진 땅의 菜花에 관한 한,
'장다리 꽃'으로 받아들이고싶다.
한국고전번역원 번역도 그러하다.
유채꽃 비슷한 모양의 노오란 봄꽃이다.
油菜花도 菜花 아닌가싶다.
정약용은 남쪽 땅에서 '유채화'를 보지 못했던 것일까?
'유채화'란 말은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배추 장다리', 그 긴 줄기 끝에 맺히는 노란 꽃들,
거기 장다리 꽃에 매달리듯 찾아드는 '노랑나비'.
서로들 잘 어울린다.
(아마 그 밑 둥지에서 겨울을 보낸 배추벌레가 노랑나비,흰나비가 되었을지 모른다)
정약용은 강진에 오기 전에도 물론 그런 '채화꽃'을 몇 번 보았었다.
또한 1차 유배지 경상도 장기 땅에서도 마주하긴 했었다.
낯설지 않은 꽃이었다.
1807년 봄,
남녘 강진 땅,
유배지에 흐드러지게 핀 '장다리 꽃밭'이 유달리 인상깊었다.
그 해 봄에 정약용은 묵은 病을 털고 모처럼 일어났다.
바깥을 내다보니,'장다리 꽃'이 그 울타리 안에 있었다.
그 꽃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어도
따쓰한 봄바람을 타고 '나비'가 훨훨 날아들었다.
그 해 봄,
정약용은 그렇게 '나비'를 끌어온 '장다리꽃'이 등장하는 詩를 연거푸 짓는다.
흑산도 손암 형님에게도 '장다리꽃 정원'을 말하며 시를 보낸다.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는 꽃,
노오란 '장다리꽃'은 봄의 전령사이다.
'장다리 꽃밭'을 제 집처럼 찾아드는 '노랑 나비'도 봄의 전령사이다.
매년 어김없이 피어나며 '나비'를 오게하는 꽃,
'강진의 장다리 봄꽃'에서
유배객 정약용은 '인생의 희망'을 감지했을지 모른다.
그런 봄에 '꽃'과 '나비'의 한짝 어울림을 보았다.
'채화호접(菜花蝴蝶)'이라야 역시 적격이다.
정약용은 해배 후 고향에서 '채화정(菜花亭)'을 짓는다.
아마, '채화'를 알아주고 찾아오는 '나비'를 기다리는 심정이었을 것.
실용주의자 정약용이기에 채소 조달이란 현실적 목적도 있었을 것.
"장다리꽃, 온갖 百菜가 여기 다 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로 날아오라"
다시 세월은 흐르고,
고향 초천에서도 '장다리 꽃'은 신의있게 피고지고,
그러나, 해배 후 18년이 지나도록
정약용이 기다리던 '그 나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유배 18년을 지내고 돌아온 정약용,
고향에서 18년을 다시 보내고 죽었다.
이하, 菜花를 언급한 정약용의 시를 한데 모아본다.
ㅡ족부 '해좌옹'의 산중 집에 유숙하면서 짓다
[留題 族父 海左翁 山居]
ㅡ제3수
울창한 저 山色은 해맑기 그지없고 / 蓊蓊山色澹新晴
졸졸졸 시냇물소리 은은하게 들리는데 / 㶁㶁溪流細有聲
수양버들 그늘 아래 편하게 소 누웠고 / 楊柳陰濃牛臥穩
'채화꽃' 따스한 바람 경쾌하게 나는 제비 / 菜花風暖燕飛輕
이따금 筆墨으로 심원한 회포를 풀고 / 時從筆墨幽懷暢
날마다 田園 거닐며 고상한 흥취 즐기네 / 日涉田園雅趣成
이리저리 거니는 게 너무도 좋은 유람 / 正耐逍遙陪勝賞
서글프게 돌아갈 길 행여 묻지 말았으면 / 可堪惆愴問歸程
ㅡ기성잡시(鬐城雜詩) 27수
ㅡ제25수
날 따뜻해 작은 밭에 '채화꽃' 활짝 피니 / 小園風暖菜花開
노랑나비 퍼렁벌레 번갈아 드나든다 / 黃蝶靑蟲遞去來
저걸 보면 莊生이 物化를 알았나봐 / 證得莊生知物化
竹杖 짚고 느릿느릿 거닐면서 서성대네 / 徐携竹杖悄徘徊
ㅡ장다리 꽃에 나비를 읊다.......1807년 봄, 강진 묵재
[賦得 菜花 蛺蝶]
사랑채 아래 세 두둑 '장다리밭' / 舍下三畦菜
나무 의지해 울을 대충 쳐놨는데 / 疎籬傍樹開
보면 꽃은 가만히 있으려 하건만 / 且看花欲靜
누가 부추겨 나비를 오게 했는지 / 誰起蝶先來
病든 날개는 꽁꽁 얼어붙었어도 / 病翅猶全凍
꽃 탐하는 마음은 그래도 안 식었나봐 / 芳心獨未灰
봄바람은 신의가 대단해서 / 春風大有信
언제든지 너희와 함께 돌아온단다 / 每與爾同回
ㅡ'손암(작은형 정약전)'에게 받들어 올리다.........1807년 봄, 강진
[奉簡 巽菴]
ㅡ소자유(蘇子由)ㆍ소자첨(蘇子瞻)이 서로 주고받고 했던 여러 시의 운에 차한 것임
ㅡ제10수
'장다리꽃' 庭院에 먼지라곤 하나 없어 / 菜花庭院一塵空
病을 털고 일어나 옛 圖書를 다시 들추네 / 病起圖書續舊功
꾀꼬리가 오지 않아 봄은 그저 적적하고 / 黃鳥不來春寂寂
綠陰이 점점 짙어 대낮인데 침침하네 / 綠陰初漲晝濛濛
ㅡ'소동파의 과령시'에 화답하다.........1807년 봄, 강진
[和 東坡 過嶺韻]
귀양살이 7년을 惡食으로 살았기에 / 囚居惡食七年堪
보릿잎 국이라도 냉이처럼 맛있다네 / 麥葉羹來已薺甘
타관에 와 살면서 있는 곳이 연북인데 / 異縣生涯依硯北
중국의 위도로는 여기가 바로 회남이지 / 中原緯度直淮南
ㅡ유자가 강진(康津) 땅만 벗어나면 탱자가 되어버림
백자술을 새로 빚어 風濕을 제거하고 / 新醅白刺除風濕
黃連을 잘못 먹으며 장독을 막으려 했네 / 謬服黃連禦瘴嵐
ㅡ백자(白刺)는 오가피(五加皮)이다
病 들었다 일어나서 그 幽懷를 누구에게 말하랴 / 病起幽懷無處說
문 앞 길에 '장다리꽃'만 휘늘어지게 피어 있네 / 菜花門徑落毿毿
ㅡ'채화정'을 새로 지었는데 권좌형이 마침 왔으므로, .........1821년5월5일,단오, 고향에서
소동파의 詩에 차운하여 애오라지 노필을 시험하는 바이다
[菜花亭 新成 權左衡適至 次韻 東坡 聊試老筆]
'채화꽃'의 나비가 봄바람을 즐기는지라 / 菜花蝴蝶嬉春風
이를 좋아한 늙은이 마음 아이들과 똑같네 / 翁性樂此兒更同
개자 송자의 받침은 서로 간격하여 푸르고 / 芥臺菘跗相間綠
매화꽃 복숭아꽃은 제 나름대로 붉구려 / 鐵梅穠桃他自紅
진접암 뒤에선 아이가 나비를 그리는데 / 陳蝶菴後兒畫蝶
섬세하기가 도리어 '청고옹'을 초월하여라 / 纖細却超靑皐翁
이 정자에 菜花라는 편액을 달고서 / 以此亭懸菜花額
나비의 수염 다리를 생초에 잘 묘사하리 / 活描鬚股移綃中
살림살이를 鹽井 밖에 모두 마련했으니 / 家貲悉辦鹽井外
어찌 자연 바다에서만 고기를 잡으리오 / 漁採何須紫燕海
나물 뿌리를 먹어야만 百事를 할 수 있나니 / 百事要先咬菜根
汪生의 이 말을 朱子께서 경계삼았네 / 汪生此言朱子佩
가련해라 유랑의 三九는 차치하고라도 / 且置三九庾郞憐
하공의 十千의 돈은 애당초 없었다오 / 本無十千何公錢
菜花의 역사 이어져 없는 날이 없어라 / 菜史接續無虛日
오늘 아침에도 오이꽃 핀 것을 기록하였네 / 今朝又記瓜花發
[청고옹(靑皐翁) : 청고는 윤용(尹愹)의 호, 조부인 윤두서(尹斗緖)와 아버지인 윤덕희(尹德熙)도 모두 그림으로 유명햇다.
[나물 …… 경계삼았네 : 송(宋) 나라 때 왕혁(汪革)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먹고 살면 온갖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하여 논하기를, “내가 보건대 지금 사람들은 나물 뿌리를 먹고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 본심(本心)을 위배하는 지경에 이른 자가 많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小學 善行》
[유랑(庾郞)의 삼구(三九) : 유랑은 남제(南齊) 때의 유고지(庾杲之)를 말하고, 삼구는 유고지가 매우 청빈(淸貧)하여 부추나물 세 가지[부추김치ㆍ삶은 부추ㆍ생부추]만 먹고 살았던 것을 이루는데, 부추 구[韮]자의 음이 구(九) 자와 같으므로 어떤 이가 이를 전용하여 장난삼아 말하기를, “누가 유랑더러 가난하다고 하는가. 어채(魚菜)를 항상 27종(種)씩이나 먹는다오.” 한 데서 온 말이다. 27은 곧 3×9=27을 의미한 것이다. 《南齊書 卷34》
[하공(何公)의 십천의 돈 : 하공은 진 무제(晉武帝) 떄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른 하증(何曾)을 말하고, 십천(十千)은 곧 천 전(千錢)의 10배인 만 전(萬錢)을 뜻한다. 하증은 본디 의식(衣食)의 사치를 극도로 하여 하루에 1만 전 상당의 성찬을 먹고 지냈던 데서 온 말인데,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젓가락을 댈 데가 없다.”고 말했다 한다.《晉書 卷33》
ㅡ채화정, 두 번째 차운하다 ..............1821년 5월5일
[二疊]
정자 몹시 낮고 작으나 먼 바람 받아들여 / 亭絶低小受長風
시원하기는 바로 높은 누각과 마찬가진데 / 爽涼乃與飛樓同
금년에 꽃나무 일백 그루를 심어 놨으니 / 今年種樹一百本
요행히 여생 동안 고운 꽃구경을 누리리라 / 僥幸殘齡享嫣紅
이미 '노래 비파'는 자식에게 나눠 줄 것 없고 / 旣無歌瑟堪析子
오직 어리석고 귀먹어 늙은이 될 줄만 아네 / 唯有癡聾解作翁
이 정자에 깊이 앉아 주역이나 연구한다면 / 深居玩易此亭裏
어찌 '소하'의 한중 생활만 같지 못하리오 / 何渠不若蕭漢中
옛날엔 다산초당이 남쪽 땅에 있었기에 / 草庵昔在南徼外
아이들이 울면서 淸海를 바라보았었지 / 兒曹日泣瞻淸海
이 정자에선 거문고 타고 또 글도 읽나니 / 此亭彈琴復讀書
이제는 喪이 끝나 차지 않는 것 없다오 / 如今去喪無不佩
'채화정'의 이름을 하늘도 어여쁘게 보아 / 菜花之名天見憐
온갖 채소 무성하여 돈 될 것도 많은데 / 百菜蕃廡多算錢
그대가 마침 단오일에 여기를 왔으니 / 君來適値天中日
날 위해 맑은 노래 불러서 잘 기도해 주게 / 爲我善禱淸歌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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