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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리로 본 다도
작성자조석현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4/17 18:39 조회수: 294 첨부(1)

역리(易理)로 본 다도(茶道)





1987년, 다전 조석현(茶田 曺錫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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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序)

2. 곤초육(坤初六) - 아암 혜장

3. 화풍정(火風鼎) - 다산 정약용

4. 중부(中孚) - 초의 장의순

5. 감리천지용(坎離天地用) - 포은 정몽주

6. 홍점(鴻漸) - 육우

7. 육우의 풍로

8. 차에 깃들은 역리(易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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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序)



한국의 다도가 있었는가로부터 있었다면 어떠한 것을 다도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다인들이 갑론을박(甲論乙駁)하였던 것이다. 본 고에서는 다도정신을 주로 역리적(易理的)인 측면에서 고찰하여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려한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다인 중 한 사람인 다산(茶山 : 丁若鏞 1762.6.16-1836.2.22))의 이야기로부터 초의(艸衣 : 張意恂 1786-1866), 정몽주(圃隱 : 鄭夢周 1337-1392) 등 한국 다인들의 다도를 살피고, 이어 육우 등의 예를 들어 역리(易理)로써 다도정신을 해부하고, 다사 전반 및 차 자체에 깃든 정신을 동양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하여 원리적인 측면에서 보려한다.



 

2. 곤초육(坤初六) - 아암 혜장



조선 후기 다도의 맥이 막 끊기려는 이 때, 실학의 태두(泰斗)요 동서양의 학문에 능통했던 대학자인 정객 다산(茶山)이 신유교옥(辛酉敎獄)으로 1801년 강진으로 유배온다. 이로 인해 다문화(茶文化)가 꽃 피었으니 실로 현금(現今) 다도 운운할 수 있음이 어찌 그의 힘입은 바가 적다하리.



다산이 유배 생활의 천명(天命)을 따르고 있을 을축년(乙丑年 : 1805년) 가을 백련사(白蓮寺)에서 주역에 통달했다는 아암 혜장(兒庵 惠藏)을 만나게 된다. 



주역에 대해 서로 도담(道談)을 나누는 중 다산이 묻기를 “왜 건초구(乾初九), 하필 구(九)라 했나?”하니 혜장은 “구(九)는 양수(陽數)의 극입니다.” 이어 다산이 “그러면 왜 곤(坤)을 ‘초육(初六)’이라 하고 ‘곤초십(坤初十)’이라 하지 않았나?”물었다. 아암이 깊이 잘 생각한 후 일어나 옷을 가다듬고 말하기를 “20년간 역(易)을 배웠으나 모두 헛것이라 감히 곤초육(坤初六)을 묻나이다”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다산이 무어라 가르쳤을까? 주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역의 원문에는 양(陽)의 부(父)는 ‘구(九)’로 표시하고, 음(陰)의 부(父)는 ‘육(六)’으로 표시하고 있다. 양의 수 1,3,5,7,9(一,三,五,七,九)중 ‘구(九)’를 사용하고 음의 수 2,4,6,8,10(二,四,六,八,十)중 ‘육(六)’을 사용한 까닭이 무엇일까? 



사실 정역(正易)의 원리로 보면 그 해답은 간단해질 것이다. 정역의 상수(象數) 조화는 「육구(六,九)」의 원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주는 음양의 오묘한 두 기운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수로는 「육구(六,九)」로 대표된다 하겠다. 우주의 순수 음양 생명[乾坤]의 작용수 360은 육(六)과 구(九)로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책수(乾策數) : 216 = 81+72+63         = 9 (⑨+8+7)

곤책수(坤策數) : 144 = 54+36+27+18+9 = 9 (⑥+5+4+3+2+1)

정역수(正易數) : 360



즉, 선천(先天[乾道]) 역수(逆數)의 시발점은 9 ( 9 × ⑨ )에서 시작하고 후천(後天[坤道])은 6 ( 9 × ⑥ )에서 출발한다. 음의 수렴기운이 가장 강한 것이 육(六)이며, 후천의 곤기운(坤氣運)은 바로 이 육(六)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건초구(乾初九), 곤초육(坤初六)의 초(初)는 ‘처음 시작’을 뜻한다. 건초구(乾初九)에서 구(九)로 시작하는 것은 혜장이 말한 것처럼 구(九)가 양의 극(極)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역수(逆數)로 ‘거꾸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양은 역수원리(逆數原理)로 ‘성수(成數)의 구(九)에서 거꾸로 시작하고’ 음의 순수원리(順數原理)로 ‘성수의 육(六)에서 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생수(生數)           성수(成數)

┌────-───┐ ┌───-────┐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



       陽 : 逆數原理       ←─── ㈨

       陰 : 順數原理  ㈥  ───→ 



이 외에도 정역 연구가인 이정호(李政浩)는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이를 용구용육(用九用六)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설괘전(說卦傳)에「삼천양지이의수(參天兩地而倚數)」라 하였다. 삼천(參天)은 일삼오(一三五)요 양지(兩地)는 이사(二四)로 볼 수 있다. 천수(天數) 삼(參)을 쌓으면 구(九)요[3×3=9], 지수(地數) 양(兩)을 합하면 육(六)이다[2+4=6]. 그러므로 천의 건(乾)은 그 적수(積數)인 구(九)를 용(用)하고, 지의 곤(坤)은 그 합수(合數)인 육(六)을 용하는 것이 용구용육(用九用六)의 1차적 원리라 하겠다.’ 



하여튼 역리문답(易理問答)을 인연으로 지음(知音)이 된 그들은 역(易)과 차(茶)와 선(禪)이 뭉쳐 어우러지니 이미 유(儒)와 불(佛)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산으로부터 충격을 받은 아암은 새로운 자기를 찾아 발버둥치며 고민한 지 6년 후 40세의 젊은 나이로 술병으로 세상을 뜨니 지기(知己)인 다산의 슬픔은 어떠했으리.



성질이 불꽃같아 어린아이같이 부드러워야 한다고 다산이 지어진 호 아암(兒庵). 그러나 그는 다산이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 ~ 불법을 깊이 믿다 역리(易理)를 듣고 난 뒤 후회하고 술에 빠져 6-7년 뒤 술병으로 배가 불러 죽었다”고 한다. 또 죽음이 가까워오자 「무단히(無端兮)」(‘쓸데없이’의 전라도 사투리)「부질없이(夫質業是)」란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후천의 조화기운(調和氣運)은 수기운(水氣運)인데 이 기운을 얻지 못하고 선천의 상극기운(相剋氣運)으로 번민(煩悶)한데다 원래 화기운(火氣運)이 많은 아암이 화기운이 많은 술을 마셔대니 오래 살 수가 없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그는 끝까지 곤초육(坤初六)의 진리를 체득하지 못한 것 같다.



 

3. 화풍정(火風鼎) - 다산 정약용



역리(易理)에 심취했던 다산은 다사(茶事)에 있어서 역(易)의 진미(眞味)를 느끼고 있었으리라.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흙벽돌로 쌓아 만든 작은 차 부뚜막은

이화손풍(離火巽風) 모습인데

차는 끓고 산동은 졸고

간드러진 연기만 절로 푸르다.



壘墼小茶竈

離火巽風形

茶熟山僮睡 

裊煙猶自靑



차 부뚜막을 설치하고는 그 모양을 주역의 괘에서 찾은 다산. 차를 끓이면서도 주역의 이치를 생각했던 것 같다. 최계원(崔啓遠) 광주시립박물관장은 ‘주역의 이괘(離卦)는 ☲ , 손괘(巽卦)는 ☴ 이다. 손괘(離卦)쪽이 아궁이이고 이괘(巽卦)쪽이 굴뚝일 듯 하지 않는가.라고 하고 있다.



위와같이 형(形)을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형상(形象) 자체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화손풍(離火巽風)은 화풍정괘(火風鼎卦)로 ‘솥’을 상징한다. 상괘(上卦 ☲ )는 이괘(離卦)로 ‘불’을, 하괘(下卦 ☴ )는 ‘바람’ 또는 ‘나무’을 상징한다. 불이 나무위에서 타고, 바람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는 상태다. 이 괘가 이와 같으므로 다산이 부뚜막에서 불을 지피는 상황과 꼭 맞아 떨어진다.



이 괘는 불은 광명이니 ‘현명’이고 바람은 좇는 성질이니 ‘겸손’으로 해석되어 상하가 호응하고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 이 상태를 「정(鼎)」으로 표현한다. 솥은 고대에 있어 신과 조상에 제물을 바칠 희생물(犧牲物)을 담는 것. 국운이 걸려 있는 것으로써 국운(國運)을 정운(鼎運)이라 부른다. 솥은 세 발[三鼎]이 있어 안정을 뜻한다. 군신상하가 협력해야 나라가 성(盛)하고 세 발이 조화되어야 안정이 된다. 서로 협력하지 못하고 정쟁(政爭)으로 유배지 생활을 하는 다산으로서야 이 행운의 괘를 접하고 감회가 어이 깊지 않았으리.



이화손풍(離火巽風)은 밑에서 바람이 솔솔 불고(巽風 ☴)나무 위에서 불이 타는 것(離火 ☲)이니 ‘차를 끓이는 화후(火候)’를 그대로 상징한다. 화풍정(火風鼎)으로 그 위에 솥을 걸고 솥에는 차가 끓는다. 이처럼 차 끓이는 것 자체 다사(茶事)에 음양오행 주역의 이치기 깊이 들어 있다.



木(땔나무), 火(불), 土(부뚜막), 金(솥), 水(찻물)의 5행이 고루 갖춰 목은 불을 일으키고[木生火] 수(水)는 토(土)의 중재로 화(火)를 만나 탕수(湯水)가 될 수 있다. 화(火)가 부족하면 수극화(水克火)하여 생물이 되고, 화(火)가 넘치면 화매수(火侮水)하여 노수(老水)가 된다. 곧 수(水)와 화(火)가 지나치지 않고 중(中)을 얻는 것이 긴요하다. 오행(五行)의 상생상극(相生相剋)과 음양이 조화되어 중을 얻어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이 진다(眞茶)를 마시고 다인은 심신이 건강해질 수 있다. 이 화풍정(火風鼎)에서 삼극(三極)인 천지인(天地人 : 陽,陰,中性 : 火水風)의 원리에서 보면, 지(地 : 陰)의 격인 수(水)가 생략되어 있다 보여진다. 화수풍(火水風)에서 음양[陰陽 : 茶水와 火候]을 조화시키는 촉진제로서 풍(風)의 덕(德)은 토(土)의 용(用)으로서 이 셋이 치우치지 않고 화합하면 진다를 얻을 수 있다.



이 중(中)과 화(和)를 얻는 과정은 직선적이라기보다는 변증법적인 공간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차는 수생목(水生木)으로 아래에서는 지기(地氣 : 陰氣, 水氣)를 받고 위로는 천기(天氣 :陽氣, 火氣)를 받아 반음반양(半陰半陽)으로 자란다. 시기적으로도 겨울의 음기와 여름의 양기가 만나는 초봄에, 하루 중에도 밤의 음기와 낮의 양기가 만나는 새벽에 딴다. 찻잎도 양인 일창(一槍)과 음인 이기(二旗)를 따 섞는다. 묘채(妙採)라 할 수 있다. 이 중(中)과 화(和)를 얻는 과정은 차를 따고, 만들고,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는 다사의 전 과정에 포함된다. 다인이 이 차를 마시는 몸과 정신까지도 다 포함된다 하겠다.



 

4. 중부(中孚) - 초의 장의순 



다인 중에 주역의 괘를 호로 삼은 이가 있으니 한국에는 초의요 중국에는 육우다. 다산은 선가(仙家)에서 취호(取號)하여 자하도인(紫霞道人)이라 하고, 불가의 스님 초의 장의순(張意恂)은 자(字)를 유가의 주역의 괘에서 따 「중부(中孚)」라 했으니 그들은 유불선(儒佛仙)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중부(中孚)」는 풍택중부괘(風澤中孚卦 : ☴☵ 巽上坎下)로 바람이 못 위로 부는 것을 상징한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따르듯, 사람의 정성된 마음이 사람을 움직인다.「중부(中孚)의 부(孚)는 조(爪) 아래에 자(子)를 붙인 것으로 새가 날개 밑에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을 상징한다.



새가 알을 품고 있을 때의 그 순수하고, 경건하고, 집중된 일념, 한결같은 마음...이러한 어미새의 지성(至誠)은 마침내 알 속에서 생명을 일깨워 한 마리의 병아리가 탄생한다.예로부터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하늘도 감동한다고 한다.



또 괘상(卦象)을 보면 가운데가 비어 있고 위가 나무요 아래가 물이니 빈 배[虛舟]가 떠 있는 형상이다. 즉 이 괘는 마음을 비우고 정성을 다하는 것을 상징한다. 차를 만드는 것도 차를 다루고 차를 마시는 일 등 차의 일 전체에 마음을 비우고 지극히 정성을 다해야 그 다도를 이룰 수 있다.



초의는 또 차를 범어로 ‘알가(arghā)’가 했다. 두음 ‘알’(ar)은 곧 우리말로 ‘알(卵)’이니 시원(始源), 원초(原初)를 뜻한다.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니 욕심이 없는 순수한, 본래(本來) 원초(原初)의 마음이다. 차의 본성이 ‘성무사(性無邪)’이니 이를 본받아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이것이 중부괘(中孚卦)의 의미이다.



 

5. 감리천지용(坎離天地用) - 포은 정몽주



차에 역의 이치를 도입한 정몽주의 차시를 보자



역경 읽기



돌솥의 차는 비로소 끓고

풍로불은 빨갛게 피었구나

감리(坎離)는 천지의 쓰임이니

곧 이 뜻이 끝이 없도다.



 讀易



石鼎茶初沸

風爐火發紅

坎離天地用

卽此意無窮



다산의 차시는 화(火)와 풍(風)을 노래했으나 포은은 다사의 핵심이 되는 다수(茶水)와 화(火)로 음양과 천지의 용(用)을 설파했다.



감리천지용(坎離天地用)은 ‘감리즉천지용’(坎離卽天地用 : 감리는 곧 천지의 쓰임)으로 해석된다. 1,2구에서 차솥에서 차가 끓는 것[水]과 풍로에서 불이 타는 것[火]을 노래했으니 이 수화(水火:坎離)가 천지의 쓰임으로 그 뜻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감리천지지용’(坎離天地之用 : 감리천지의 쓰임)으로 해석할 경우 천지는 곧 주역의 건곤(乾坤)이니 ‘건곤감리(乾坤坎離)의 용(用)’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갑자기 천지(天地)가 괘로 등장한 것도 그렇고 그 뜻조차 천지비괘(天地否卦)가 되니 의미상으로도 부적합하다.



천지비괘(天地否卦 : ☰☷)는 양은 위로 음은 아래 각각 분향(分向)하니 음과 양이 반목하고 협력하지 않아 막히는 것을 상징한다. 이를 거꾸로 하면 지천태괘(地天泰卦 : : ☷☰)가 되어 천지상하가 상교(相交)하여 화합하는 좋은 뜻이 되나 이 역시 감리지천용(坎離地天用)으로 쓰지 않는 바에야 억지 해석이다.



인간과 만물의 생명은 수화(水火 : 坎離)의 두 기운으로 살아 움직인다. 즉 일수(一水), 이화(二火)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두 에너지다.



감(坎☵) : 陽氣를 中(性)으로 陰氣를 쓴다(陽體陰用)

리(離☲) : 陰氣를 中(性)으로 陽氣를 쓴다(陰體陽用)



지극히 맑고 순수한 생명의 영수(靈水)[一太極水 ⊝전자]는 물질적으로는 음이지만 가운데 본성(本性)은 동(動)하는 양이다. 감(坎☵)괘를 보면 가운데 양(−)을 음(--)이 둘러싼 형태로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생명의 본체인 조화수(造化水)가 본래 통일된 성품에서 멀어져 가면서 성장, 분열하여 생명은 역운동(逆運動)을 한다. 이 일수(一水)[감(坎☵)]가 동(動)하여 생(生)하면 목기운(木氣運)이 싹트고[水生木], 이 삼목(三木)이 분열, 성장이 성해지면 본래 자기모습과 정반대인 이화(二火)가 된다.[리(離☲)] 이 이화(二火)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활발한 듯하지만[=] 본성은 비어 있어 지극히 고요한 음[--]이 된다. 



화(火)가 지극하면 극즉반(極卽反)에 의해 금기(金氣)의 도움으로(金火相爭 : 土가 중재) 본체(本體)인 일수(一水)로 돌아오는 순운동(順運動)을 하게 된다. 이것이 후천(後天) 운동이다. 따라서 수화[水火 : 坎離]로 천지만물의 생성과 소멸, 순환하게 된다.



주역의 괘에서 보면 감리(坎離:水火)는 수화기제(水火旣濟:☵☲)로 각 효(爻) 하나하나가 모두 음양에 상응하는 완전한 아름다움, 최선의 상태를 성취하는 순간을 표현한다. 이 여성상위(女性上位)와 남성하위(男性下位)의 상은 물[陰]은 아래로 향하고 불[陽]은 위로 향하여 음양이 서로 잘 교합하여 즐거우니 이는 차 끓이는 모습과 다도의 즐거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천지음양의 교합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니 천지의 용(用)이다.



그러나 이 기제(旣濟)의 미(美)와 완전은 숨가쁜 형국이나 현자(賢者)는 이 괘를 보고 지나치지 않으려 조심을 한다. 수(水)가 과하면 화(火)를 극(克)하고 화(火)가 지나치면 수(水)를 모(侮)하니 오직 중정(中正)을 지켜 임사(臨事)해야 한다. 이렇게 다사(茶事)를 통해 역리(易理)와 인생을 깨달아 도에 이르는 것이 다도라 할 수 있다.



 

6. 홍점(鴻漸) - 육우



당나라 육우(陸羽)는 자를 홍점(鴻漸)이라 하여 스스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발명품인 풍로에 역리(易理)를 도입했다. 절에서 고아로 자란 그가 산가지로 점을 쳐 ‘건괘(蹇卦)[水山蹇 ☵☶坎上艮下]가 점괘(漸卦)[風山漸 ☴☶ 巽上艮下]로 간다.’라는 글[辭]을 얻었다.



수산건(水山蹇)은 큰 강 물과 높은 산이 겹쳐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주역 64괘중 4대난괘(四大難卦) 중 하나이니, 불우한 육우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듯하다.



풍산점(風山漸)은 나무를 상징하는 손괘(巽卦)와 산을 상징하는 간괘(艮卦)로 이루어져 산에서 나무가 자라는 형상으로 점진(漸進)을 나타내는 괘다. 다시 이것을 기러기에 비유해, 어린 기러기가 푸른 하늘 높이 오르는 꿈을 간직한 채, 처음은 물가에[初六], 다음은 반석 위에[六二] 그 다음은 뭍[陸]에[九三], 나무위에[六四], 언덕 위로[九五], 마침내 창공을 높이 나는[上九] 것으로 하고 있다.



“기러기가 뭍에서 높이 날음에 그 깃을 쓸 수 있으니 길하다.(上九 鴻漸于陸 其羽可用爲儀 吉)”라는 효사(爻辭)에서 따라 자신의 자(字)를 홍점(鴻漸)이라 하고 이름을 육우(陸羽)라 했으니 아마도 주역에 가장 경도(傾度)된 것으로 다인 중 그를 따를 자가 없을 것 같다.



 

7. 육우의 풍로



육우 그 자신의 발명품인 풍로는 옛날의 솥처럼 생겼다. 옛날의 ‘솥’에 해당하는 ‘정(鼎)’자는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삼족양이(三足兩耳), 화오미지보기야(和五味之寶器也), 상석목이취(象析木以炊)[세 발에 두 귀, 다섯 맛을 조화시키는 보배 그릇이다. 나무를 쪼개 불을 때는 모양을 본떴다.]」라 했다. 정(鼎)은 사기나 동(銅)으로 만든 고대의 팽기(烹器)이다.



육우는 풍로(風爐)의 세 발에 고문(古文)으로 <감상손하이우중(坎上巽下離于中)> <체균오행거백질(體均五行去百疾)> <성당멸호명년주(聖唐滅胡明年鑄)> 21자를 적었다.



<감상손하이우중(坎上巽下離于中)> 은 ‘위에는 물, 아래는 바람, 가운데는 불’이라는 뜻으로 차를 끓이는 공간적(空間的)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제일 아래 바람이 불을 일으키고, 불은 물을 데우는 데서 이 괘를 사용했다 보여진다.



그렇다면 왜 공간 순서(順序)대로 “감상이중손하(坎上離中巽下)”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시간적으로는 감(坎)이 오르고 손(巽)이 내린 다음 가운데 리(離)를 만나기 때문이다. 삼극(三極 : 천지인, 양,음,중성)의 원리로 감(坎:물)이 양(槍)이 되어 위로 오르고 손(巽:바람)이 음(旗)이 되고 아래로 향해 가운데 중(中)의 이(離:불)로 들어가 차를 얻는다. 



감상손하(坎上巽下)는 ‘수풍정괘(水風井卦 ☵☴)’이고, 이중손하(離中巽下)인 ‘화풍정괘(火風鼎卦 ☲☴)’는 이미 밝인 바 있다. 원래 물은 나무밑에 있어 나무를 자라게 하는데(水生木) ‘수풍정괘(水風井卦)’는 나무위에 물이 있으니 두레박으로 떠 올린 물이다. 



물[茶水]은 나무[木 : 茶]의 모(母)이므로 당연히 차의 물은 차보다 많아야 한다. 그 비율이 맞지 않아 차가 많고 물이 적으면 그 맛이 쓰다. 차를 만들 때 불[火]이 과하면 그 색이 붉다.[火의 色] 차는 차의 목기(木氣)가 잘 드러나야 그 색이 푸르다[木의 色] 이 푸르고 영롱한 차는 오미(五味)가 고루 난다.



「(이 오미(五味)가 골고루 든 차를 마셔)몸에 오행의 균형을 이루니 모든 병을 물리친다[(體均五行去百疾)]」는 말은 오행과 의학의 진수를 말하고 있다. 우리 몸은 가장 불가사의한 소우주(小宇宙)다. 온갖 우주 진리가 그대로 체현되고 음양오행의 원리가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 오장육부가 균형을 이뤄 제 기능을 다할 때 건강하며, 이 균형이 무너지면 곧 병이다.



차에는 오행의 맛에 해당하는 오미[五味 : 酸(木), 苦(火), 甘(土), 辛(金), 鹹(水)]가 고루 있어 자신의 몸의 오장[肝(木), 心(火), 脾(土), 肺(金), 腎(水]과 육부[膽(木), 小腸,三焦(火), 胃(土), 大腸(金), 膀胱(水)]를 건실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일미(一味)만 편식하면, 예를 들어 단 것[甘(土)]만 즐기면 비장(土)를 상한다. 이때는 쓴 것[苦(火)]을 먹어 화생토(火生土)의 원리로 토(土)인 비장을 살려줘야 한다. 차는 이 오미가 골고루 들어 있어 편식이 되지 않고 균형을 이뤄 건강하게 함을 주역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성스런 당이 오랑캐를 멸한, 다음 해에 주조하다(聖唐滅胡明年鑄)」는 주조 연대를 기록한 것으로 정치성을 엿볼 수 있다. ‘성스런 당’이란 육우 자신의 충성 표현이요, ‘오랑캐를 물리침’은 호인(胡人)출신인 안사(安史 : 安祿山과 史思明)의 난(亂)을 평정한다는 뜻이며 그 ‘이듬 해’[明年]는 AD758년이다.(다경은 AD760년에 짓다)



이 삼족(三足)의 문구 중 앞 2구는 공간적 측면이나 마지막 구는 시간적 측면이다. 또 앞 2구 중 첫 구절은 객체(客體)로 원리적인 측면을 변증법으로, 다음 구절은 주체(主體)로 오행과 차의 효능을 노래하고, 마지막 문구는 그 운행[政治]이다.



육우는 다경에서 또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세 발 사이에 세 창을 베풀어 밑의 한 창을 바람을 통하고 재를 흘리는 곳으로 하고 그 위에 고문(古文) 여섯 자를 나란히 썼는데, 한 창에는 <이공(伊公)>이라 썼고 한 창위에는 <갱육(羹陸)> 두 자를 썼고 한 창 위에는 <씨다(氏茶)> 두 자를 썼으니 소위 <이공갱육우차(伊公羹陸氏茶)>이다.’「국이라며 이공이요, 차라면 육우다」(伊公羹 陸氏茶)라는 뜻이다. 은나라 탕왕시 재상 이공(伊公)의 국 끓이는 솜씨에 견주어 자신의 차 끓이는 솜씨가 자신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문양으로 불의 괘[離]와 그의 상징인 꿩(불새 火禽), 바람의 괘[巽]와 표범(바람짐승 風獸), 물의 괘[坎]와 물고기(물벌레 水蟲)을 각각 새겼다. 손(巽)은 바람을 맡고 이(離)는 불을 맡고 감(坎)은 물을 맡아, 바람이 능히 불을 일으키고 불은 능히 덥게하는 고로 그 세 괘를 갖춘 것이다.’라고 솥의 의장(意匠)에 대해 역리(易理)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주역의 의미를 온통 풍로에 새겨 넣은 육우는 진정 역리로 다도의 진미(眞味)에 접한 다인이라 여겨진다.



 

8. 차에 깃들은 역리(易理)



차는 그 성(性)이 삿되지 않고 그릇을 가리지 않는다(茶之性無邪 不器者也) 선가(禪家)에서는 다선일미(茶禪一味)로, 선가(仙家)에서는 선다일여(仙茶一如)의 경지로, 유가(儒家)에서는 역리(易理)의 진리를 깨우치는 매개체인 것이다.



오행은 실로 수(水)의 변화이고 수(水)는 생명을 창조하는 본원(本源)이다. 수(水)에서 처음 싹이 나오니[木氣의 發] 이는 수(水)가 운동하는 최초의 모습으로 양(陽)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양의 활동이 왕성하면 화기(火氣)로 변한다. 겉은 화려하지만 분산되어 그 속의 기(氣)는 이미 공허하다.(가운데가 꽉 차던 수의 감(坎: ☵ )이 가운데가 텅 빈 화의 이(離 : ☲ )가 된다)



그래서 차도 화기(火氣)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곧 목기(木氣)가 처음 발하는 초봄에 따야 그 기(氣)가 충만하다. 차의 역리를 논할 때 음과 양뿐만 아니라 중(中)의 개념을 포함한 삼극의 원리가 매우 필요하다. 이 중(中)은 우리 고유의 삼태극(三太極)에서 인(人)의 자리인데 곧 차의 자리이기도 하다.



차를 따는 계절도 봄으로 겨울[陰]과 여름[陽]의 중(中)이다.

차를 따는 시간도 새벽으로 밤[陰]과 낮[陽]의 중(中)이다.



찻잎도 일창이기(一槍二旗)로 음(旗)과 양(槍)의 섞어 중(中)을 얻는다. 이렇게 엄격하게 차를 따는 것이 차의 중성자(中性子)를 얻는 첫걸음이다.



차의 산지(産地) 위치도 산기슭으로 평지[陰]와 산[陽]의 중(中)이 좋다.

일조(日照)도 적당한 햇볕[陽]에 안개와 이슬[陰])이 내리는 반음반양(半陰半陽)으로 중(中)이어야 좋다.

토양도 진흙[陰]과 모래[陽]가 섞인 사질토(沙質土)의 반음반양(半陰半陽)으로 중(中)이어야 좋다.



이렇듯 순도 높은 좋은 차를 얻는 데는 엄격한 시간성과 공간성이 요구된다. 이는 차가 중성자로써 우리 몸속에서도 그와 같은 작용을 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차를 제조하는 것도 차의 신선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함이다. 화기(火氣)를 가해 차의 본성이 잘 흐트러지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 때에도 중도(中道)의 묘(妙)가 잘 발휘되어야 한다.



화기(火氣)를 가하되 찌거나 덖으니 삶거나 볶아서는 안된다. 삶을 경우 차의 향이 흩어지고 볶을 경우는 향이 변질된다. 결국 삶은 경우는 음에 치우치는 음극화(陰極化) 현상이고 볶는 것은 양에 치우치는 양극화(陽極化) 현상이다. 이렇게 양극에 치우치면 차의 중성자를 얻을 수 없으므로 찌거나 덖어 차를 만들게 된다.



 

陰 ● ← 水氣(多)       中      水氣(少) →  ○ 陽



삶다            ① 찌다          ② 덖다        볶다

(熟)              (蒸)                 (焙)           (炒)



陰極化     └─ 中和(茶의 製造) ─┘    陽極化



실제 같은 차의 제조도 일본에서는 중(中)에서도 음에 약간 치우친 찐차[蒸茶]를 주로 제조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중(中)에서도 양에 약간 치우친 덖은차[焙乾茶]를 주로 제조한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적인 덖은차의 제조에 있어 솥에서 덖으면서 약간 물을 뿌려 수증기를 발생시키는 방법은 찌고 덖는 방법을 섞어(① 찌다 + ② 덖다) 진정한 중(中)을 얻는 묘(妙)를 발휘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제다법은 무척 까다롭다. 사랑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정신이 바로 초의의 호인 중부(中孚)의 정신이다. 이를 초의는 ‘차를 만들 때는 그 정성을 다한다[造盡其精]’라고 말하고 있다. 「중부(中孚)」의 뜻을 다시 살피면 중(中)으로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며 정성을 다해 알을 부화(孵化)시키는 것과 같다.



같은 찻잎도 차를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그 맛은 매우 달라진다. 제법에 따라 불의 조절과 정성과 기술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짐은 바로 차의 본성인 이 중성자의 순도(純度)를 얼마만큼 잘 얻어내느냐의 문제라 생각된다. 약리작용(藥理作用)이나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도 차가 자라난 토양과 차를 따는 때 그리고 차를 만들 때 등 다사(茶事) 전반에 다도가 잘 지켜지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달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이 은은히 오래 지속되는 것을 최상의 맛이나 진다(眞茶)의 맛[眞味]이다. 진향(眞香)이 기득하고 차를 달여낸 빛이 순백(純白)에 가까우면 최상이다. 순백(純白)은 곧 중성자(中性子)의 색이다.



청백(靑白)으로 푸르스름한 빛은 목기(木氣)를 지닌 것으로 그 다음이고, 황백(黃白)의 노르스름한 빛은 토기(土氣)를 지닌 것으로 그 다음이다. 여기까지 먹을 수 있다. 화기(火氣)가 너무 지나치거나 변질된 것은 적색(赤色)을 띠는 데 이러한 차는 오히려 몸에 해로우니 먹지 않아야 한다.



찻잎에 화기를 쐬어 차를 만드는 것은 수생목(水生木)으로 생(生)한 기운을 화(火)로 성숙 발전시킨 뒤 금(金)의 기운으로 수렴(收斂) 내장(內藏)시키는 것이다. 금화상쟁(金火相爭)의 기운을 위대한 중화성(中和性)을 지닌 미토(未土)의 토화작용(土化作用)으로 생장분열(生長分裂)을 거두어 완전한 성숙에 이르게 한 것이다. 따라서 생찻잎을 그대로 먹지 않고 차를 만들어 먹음은 이러한 이치를 활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년 내내 안심하고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다.



금기(金氣)로 외형을 수렴하고 수기(水氣)로 완전히 응고시키면 오래 갈무리가 가능하다. 마치 자연의 초목이 겨울을 지내고 봄이면 다시 새 싹이 트듯, 갈무리된 차를 다관에서 우리면 찻잎은 펴지고 다시 봄의 푸른 차의 본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갈무리하여 수장된 차를 양기를 가한 물[湯水]로 잘 우려 먹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힘이 샘 솟으니 이 아니 다시 차의 본래의 기운[木氣,春氣]이 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묘한 역리가 깃들어 있다.



이 차는 필연적으로 물을 만나야 하는 것이니 좋은 물을 얻는 것은 좋은 차를 얻는 것 만큼 중요하다.[水得其眞] 물은 생명의 근원이거니와 농도가 높은 차의 중성자를 우리 몸에 맞는 농도로 희석시켜 흡수를 돕는다. 차와 물의 만남은 마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일양(一陽 : 精子)이 음수(陰水)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좋은 씨도 좋지 않는 밭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초의의 얘기대로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체(體)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드러날 수 없고 진다(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알아 볼 수 없다.’ 마치 건전한 육체[水]에 건전한 정신[茶]이 깃든다고나 할까?



차를 우릴 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중(中)을 얻는 것이다. 음양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차가 많고 물이 적거나 물이 적고 차가 많아도 안된다. 물의 온도가 너무 뜨겁거나 차서도 안된다. 우리는 시간이 너무 길거나 짧아서도 안된다.



차와 물의 양, 물의 온도 그리고 우리는 시간은 마치 우리 우주가 그렇듯 4차원의 요소다. 공간의 3차원을 차¹,물²,온도³로 보고 우리는 시간⁴을 4차원으로 볼 수 있다. 이 들 4차원은 공간과 시간이 서로 상대적으로 잘 짜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 현묘한 중화(中和)와 중정(中正)이야말로 객관적인 중성자인 진다(眞茶)를 얻는 마지막 관문이다[泡得其中]



다음으로 마지막으로는 다인의 문제다. 다인은 무릇 차의 본성을 본 받아야 한다. 다사의 다도와 정성과 중화와 중정의 정신도 이어야 한다. 차에 깃든 역리가 어찌 다인들에게도 깃들지 않겠는가? 차가 신묘한 중성자를 갖춘 영초(靈草)라면 인간 역시 높은 중성자를 갖춘 신령한 존재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음양에 치우치면 병이고 균형과 조화 곧 중(中)을 갖추면 건강하다.



다인은 차를 마심으로써 차의 높은 중성자를 흡수하고, 몸과 마음의 영(靈)과 건(健)을 되찾아 각(覺 : 더 높은 단계로 상승)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진다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차의 객체적(客體的)인 측면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인 다인이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잡스러울 때 진정한 다도가 있을 수 있을까?



실제 다인은 다사를 주관하고 다도를 실천하는 주체다. 또 진다도 진다인(眞茶人)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실제 다인의 체와 신, 몸과 마음은 진다 이상으로 중요하다. 진정 다도와 역리를 체득하는 진다인(眞茶人)이란 이렇게 진다로써 신령체건(神靈體健)을 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비우고 깨달아 그 진면목(眞面目)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차를 마시는 다인이 도인의 경계에 까지 이르는 것을 잘 보여준 초의 다시 한편을 감상해 보자



옥화차 한 잔 기울이니

겨드랑이에 솔솔 바람일어

몸은 가벼이 오르고 정신은 맑네

밝은 달은 촛불되어 나의 벗

흰구름 자리 펴고 병풍 삼으리

대나무 솔바람소리 소량(蕭凉)도 해라

청한(淸寒)함이 뼈에 저리고

심간(心肝)을 깨워주네

흰구름, 밝은 달 두 벗과 함께 마시니

그 도인 자리가 바로 승(勝)이로고



 



[참고문헌]



李正浩,周易正義 -그 正易的 意義, 1987

최계원, 우리차의 재조명,1983.

譯解 南晩星,周易,1976 

朴容淑, 韓國古代美術文化史論, 1978

李敦柱, 漢字學總論, 박영사 1979

茗園茶會, 茶經,東茶頌,茶神傳, 성균관 1980

李正浩,正易과 一夫,아세아문화사, 1987

덧글 ()

조석현  / 2013-04-17-18:52 삭제
박형상의 다산의 글을 대하는 중 아암 혜장의 이야기까지 하다보니

다산과 혜장의 핵심 스토리중 혜장의 안타까운 사연을 상세하게 다룬

저의 글을 올려 봅니다.



혜장은 다산에게 역을 자꾸 물었는데

다산도 그 핵심은 말하지 않았고

혜장도 역의 진의를 얻지 못한 듯 합니다.



차에 깃들은 역리(易理)는 제가 

다도를 역리로 풀고 해석한 것인데

다전의 다도정신의 근간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세경  / 2013-04-18-00:57 삭제
역도 좋고 선도 좋지만 근래 왜색풍을 띈 차가 많이 횡행하는 듯 하여 마음 좀 아프고

무엇보다도 가배 광풍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네요
송기병  / 2013-04-18-08:48 삭제
조대감!

내용은 잘 모르겠고   여하튼 대단허이!!
조석현  / 2013-04-18-09:33 삭제
《Re》이세경 님 ,

세경아 오랫만이다, 얼굴 좀 보자.

댓글 120% 동감이다. 우리 것을 잘 가르치지 못한 죄 크지 않겠나?

우리 역사, 우리의 우수성을 모르거나 이어 살리지 못하지 않나 싶네



易으로 치면 가운데가 텅 빈 화(火)의 이(離 : ☲ )이괘 형태이니

수(水: 정신을 대표)의 기운이 충만한, 가운데가 꽉 차던 수의 감(坎: ☵ )이 필요하네
조석현  / 2013-04-18-09:38 삭제
《Re》송기병 님 ,

그저 몇가지 독특한 용어를 쓸 뿐, 내용은 평이하네.

우리가 알고 느끼고 행하고 있는 것일 뿐이네.



늘 댓글로 빛내주니

그저 감읍할 뿐이네
나웅인  / 2013-04-18-09:46 삭제
아니? 이세경이 나타나다니?

어디 다녀왔어?

통 안보이데.

석현이 글 잘 봤네.

'차 인문학회' 학술대회에 자네 같은 글들이 필요한데.....

아직은 한국 다도의 인문학이 뭘 말하는지 모르고 발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참 안타깝더구만.

좋은 글 잘 봤네.

자네가 한의대를 다녀야 허는데...

그랬으면 훌륭한 한의학자가 되었을 텐데......
조석현  / 2013-04-18-11:55 삭제
《Re》나웅인 님 ,

과찬일세.............

한국 다도의 정신은 동다송을 계기로 학창시절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역으로 본 다도정신은 내가 쓴 후에 몇이 발표한 것으로 아네만...

자네말대로 그들이 요득(了得)하고 쓴 것인 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인 것 같네



글쎄 낭인아닌 낭인.. 한량 느낌이네

워낙 늦터져 자연계 적성으로 알고 

고3때까지도 자연계에 있었네 11반

인문계는 예비고사후 1~2달 5반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한의사風으로 보긴 해

나는 양의가 그리 싫어 인문계로 옮겼는데

아들은 또 그 쪽으로 가니...알 수 없지...



나는 한문을 좋아하고

딸은 영문을 좋아하는 것도.....
박형상  / 2013-04-18-23:45 삭제
《Re》조석현 님 ,

1,지금에야 정독 한번 ..역시 어렵네..



  정약용의 詩에 <주역 괘>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역시 혼란스럽더군...

  정약용 평전 등을 보면.... 정약용이 혜장과의 첫 만남에서 혜장을 완패시켰다는 식으로 

너무 쉽게 말해버리는데...그 부분은 현지 말대로 비본질적인 지엽적 논쟁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해..

(다만 정약용은 어떤 사물이나 개념의 기본 원리 체계에 아주 충실햇다는 정도는 뜻할 것)



그때의 <건初9> <곤初6> 개념논쟁..

즉 "왜 <곤초10>이 아니고 <곤초6>이냐, 그 이유가 뭐냐"라는 정약용의 공격적 질문에 

혜장이 비록 그 대답을 바로 못했지만... 그 부분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몰라도 그저 그런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이는 우리가 해와 달이 왜 어떻게 만들어졋는지는 몰라도 ...해와 달의 존재와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하고 같은 이치..



...혜장 역시 그 니름의 주역의 전문가로 정약용의 토론 파트너로 충분했던 사람.



.....일부에서는 그 대답을 이렇게 설명하더군..

.우리 태극기를 구성하는 기본괘로 설명하면..

 <건괘>는 긴 짝대기 3개로 양의 최대치이고..<곤괘>는 가운데 빠진 점선 짝대기3개로 음의 최대치라는 것

..그런데 하나의 긴 짝대기,양획은 '하나이면서도 세 매듭'으로 구성되니, 1 양획 짝대기=3 이라는 것,

 반면에 음획은 '그 가운데가 단절된 두 매듭'이니, 1음획=2 라는 것..  



   그렇다면.....건(하늘,양,남자)괘=3*3=9= 양의 극수

                곤(땅,음,여자)괘=2*3=6= 음의 극수..라는 것 ..그러니 <곤초10>이 아니라 <곤초6>이라는 것...



    여기서 유념해야할 주역의 특징...역리 이론이 선행하고서 그에 관한 주역 괘상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주역 괘상이 먼저 등장하고(천명으로 만들어졋다한다) 나중에야 그것을 해석하는 이론이 만들어졌다는 것...

즉 '짝대기,획,괘상'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를 설명하는 여러 괘사 해석이론이 보태진 것이라는 점..

(처음부터 괘상과 괘사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런ㅅ 사정때문에 정약용은 괘상에 비중을 부여하는 상수론, 상수역학적 접근을 햇던 것인 반면에 괘사해석, 그 풀이에 비중을 두는 의리역과는 그 거리를 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네..



   그러면 ..왜 <초,初>.이냐?... 이 부분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



정약용의 주역 뿐만 아니라 <주역의 易> 자체가 그 본질은 <變>에 있는 것!

 ..달이 차면 기울 듯, 극수(양9 또는 음6)로 가득 차면, 이제는 반전(변화)이 시작된다는 것 ..

 양의 극수에서 음이 시작되고... 음의 극수에서 양이 시작되는 것,



 예컨대, 경기 싸이클의 최저점 바닥에 떨어졌다면 이제는 반등이 시작되는 것...그래서 그 바닥이 곧 初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면 이제는 내리막길 하향만 남아 있는 것,..그래서 그 정점이 곧 初



 그가 '大窮, 큰 어려움'에 이르면 이제는 '大吉,큰 행운'의 조짐이 보인다는 것...

  그래서 정약용은 주역의 철리를 믿고서 강진 유배 생활의 큰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낸 것이고

 조선시대 유배의 나락에 떨어진 다른 선비들 역시 주역의 <택풍대과>괘에 의지하여 참고 기다린 것.



지난번에 내가 언급한 <매화독조도>에 나오는 한 마리 새는 홍임 모가 아니라 

밑바닥에 떨어진 정약용 자신을 뜻하는 것이고, 매화나무의 매화꽃이 피어나면서...

이는 이제 그 반전의 조짐이 시작되는,<택풍대과> 매화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싶네..
박형상  / 2013-04-19-00:13 삭제
2ㅡ 초의의 <중부>에 관련하여...



   마침 초의는 정약용과 교유관계인가? 사제관계이냐?는 글을 준비하던 중인데..

  ...반가운 현지의 이번 글..

   이 부분에 대해 학자들간에 그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네...

(정민 교수는 '사제관계'라 하면서 초의는 정약용의 손때묻은 제자라고 주장하고 있고...)



  내 의견은.... 초의는 정약용의 제자가 될 뻔 하다가 ...결국에는 그 인연이 안닿은 선승이라고 본다네 ..

  즉 결국에는 교유관계라는 것..



  (정약용은 중국의 한유가 승려 가능선을 유학의 시인,'가도'로 환속을 시켰듯이

  초의를 유자로 만들려고 부단히 설득하고 무척 탐을 냈었다, 그만큼 초의 자질을 알아챘던 것이다) 



  초의가 비록 1812,1813년경에 정약용한테 주역과 논어를 배운 것은 사실이나...

 .대둔사 은사, 완호 스님의 반대로 ...정약용한테의 유학 공부의 인연을 끊엇던 것..

그래서 그 이후로 정약용과의 접촉 흔적이 안 나타나고..... 

1818년 해배 때도 스승으로 예우하며 전송한 흔적도 없고 ....1830년에서야 정약용과 재회를 한다는 것..

이때도 역시 두 사람간의 '사제의 예'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정약용은 그를 <초의 禪>으로 부를 뿐...



돌이켜보면, 초의가 24세때 정약용을 처음 만날 때 '무지 범벅 초보' 상태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불교계의 촉망받는 학승 수준이었으며..정약용한테는 '주역 일부와 논어..시 공부' 정도를 배운 것



그러니 한때 배운 것은 맞다해도 ...마치 내림굿을 받거나, 의발을 전수받거나, 

 문인록에 등재될 정도의 사제의 의리를 확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

정약용이 해배될 때, "다신계 18제자와 불교쪽의 제자 이름"을 거명할 때도 초의는 전혀 거론되지 아니하엿다.



<초의>라는 법호 명호도 ....그 불법 스승 완호가 지어준 것..그는 평생 <초의>로 불려졌을 뿐이다..

반면에 <중부>라는 자는.... 그가 정약용한테 주역을 배울 때 정약용이 지어준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중부>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



..여기서 정약용이 <중부>로 지어준 이유에 대해 ....정민 교수가 추측하는  몇 가지 사정?..



 1)현지 말대로, 주역의 <중부괘>에서 온 것..연못 위에 부는 바람처럼 온화한 기풍..

 2)중국 이백의 시문에 "<중부>라는 승려가 금릉에서 선인장차를 이백에게 선물한 것"에 비유

 3)<초의>라는 이름이 이백의 '태백호승가'에 나오는 것에 착안하여 <중부>로 그 짝을 맞춘 것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경학과 시문공부의 사승관계 여부"가 논란되고 있지만...

  그 부분은 별론으로 하고,,

...<차 제다법>에 있어 정약용을 초의의 스승으로 보는 것 같던데..... 현지의 의견은 어떠한지?
조석현  / 2013-04-19-22:31 삭제
다산은 유교를 우위에 두고 불가의 승려를 설득코자 한 것 같고

초의는 독자성을 잃지 않고 차나 불가를 이어 가고

혜장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방황했던 같네... 안타까운 이는 혜장일세



초의가 다산으로부터 차를 배웠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데

초의측 다인들은 펄펄 뛰지 ~~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깝네



누구로부터 영향이나 가르침을 받지 않는

獨覺이 얼마나 있겠나?

다산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이 왜 펄펄 뛸 일일까?

팔십노인도 세살바기에게도 배우는데...

아버지뻘되는 다산에게 배우는게~~외려 자랑스런운 일 아닐까?

배운다음 충분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크게 이루니.



초의의 차는 스스로 계속 연마되어 일가를 이루지 않는가?

동다의 다도 확립은 물론이고 차박사가 되어 차를 보급하였으니

그 공은 널리 평가되는 것이 맞다 생각되네.



다산이 초의를 비롯해 차가 나는 남도에 와

차 만드는 법을 새로이 알려주고 다인을 만들었으니

다산의 공 또한 크고.
조석현  / 2013-04-19-22:53 삭제
《Re》박형상 님 ,

돌고도는 세상 어디가 처음이고 무엇이 큰 것일까?

다 사람이 나누고 지어 부르는 것이겠지.



그러나 양,음을 나누고 가름짓고

수로 표상하니 상수철학이 태동되고

온 우주 역시 모든 수로 그 상(象)을 나타내니



양의 대표는 一이 아닌 九, 음의 대표는 十이 아닌 六입니다.

그 원형으로 처음도 끝도 없는 시간에서

(마치 둥근 시계가 처음도 끝도 없는 것 같이)



상을 나타내는 숫자의 셈은 一부터 하니

양의 처음이 一인 것 같으나(이것은 겉으로 그 양을 나타내는 것)

양의 마지막인 九를 그 처음으로 삼고

(그래서 가장 컸던 양은 점점 작어져 中을 거쳐 음으로 가겠지 : 역수원리)



음은 그 마지막이 十같은데

양이 가장 큰 九에서 시작하듯 

그 시작을 음이 가장 큰 六에서 시작하여

음이 줄고 양이 많아져 가는 것이라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음과 양의 순환이 6에서 9로, 9에서 6으로 돌고

1~5가 배제되는 부분에 의문이 생깁니다.

생수와 성수의 문제인데

우리의 실 물질세계는 6에서 출발하고

후천세계도 6에서 출발합니다.

6은 가장 강한 水의 기운, 조화의 기운이고

중앙입니다. 천부경의 수도 그 중앙은 아마 6이 차지할 것입니다.



사실 1부터 5까지는 하늘의, 천상의 수이며

이 우주의 생성을 나타내는 수이지만



6은 이 지구의 탄생과 생명의 탄생 그리고 

바햐흐로 인간의 탄생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곤책수의 대표요 땅의 수요 坤의 수입니다.
조석현  / 2013-04-19-23:49 삭제
6이 어미라면 7은 아비인데 참 신기한 놈으로 재주가 많고

8은 아이가 되겠네. 그녀석이 가장 크게 자라면 인격이 완성된 9가 되겠고

9는 성인의 경지요 양의 극이며, 보이는 물질세계와 문명, 문화의 극이니

81수(8+1=9)요, 나머지 19는 보려해도 볼 수 없네



본문에 표현하듯 건책수 216과 곤책수 144는 모두 9에 걸리니

216도 9요(2+1+6=9),144도 9이네(1+4+4)



그리고  건책수를 이루는 81+72+63도 다 단수화하면 9+9+9이고

합하면 18인데 이것도 단수화하면 9네

곤책수 144=54+36+27+18+9이고 이것도 9로 단수화할 수 있어

9+9+9+9+9=45, 45도 최종 단수화는 9이네



216 + 144 = 360 

360은 정역, 정원의 수..... 근데 360도 단수화하면 9

건책수에 곤책수를 빼도 마지막은 9 (216-144=72, 7+2=9)



왜 하필 9일까?

하늘도 땅도 9로 완성되어 진화되는 프로그램일테니



우리네 지구 곤책수 144는

예언서에 말하듯 一四四 全田之數라

이땅의 인간의 문명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늘문명에 72궁이 부족하니...........

(지구밖 하늘문명을 이룩한 어느별에는

반드시 36궁의 하늘궁전이 둘은 있을테니

그 곳이 바라 인간세에서 얘기하는 천국일 것이라)



세상의 아무리 많은 수도

0~9안에 다 들어가니

(십진법은 그 자체가 우주의 모습이라 나는 본다)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셈하다 발견했다하더라도

 그 열 손가락 자체가 이 우주의 작품일테니...)



사실 음양 오행도 우리 두 손과 손가락으로 하면 척척 맞다.



모든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 0 (無)에서 나오고

모든 보이는 시계는 1(一)에서 나툰다.



012345678987654321로 세계는 돌아가고

이 숫자가 비밀의 열쇠가 되고

빛알갱이 숫자 1로 모든 것을 나타내고 통일하고

표현한다니 놀랍다.



0을 완전히 알면 보이지 않는 비물질의 세계를 알고

1을 완전히 알면 보이는 물질 세계 전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완전이론, 만물이론(TOE),  金尺이

아 우리 동방 우리나라에서 태동되고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 금척은 우리의 마음도 잴 수 있고

온 우주도 잴 수 있고 힉스입자도 중성미자도 다 잴 수 있는

빛알갱이 하나라는데....



이 온 우주,파장 모두가 다름아닌 이들 숫자의 조합이며

비율이며 율려이니 그 파장의 공명은 아름다운 음악이요

우리 친구들 마음이 맞아 즐거울 때

내 마음의 숫자와 벗의 마음의 숫자 마음이

1에서 9까지의 자연수도 만나 공명이 이루어짐이리라



숫자도 세상도 진리도 원래는 간결할 뿐

(모르는 자는 말이 길고, 모르는 수학자의 산식이 길고

소숫점이 많이 나오는 해는 틀리지 쉽상이다)



조물주가 처음 만들 때 1,2,3으로 쉽게 만들었다.

엄청 쉽게 우주와 생명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모르니 엄청 복잡해졌다.

복잡한 것은 모른는 것. 



머리속이 복잡하면 아프다. 왜?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생명의 원리를 벗어났기에...

불행하다.

단순하면 건강하고 행복하다.

왜? 자연과 같고 창조 원리를 따르고 있기에

진리는 간결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진정한 삶도 그저 1, 2, 3일 뿐

만약 우리가 1, 2, 3을 제대로 알면 더 이상 배울 게 무언가?



그런데 우리는 생명인 사람이니 3까지는 알아야....

그리고 생수인 4와 5의 비밀을 알면

드디어 6을 탄생시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보네



그런데 우리 우주라고 부르는 물질세계의 전우주가

겨우 4%밖에 안된다하니

미지의 흑세계, 암흑에너지의 세계는 그 얼마나 큰가?

숫자로는 0의 세계, 무의 세계...

의식으로는 무의식의 세계...



그런데 그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그 세계도

바로 우리의 세계속에 있다보네

우리가 신 또는 영의 세계로 부르거나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과학으로는 도저히 파악이 안되는...

그런데 분명해 보이는 것은

우리의 세계가 빙산의 일각이듯

수면 아래의 빙산

의식을 있게 한 뿌리 무의식

이 세계를 있게 한 보이지 않는 세계이며

이 세계는 작고 유한하며

그 무한의 바다인 보이지 않는 세계로 돌아가며

다시 거품처럼 수면에 떠 오를 지도 모르고

허나 그 모든 것을 합쳐 하나로 다 같고

그저 변할 뿐

부증불감(不增不減) 여여(如如)하여...

다 합치면 늘 같을 뿐

등가(等價)의 세계일 뿐



결국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것은 결국 같다"
박형상  / 2013-04-22-09:19 삭제
ㅡ이왕에 정약용에 관련한 <구증구폭> 논란도 좀 설명해주시게나....



ㅡ과연 현실적으로 구증구폭이 가능할까? 

그 9라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라네..



ㅡ좀 엉뚱한 생각이지만..동백잎의 구증구폭이라면 어떠할지?
조석현  / 2013-04-22-23:46 삭제
구증구포(수삼을 쪄서 홈삼을 만들고 구증구포로 한 것을 흑삼이라한다는데~~~

약성이 좋다고 떠드나 (타져서)탄소가 더 나왔다고하는데............................

...............그 탄소는 분명 해로울테니 뭐든지 과하면 문제 아닐까?)



실제 차를 만드는 사람들 얘기론 구증구포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군~~

그리고 그것도 찐 떡차를 만드는 증청법에 쓰던 구증구포법을

현재의 덖음차 제조시 솥에서 덖고 말리는 것으로 구증구포를 운운하는 것은 

알고나 하는 얘기인 지?아니면 속이는 것인 지?

[요즘의 덖음차나 찐차 제조는 덖고{찌고} 말리는 것을 서너 번 하는데,

이것은 구증구포(여러번 찌고 볕에 말리는)와는 제조공정 자체가 다르다]



다산은 마과회통이라는 홍역 치료 의서를 저술할만큼 한의에도 조예가 있었던 터

한약재의 약성을 증강시키기 위해 구증구포의 방법을 알고 있었고

이를 차에 적용한 듯~~



다산은 자신의 체증 치료를 위해 차를 많이 마셨는데

당시에는 기름진 음식이 적고 채식이 많아

차의 강한 냉성을 약하게 하고 향과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구증구포의 방법을 썼다 보여집니다.



상지 얘기대로 구증구포라 해서 꼭 아홉번이 아니고

"여러 번" 이 맞겠고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서찰에서는 "삼증삼쇄"(세번 찌고 세번 볕에 말려)라 하니

스스로도 아홉이란 숫자는 버리고 있네



"모름지기 세번 찌고 세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할 걸세

또 반드시 동 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만든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 있다네"



이유원(1814-1888)도 <호남사종>이라는 시에서 다산이 승려에게 구증구포의 법을 가르치고, 우전차로 보이차에 못지 않다고 하고  <죽로차>라는 시에서는  보림사 죽로차가 다산의 구증구포의 차라고 하였다.



다산의 황차(黃茶)는 정차(丁茶), 남차(南茶) 보림백모차나 만물차,죽로차 등 이름으로 남도 여러 지역으로 많이 전파되었다.(이는 다산의 차의 제법이 우수하고 편리하여 이를 많이 받아들인 것으로도 이해된다.)



중국이나 우리 일반의 떡차가 찐다음 찻잎을 절구에 넣어 찧거나 곱게 갈아 틀에 넣어

고형차를 만드는데, 다산의 황차는 구증구포식으로 여러번 찌고 말려 맷돌에 곱게 갈아

가루를 만들고 그 가루를 반죽하여 작은 형태의 고형차를 만드는 방법이다.



옛 고형차가 마실 때마다 맷돌로 간다든가 하는 불편함이 있고

약성을 부드럽게 하는 정제과정(구증구포)이 없어 

(당시의 사람들에게)차의 약성이 너무 강했다.

{지금은 잎차를 마시니 희석이 많아 저절로 차의 치우친 강한 약성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약용으로 떡차나 가루차를 통채로 마시는 당시의 차음용법엔

다산의 구증구포제법은 매우 유용하고 합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차의 강한 약[독]성을 강하게 느끼는 간단한 방법.

우린 차가 아닌 차를 잎에 넣고 한번 씹어 보자

아마 혀가 "아~르~" 독성이 느껴질 것이다.



특히 냉성이 강한 사람은

차를 뜨겁게 우려 마시자.

(냉차도 많이 마시면 배앟이를 할 수 있다)



다산의 구증구포 황차는 이미 곱게 갈아진 차를 떡차로 만든 것이라서

마실 때 찻물에 바로 풀어 마실 수 있었다.[편리함]

물론 차의 약성도 부드럽게 하였고 [차의 부작용 감쇄효과]

맛도 부드러웠으리라.[기호식품화~~]



요즈음에 음식이든 어떤 것도

만들 때는 복잡하고 불편해도

마실 때나 먹을 때 즉 소비자가 편해야 하는데

다산은 이미 차를 제법을 바꿔 현대식 취향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우전차로 최고급차였고

작은 단차(떡차)로 만들어 [간편 편리성]

하나씩 끓여,마시기 좋았다.

청태전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중국에서 비롯된 단차나 후발효차도

다산에 오면 한국식으로 東茶가 되고

차의 부작용을 크게 감쇄시키는 새로운 구증구포의 우리나라 제법이 가미되어

간편하게 하나씩 꺼내 마시기 편리하고 우수한 한국의 남차가 된다.



여기서 다산의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실학정신이 돋보인다.



- 상지~~

동백잎의 구증구포는 한 번 해 보이소.

찻잎보다 좀 더 두꺼운 녀석이라 버틸 지도 모르겠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