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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ㅡ정약용과 '良友樂(1)'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4/15 09:18 조회수: 325

ㅡ정약용과 '良友樂(1)'







-먼저 '친구,벗'을 표현한 정약용의 시어들을 살펴보자.

千載友(천년우),佳友,美友,熱友, 豪俠友, 尙友,須友, 契心友.平生友..

曹朋, 親朋, 舊朋, 友朋,,朋知,,.......金蘭...

知音,知己,相知,........同心,,..故人....

絶絃,.......晩交如膠漆.



그리고 拙友와 朋淫, 

'친구를 파는 賣友'도 있었다.



  '良友樂'

서울에 올라온 정약용(1762~1836)은 '良友樂'을 말하였다.

좋은 친구와 사귀는 즐거움이다.



-오래 전에 서울로 오려 했던건 / 久欲就京城

살림집 마련하자 한 게 아니니 / 非爲居室營

좋은 벗의 즐거움이 있지 않으면 / 不有良友樂

그 어찌 깊은 정을 풀 수 있으리 / 何以暢幽情

(-임인년 중춘, 체천정사, 1782년,2월)





'親朋'이라는 말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친구들은 변하거나 떠나버렸다.

또한 그의 강진 유배생활이 길어지면서 그 친구들은 멀어져 갔다.

15인 엘리트로 구성된 죽란시사 모임도 있었지만,

"臨賀에 변치 않는 친구는 '이주신과 윤무구' 두 사람 뿐이다"고 한탄하였다.

난초와 쑥을 구별하지 못햇다고 후회하였다.



 강진 유배지에서 契心友로 '보리자 윤서유' 

그리고 십년 아래 '혜장 스님'이 있었다.



 1818년,18년 오랜 유배를 마치고 돌아왔다.

무구(윤지눌,1762~1815)'는 이미 떠나 버렸고, 

'남고(윤지범,1752~1821)''주신(이유수,1758~1822)는 곧 바로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이제는 노년의 친구들 뿐.

다시 '良友樂'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준 情깊은 고향 친구들,

초천의 주변 마을에 사는 친구들이 있었다. 

백운봉을 함께 오르고 용문사에 함께 갔다.

겨울이면 강 건너 마을에서 꽁꽁 언 한강 얼음위를 걸어 정약용을 찾아왓다.



 그리고 뜻과 말이 통하던 친구들.

강진 초당으로 먼저 찾아와주어 알게 되었던, 문산 이재의(1772~1839)

유배 전부터 알고 지내온 평생 친구, 송옹(외심) 윤영희(1761~1828)

(정약용은 그가 죽자 '絶絃'을 말하였다)

강 건너편에 살고 있던 학문과 토론의 친구, 석천 신작(1760~1828)

인근 양근에 살고있던 여씨 형제들, 여동근(1768~ ?), 여동식(1774~1829)



 이하, '벗'에 관련된 정약용 시문을 모아본다.



 ㅡ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

옛날 두공부(杜工部, 두보)가 이곳저곳으로 떠돌며 곤궁하게 지낼 때에, 

옛 친구들을 생각하여 팔애시(八哀詩)를 지어 그 쓰라리고 슬프며 감개(感慨)한 정을 읊었는데, 

천년 뒤에 그 시를 읽어보아도 읽는 이에게 처량하고 쓰라림을 일으키게 해준다. 

친구들 중에는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난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 이 시에 힘입어 영구히 전해지게 되어 역사책에 기록되고 

종정(鍾鼎)에 새겨진 것보다 도리어 나은 점이 있으니 

문사(文詞)를 소홀하게 여길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杜工部야말로 친구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나는 유락(流落)된 이래로 친교(親交)가 모두 끊어지고 사람들이 이미 헌신짝처럼 버렸으니 

그들에 대한 나의 情도 그로 인하여 역시 소원해져서 날로 멀어지고 날로 잊혀져 간다. 

다만 풍상(風霜) 이전에 따라 다니면서 즐겁게 노닐던 흔적이 역력하여 

눈에 선하고 반짝반짝 마음에 떠오르곤 한다. 

늘 그때 했던 일을 주워 모으고 그때 했던 말들을 기록하여 

그때의 풍채(風采)와 기상(氣像)을 방불하게나마 상상해 보고 싶지만, 

시상(詩想)이 막혀 마음속에서만 뱅뱅거릴 뿐이었다.



금년 여름에 다산에서 病을 고치느라 글 쓰는 일이 뜸하기에 

비단 몇 폭을 찢어내어 손이 가는 대로 두서없이 기록했는데, 

뒷날 시상(詩想)이 확 트이게 되면 이것을 근거하여 시를 지어서 두보(杜甫)를 모방하려 한다. 

그것이 비록 영구히 전해지게 되리라고는 감히 바랄 수 없지마는 

옛 친구를 생각하며 혼자서 그 깊은 情을 펼치는 데 있어서는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마침 학포(學圃)가 곁에 있기에 그에게 주어 돌아가서 제 兄에게 주게 하였다. 



 

ㅡ의란. 벗을 찬미하는 뜻이다........1795년 7월26일 이전

[猗蘭 美友人也]



쭉쭉 뻗은 난초 줄기 / 蘭兮猗兮

저 산비탈 자라는데 / 生彼中陂

아름답다 우리 벗 / 友兮洵美

德을 지켜 반듯하다 / 秉德不頗

딴 벗 어찌 없으랴만 / 豈無他好

그대 생각 많고말고 / 念子實多



쭉쭉 뻗은 난초 줄기 / 蘭兮猗兮

저 언덕에 자라는데 / 生彼中丘

지금 세상 보통 사람 / 凡今之人

지조 너무 빨리 변해 / 不其疾渝

그대 생각 잊지 못해 / 念子不忘

이내 가슴 안절부절 / 中心是猶



쭉쭉 뻗은 난초 줄기 / 蘭兮猗兮

저 쑥밭에 자라는데 / 生彼蓬蒿

메마르고 거친 포기 / 萎兮蓊兮

어느 누가 손질할꼬 / 誰其薅兮

그대 생각 잊지 못해 / 念子不忘

이내 가슴 애탄다오 / 中心是勞 

                ㅡ의란 3장 장 6구(猗蘭三章章六句)

[의란조(猗蘭操) : 공자가 지은 금곡(琴曲)의 이름. 공자가 위(衛) 나라로부터 노(魯) 나라에 돌아와 

향란(香蘭)을 보고는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ㅡ고시[古詩] 27수.............1801년3월 10일 이후

-제14수



벗이여 달 아래서 마시려거든 / 友欲月下飮

오늘밤 달을 놓치지 말게나 / 勿放今夜月

만약에 내일로 미룬다면 / 若復待來日

바다에서 구름이 일 것이며 / 浮雲起溟渤

또 내일로 더 미룬다면 / 若復待來日

둥근달이 이미 이지러질 거야 / 圓光已虧缺 





ㅡ자신을 비웃음 ........1801년3월 이후, 40세, 장기

[自笑]

 -제4수



浮世에 사귈 사람 몇이나 된다던가 / 浮世論交問幾人

朝市 사람 잘못 알고 情眞으로 대해서야 / 枉將朝市作情眞

국화 그림자 아래 詩 잘한다는 이름 높고 / 菊花影下詩名重

단풍나무 壇 속에선 연회가 잦은 법이지 / 楓樹壇中讌會頻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는 좋게 보고 / 驥展好看蠅附尾

개미가 기어올라도 龍은 그냥 둬둔다네 / 龍顚不禁蟻侵鱗

세상의 온갖 꼴들 웃음이 절로 나와 / 紛綸物態成孤笑

東華의 먼지 속에다 묻어두고 말자꾸나 / 一任東華暗軟塵



 

ㅡ 알지 못함........1801년 6월17일 이후

[不識]             



난초를 모르고 쑥이 좋다 하다니 / 不識蘭爲艾

아! 어쩌리 楚나라 대부여 / 嗟嗟楚大夫

세상 인심 다 빤한 것인데 / 世情都已見

지난 일들 왜 그리 어리석었던가 / 往事一何愚

'설관'도 조시(朝市)와 다를 바 없고 / 薛館元朝市

'양원' 역시 세력 찾아 모이던 곳 / 梁園亦勢途

예부터 있어온 호협한 친구들 / 古來豪俠友

오활한 선비는 그 축에 못 들지 / 未必在迂儒 (한국고전번역원)

 

[난초를 …… 대부여 : 세상이 인재를 몰라줌. 초(楚)의 삼려 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이 쓴 《이소경(離騷經)》에,

 “집집마다 쑥을 허리춤에 가득 차고 다니면서 유란(幽蘭)은 찰 것이 못 된다고 한다네.

[戶服艾以盈腰兮 謂幽蘭其不可佩]" 하였음.

[설관 : 설(薛) 나라 객관(客館). 전하여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의 객관.      

              (정민 교수 -전국시대의 '설공 맹상군의 객관'으로 본다)

[양원 : 한(漢) 나라 양 효왕(梁孝王)의 원유(苑囿). 당시 많은 빈객(賓客)들이 모이던 곳.





ㅡ'보리자'에게 주다................1803년,42세, 늦은 봄, 강진

 [贈 甫里子]



좋은 풍속 오래 전에 없어지고 / 熙俗久已敝

본심도 모두 다 잊어버렸다네 / 斲雕喪其眞

먼 시골도 그는 마찬가지여서 / 遐荒亦復然

경박하고 잘 속이고 가까이할 자 적은데 / 恌詐鮮可親

온화하고 신실한 보리자는 / 恂恂甫里子

과단성 있고 충신한 사람이야 / 果哉忠信人

여러 밤을 새며 만나 얘기해도 / 晤言屢永夕

담박하고 순후함 그것이었네 / 淡泊著其淳

저 악착스런 무리들은 / 譚彼齷齪者

질투가 입술에까지 나타나지 / 憤嫉形牙脣

기나긴 40년 세월 / 悠悠四十載

이 세상 먼지 다 마시고 살면서 / 吸盡東華塵

생각을 못했네 마음 맞는 친구가 / 不謂契心友

바로 남쪽 바닷가에 있을 줄은 / 乃在南海濱

마음에 있는 것 다 털어놓고 / 傾蓋便輸寫

묵은 친구 새 친구가 따로 있다던가 / 相知無舊新

龍門이 깊고도 넓어서 / 龍門鬱㟹嶆

일민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니 / 棲息宜逸民

우리가 함께 숨어살며 / 逝成偕隱志

늙어 죽도록 서로 이웃하세 / 終老接比隣

<주> '보리자'는 나중에 사돈을 맺는 '개보 윤서유'이다.



 

ㅡ장상사(長相思) ..............1806년 3월18일 이후

-벗을 생각하며



아침에 발을 걷어보고 / 朝褰簾

저녁에도 발을 걷어보고 / 暮褰簾

부드러운 봄구름이 푸른 맷돌 가지고 있어 / 冉冉春雲礙綠櫩

뜰에 풀만 날로 자라고 있네 / 日令庭草添



복사꽃도 뾰족 / 桃花尖

살구꽃도 뾰족 / 杏花尖

섬섬한 새벽비에 꽃망울이 터졌으니 / 舀破芳心曉雨纖

아희더러 가 만지지 말래야지 / 不敎兒去拈

                  [장상사(長相思) : 옛 사패 이름. 36자 또는 1백 자 또는 103자로 되어 있음. 《詞律 卷2》 





ㅡ홀만(忽漫).................1809년 2월15일 이후  



홀연히 꽃을 보니 눈물이 수건 적시네 / 忽漫看花淚滿巾

10년 전에만 해도 조정에 있던 신하였는데 / 十年前是內朝臣

봄 얼음에 호랑이 꼬리 마음 놓을 곳이 없고 / 春氷虎尾無安土

비바람에 닭이 울면 먼 곳 사람 그립다네 / 風雨鷄鳴憶遠人

知己 만나려면 단지(秪) 泉下에나 가야 있고 / 知己秪應泉下有

꿈이면 자주자주 집 찾아 돌아간다네 / 還家猶向夢中頻

벽오동 그늘 아래 틈만 나면 기대 누워 / 碧梧陰下頻婆側

주고받던 옛 얘기를 호젓이 더듬는다네 / 記把張陳話宿塵

           ㅡ소릉(少陵)이 언젠가 말하기를 “어느 간사한 무리가 나를 사가려면 천 냥은 걸 것이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럼 아무는 팔려면 오백 냥은 받을 수 있을까?” 하고서, 서로 쳐다보고 껄걸 웃었다  



 

ㅡ봄날 백련사에 가 놀다........1809년 2월15일 이후

[春日 游 白蓮寺]



구름조각이 닦아냈는지 바다하늘 활짝 맑고 / 片片晴雲拭瘴天

냉이밭에 나비들도 하얗게 훨훨 나는데 / 薺田蝴蝶白翩翩

우연히 집 뒤의 나무꾼 길을 따라 / 偶從屋後樵蘇路

드디어 들 머리 보리밭을 지나왔네 / 遂過原頭穬麥田

바다끝에서 봄 만나니 나도 이제 늙나보다 / 窮海逢春知老至

외진 마을 벗이 없어 중이 좋은 걸 알았다네 / 荒村無友覺僧賢

때로 먼 산 바라보던 '도연명' 생각이 나서 / 且尋陶令流觀意

한두 편 山經을 놓고 중과 함께 얘기했네 / 與說山經一二篇





ㅡ다시 백련사에서 놀다...........1809년 2월15일 이후

[再游 白蓮寺]



지팡이 끝에 딸그락딱딱 소리 내는 돌무더기 / 筇枝鏗戛石叢叢

오솔길 가로질러 소매 가득 부는 바람 / 徑路斜吹滿袖風

꾸부정한 물가 샘은 홈대 속을 흘러내리고 / 曲碕泉出連筒內

어지러운 대밭 속으로 小院의 문이 났네 / 小院門開亂竹中

수저에 감긴 물파래 푸르러서 그냥 좋고 / 水髮繞匙憐滑緣

장막에 비친 동백꽃 아직 몇 송이 남았어라 / 山茶照帳惜殘紅

너희들은 벗이 있어 참으로 부럽구나 / 汝曹有友眞堪羨

易東을 묻는 사람 지금은 세상에 없단다 / 今世無人問易東

덧글 ()

박형상  / 2013-04-15-09:27 삭제
정약용은 한참 잘 나가는 친구를 熱友라고 말하였고, 

그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가까운 친구를 팔아먹은 賣友를 질타하고 있더군요...



그가 사용한 <良友樂>이란 말, 너무 멋진 표현입니다.
김원배  / 2013-04-15-10:34 삭제
좋은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나이들수록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좋은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만나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뛰고

바라보는 것에 만족해야하는 그런 사람보다는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더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길을 걸을 때 옷깃 스칠것이 염려되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걸어야하는 사람보다는



 

어깨에 손 하나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더 간절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커서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서 

자신을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만드는 사람보다는





자신과 비록 어울리지 않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더 간절할 때가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때문에 가슴이 답답해 지고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도 상처받으며 아파할까봐



 

차라리 혼자 삼키며 말없이 웃음만 건네 주어야하는

 



사람보다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더 절실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차마 입을 벌린다는 것이 

흉이 될까봐 염려되어 식사는 커녕 물 한 방울 맘껏

 



마실 수 없는 그런 사람보다는 괴로울 때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사람 밤새껏 주정을 해도

 



다음 날 웃으며 편하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어쩜 나이 들수록 비위 맞추고 사는게 버거워





내 속내를 맘 편히 털어놓고 받아주는

친구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형상  / 2013-04-15-12:49 삭제
《Re》김원배 님 ,

ㅡ공감이 갑니다만 ,,혹 여자 친구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데 여자 친구는 좋은 친구가 되기 어렵다는 말도 있는 것 같습디다...
조석현  / 2013-04-17-13:55 삭제
의란은 시경을 읽는 듯합니다.

아마도 다산이 시경을 읽는 기분으로 지었다 봅니다.



백련사에서 봄날 노는 시가 지어진 연대 1809년 2월 15일 이후의 근거가 알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백련사에서 아암을 처음 만나는 1805년 을축년으로 봅니다.



그리고 다시 백련사를 찾는 데

역동(易東) 즉 우리나라에서 주역을 묻는 혜장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데

1811년 40세 나이에 열반에 든 아암 혜장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면

1811년 이후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석현  / 2013-04-17-14:07 삭제
다산과 아암의 스토리에 접하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다산이 쓴 묘비명에 보면 아암은 불같은 성격에 주역 등 유학에 탐닉

불가에 귀의한 것을 후회하는 듯 한데....

(술을 먹으면 무단히(無端兮) 부질없이(夫質業是)...라는 말을 많이 한 모양인데.)



다산과 주역을 논한 뒤.....

실의에 뻐져 시와 술에 탐닉, 결국 술병을 얻어 죽은 것으로 봅니다.

다산이 문제를 던진 뒤....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더군요.



이 문제는 졸고 '역리로 본 다도'에 논했는데

다산이 던진 문제는 주역을 정확히 이해하면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특히 정역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이를 계기로 불가입문을 후회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니 안타깝습니다.
박형상  / 2013-04-20-10:25 삭제
《Re》조석현 님 ,

....ㅡ맞습니다 ..다산은 '시경'에 심취하였고....종종 '시경 풍'의 4언시를 썼습니다.

      또한 그는 '시경강의 시경강의보'를 남겻지요..그는 '시경'의 전문가도 됩니다.



  또한 대략 2500수의 시가 남아있는데, ...전형적인 5언 7언, 절구 율시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고, 

 그는 '4언시 예찬론'도 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절구 율시의 제약에서 벗어난, '장편 고시, 연작시'를 많이 썼습니다.
박형상  / 2013-04-20-10:39 삭제
《Re》조석현 님 ,

....다산 정약용의 시는 대략적으로나마..그 연대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1822년회갑이 되던해 그의 시문을 정리하고 자찬묘지명을 쓰던 때 까지는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일부는 편철이 잘못 되어있기도 하고..후반기 시는 그 작시시점이 불명이기는 하나..

    ..대부분은 그 어린 시절부터 쭈욱~ 배열되어 잇습니다..



    그 점에서 정약용은 마치 난중일기를 남긴 이순신처럼 그는 기록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마치 일기를 쓰듯 시를 썼으며 그 중간중간에 그 날짜를 부기해 두엇습니다.



 이에 정약용의 '작시 날짜에 관한 연구서'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 정약용의 인생과 생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연구서에는 연담 유일의 사망시점을 착각한데서 다산이 연담유일을 강진에서 직접 만난 것으로 정리한 실수 등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자ㄹ 정리되어 있습니다.



ㅡ정약용은 ...혜장이 백련사에 머물고 있던 때는 물론이고.... 그가 백련사를 떠난 후에도.... 

또한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겨가 백련사 이웃이 된 뒤로는....

 혜장의 거취에 관계없이... 매년 봄이면 백련사에 자주 놀러 갔습니다.



 앞의 백련사 시는.... 정약용의 시문집 시 배열에 있어..

.1809년 2월15일로 부기해둔 '매화3수'시 뒤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 무렵 시점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형상  / 2013-04-20-10:51 삭제
《Re》조석현 님 ,

..,어쨋거나 <易東>을 혜장으로 추정하는 현지의 생각도 일리는 있어 보이는군요..

   그간의 대부분 번역은 "조선에서의 독자적 易, 또는 역학"으로 옮기는 것 같습니다.

굳이 사람으로 찍어본다면 그 易東은 <정약용 자신>을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정약용은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조선사람의 역',

.중국의 역을 넘어서는 새로운 체계라고 그는 생각했고....

.....나는 그런 정약용의 주역연구 성과를 <丁易>이라 부르고 있네만....

....그런 易東을 연구햇음에도 그 당시 자신의 생각을 알아줄,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할 사람이 없었다는 

....정도 아닐련지요.....



..아..그리고...정약용의 시문에 나타나는 "금세에는 없다"라는 표현이 깔고 있는 뜻은

..."다음 세상에 ..백세 후면...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겟지"라는 전망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약용이 그런 뜻을 살려 만든 자호가 기다릴 사俟, <사암,俟菴>이고요....
박형상  / 2013-04-20-11:04 삭제
《Re》조석현 님 ,

ㅡ그렇습니다..어찌보면 다산이 혜장의 죽음에 일조를 햇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혜장의 그런 허망한 죽음, 그에 앞서 정약용을 만난 혜장의 일탈 때문에..

그 나중에 초의가 정약용을 만나 경학을 배우게되자....

대둔사에서는 초의가 정약용을 만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차단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의는 처음에는 정약용에게 정중하게 그 배움을 청하고 제자가 될 마음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사제인연을 맺지못햇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반면에....정민 교수는 초의를 정약용의 '손때 묻은 제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ㅡ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면..혜장, 초의 두 분 다 똑똑하긴 하지만...그 심성과 정서에 있어..

...<혜장>..성격이 급하고 불같고 솔직담백하면서도..과시하고 강자에게 바로 도전하는 스타일...

....<초의>..성격이 차분하고 ..전체 조직을 생각하고..강자 앞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는 스타일...

.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 <초의>는 대둔사 단청을 직접 입힐 정도...에다가 ...그림에 취미가 있었는데...

  <혜장>은 술..술..술..뿐이었던 것 같아요...스님이라지만...

  정약용과의 만남에 관계없이 기질적으로 너무 업장과 한이 많았던 분? 처음부터 유자가 되어야할 사람?

그래서 정약용은 그 첫 만남 이후 계속하여 혜장에게 "겸손하라'"謙光"을 말하며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었고...
박형상  / 2013-04-22-12:18 삭제
ㅡㅡ또 <혜장>은 정약용의 10년 아래이지만.....그래서 친구, 술 친구도 될 수 있었지만...



<초의>는 정약용의 둘째 아들과 같은 아들 뻘이어서.....

 실제로 초의는 정약용의 두 아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엿다.

정약용의 입장에서도 오히려 더 조심스럽고...더 가까이 부르거나 끌어안지 못햇을지도..
송기병  / 2013-04-22-16:11 삭제
《Re》박형상 님 ,

자네글 '정약용과 이학규'에서도 밝혔지만 자네에겐 刎頸交가 몇이나 있으신가?
박형상  / 2013-04-22-18:23 삭제
《Re》송기병 님 ,

ㅡ그 부분이 영 자신이 없습니다...

그 휼륭하신 다산 정약용 선생님도 .."임하에 나를 배반하지 아니한 친구는 둘뿐이라네"..라고 한탄했는데..

그보다 훨씬 못한 저는 도대체 어떻겠습니까? 흑~흑~
송기병  / 2013-04-22-20:06 삭제
《Re》박형상 님 ,

오호 통재라!

나의 글 '親舊'에서도 旣 밝힌 바 있지만, 난 刎頸交가 몇 있다네. ㅎ (약올리는 거 아임)
박형상  / 2013-04-22-23:10 삭제
ㅡ거 ..고흥 초딩 칭구들? ㅋ ㅋ..부럽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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