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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ㅡ정약용과 '약초(1)'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3/31 11:32 조회수: 280

ㅡ정약용과 '약초(1)'







정약용이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음은 널리 알려져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임상의(臨床醫)'보다는 '의서 저술가'로 판단된다.

특히 '홍역과 천연두' 분야에 그 관심이 컸다.

'痘疹,痘瘡'의 전문가로 시작하였다.



 그 자신이 어릴 때부터 크게 앓았으며, 그 아홉 자식 중 여섯을 질병으로 잃었던데서

그 부분 관심이 아주 컸었다.

1786년경에는 전국적으로 홍역 피해가 심대하였다.

왕궁 왕세자도 걸렸으며, 정조 임금은 전국적으로 方書를 모아 올리도록 명하였다.

조선 후기에 있어 홍역과 천연두의 피해는 일상적 재해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1797년경 이래 곡산부사 시절에 홍역에 관한 <麻科會通>을 저술한다.

그런데 <마과회통>은 정약용 개인의 순수한 연구 성과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서 57종'과  '조선의서 6종'을 종합하여 취사 선별한 것이다. 

그래서 책 이름도 <會通>으로 삼고있다.

박학다식한 그의 特長인 '총합,분류,재평가,체계화'라는 통섭적 자질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정약용은 '규영부'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많은 醫書를 섭렵할 기회가 있었다.

당색 파벌에 밀려 비록 '규장각 각신'은 못 되었지만 

정조의 특별 배려로 '규영부 교서' 지위만으로 규장각 내의 많은 도서를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그 규영부 체험이 강진 유배지의 저술 작업에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마과회통>은 총8편으로 구성된다.

'원증편,인증편,변사편,자이편,아속편,오견편,합제편,본초편'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속(我俗)편'은 우리의 전래적 의료습속에 대한 평가를,

'오견(吾見)편'은 정약용의 개인적 의견을 개진한 부분이다.



 그런데 <마과회통>에는 '本草편' 내용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그는 애초 '본초편'을 기술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해 두었다.



"藥의 성질은 차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며, 부족하면 補하고 남는 것은 瀉하며 毒은 평정한다.

原書들은 너무도 산만하여 쉽게 볼 수가 없으므로 치료법중 주된 것을 가려 현혹됨이 없게 하였으니

 '본초편'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정작 그 '본초편' 본문 내용이 빠져 있는 것이다.

 이에 학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편집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아마 '본초편', 즉 '약초편'을 그 당시에 바로 완성하지 않았을(또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곡산부사라는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시기라서 그 저술 작업에 한계도 있었을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약용의 기술 태도와 저술 철학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해 본다.



 왜냐하면 정약용의 글을 보면, 그 역시 '藥草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입장인데,

아무리 박학다식한 천재 정약용이라한들 '약초에 관한 현실적 체험'이 없다는 한계에 직면했을 것.

다종다지한 약초를 직접 채취하고, 만져보고, 말려보고, 직접 사용 조제해 보는 경험이 없이,

또한 개별 약재의 藥性에 관한 임상적 지식이 없이, 그냥 글로만 평면적으로 나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몇 권 책지식으로 약초를 논단함은 주먹구구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약용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 원서에 나오는 약초와 우리 약초의 약성 구별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약용은 그 '약재의 색인화 작업'을 뒤로 미루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촌병혹치 序>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恨스러운 것은, 간략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널리 고찰해야 하는데, 

뽑아 적은 책이 수십 권에 그쳤다는 점이다. 

그러나 훗날 내가 다행히 귀양에서 풀려 돌아가게 되면 이 범례를 따라서 널리 고찰할 것이니, 

그때는 ‘혹(或)’이라는 이름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그때 이미 처방과 약재간의 괴리현상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의 대학을 갓나온, 일부 젊은 한의사들도 그런 지적을 받는 것 같다.

'의술과 처방에 관한 이론 지식'이 아니라, '약재 자체에 관한 분변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하, 정약용의 글을 소개한다.

본초,약초에 기반을 둔 처방,의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정약용이기에 남길 수 있는 명언이다.



"本草가 어두워지자 의술이 정밀하지 못하게 되었다"

"醫家에 藥草가 있는 것은 문장가에 문장이 있는 것과 같다"





ㅡ의설(醫說)



 옛날 의학(醫學)은 '본초(本草)'를 전문으로 습득하였다. 

때문에 모든 초목의 성(性)ㆍ기(氣)ㆍ독(毒)ㆍ변(變)의 법제를 강구하여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病에 대해 藥을 쓸 때 혹 병의 원인이 한 가지뿐이어서 '단 1性 단 1毒'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한 재료를 사용하고, 혹은 病의 원인이 많아서 얽히고설켜서 풀기 어려운 것은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조제해서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기술도 정밀하고 효력도 빨랐는데, 후세에는 '本草'를 익히지 아니하고 오로지 옛 처방만 왼다. 



예를 들면 팔미탕(八味湯)은 온보(溫補)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승기탕(承氣湯)은 양사(凉瀉)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서 곧장 전방(全方)을 뽑아 사용하기를 마치 한 가지 재료 사용하는 것처럼 하니, 어떻게 일일이 病에 적중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다. 

“小學이 폐하여지자 文章이 일어나지 않고, 본초(本草)가 어두워지자 의술(醫術)이 정밀하지 못하다.”

 



ㅡ촌병혹치 序 (村病或治 序)



내가 장기(長鬐)에 온 지 수개월 만에 내 자식이 의서(醫書) 수십 권과 약초(藥草) 한 상자를 부쳐왔다. 

謫所에 서적이 전혀 없으므로 이 책만을 볼 수밖에 없었고, 병이 들었을 때도 결국 이 약으로 치료하였다.



하루는 관인(館人 객관을 지키고 손님 접대를 하는 사람)의 아들이 청하기를, 

“장기(長鬐)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어도 효험이 없으면 체념하고 죽어갈 뿐입니다.

공(公)은 어찌하여 공이 보신 의서로 이 궁벽한 고장에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까.”하기에, 

나는, “좋다. 내가 네 말을 따라 의서를 만들겠다.”하였다.



이에 그 의서 중에서 비교적 간편한 여러 처방을 뽑아 기록하고, 

겸하여《본초(本草)》에서 주치(主治)의 약재를 가려 뽑아서 해당 각 병목(病目)의 끝에 붙였으며 

보조 약재로서 4~5품에 해당되는 것은 기록하지 않았고, 

먼 곳에서 생산되거나 희귀한 약품으로서 시골 사람들이 그 이름을 모르는 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책은 모두가 40여 장이니 간략하다고 하겠으며, 이를 이름하여《촌병혹치(村病或治)》라 하였다.

‘촌(村)’이란 비속(鄙俗)하게 여긴 것이고, ‘혹(或)’이라 한 것은 의심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잘만 쓰면 또한 인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 

藥材의 성질과 기운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차고 더운 약을 뒤섞어 나열함으로써 이쪽과 저쪽이 서로 모순되어 효험을 보지 못하는 세상의 일반적인 의서와 비교하면 도리어 더 우수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藥을 이미 간략하게 반드시 주된 처방만을 가렸으니, 그 효과를 얻는 것이 전일하고 빠르지 않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간략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널리 고찰해야 하는데, 

뽑아 적은 책이 수십 권에 그쳤다는 점이다. 그러나 훗날 내가 다행히 귀양에서 풀려 돌아가게 되면 이 범례를 따라서 널리 고찰할 것이니, 그때는 ‘혹(或)’이라는 이름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상편(上編)은 주병(酒病 술병)으로 끝마감하고, 하편(下編)은 색병(色病 여색에 관한 병)으로 끝마감하였으니, 또한 세상을 깨우치고 건강을 보호하는 나의 깊은 의미를 붙인 것이다. 

 

 

ㅡ몽학의휘 서(蒙學義彙 序)



옛날 복암(伏菴 李基讓) 李子가 대교(碓橋)의 우사(寓舍)에서 소갈병(消渴病)이 들어 

의원도 치료하지 못하였다. 



내가 가서 위로하고, 

이어서 그가 복용하고 있는 여러 가지 처방을 보고 고하기를, 



“의가(醫家)에 藥草가 있는 것은 문장가(文章家)에 문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의술을 가진 이는 藥草의 뿌리 하나하나마다 약성(藥性)을 분변하여 그 병에 알맞게 사용하였는데, 

후세에는 만들어진 처방을 가지고 전체의 병에 쓰고 있으니, 의술이 이 때문에 떨어지게 됩니다. 

옛날 문장을 하는 이는 글자 하나하나마다 뜻을 분변하여 사리에 맞게 문장을 구사하였는데, 

후세에는 이루어진 글귀를 외어다가 그 전체를 표절하니, 이 때문에 문장이 예전만 못한 것입니다.”

했더니, 



복암이 베개를 기대고 신음하다가, 홀연히 몸을 일으켜 꿇어앉아 용모를 가다듬고, 

내 손을 잡고는 큰소리로 말하기를, 



“어찌 이다지도 이치에 맞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내 가슴이 시원하여 청량산(淸涼散) 한 첩보다 낫네.”하였다. 

마침내 서로 떠들고 농담하고 웃고 즐기는데, 담론(談論)의 소재가 각가지로 나오고, 

시문(詩文) 얘기가 이리저리 끊임없이 이어지니, 온 방안이 엄숙하여졌다...............(후략)

덧글 ()

허주회  / 2013-04-04-09:37 삭제
의학과 토목 건축에도 조예가 깊은 팔방미인 애민사상가 실학자 정약용이 고리타분한 이황보다도 저평가돼서 그런지  화폐의 인물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황이나 신사임당을 빼고 정약용으로 교체해야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박형상  / 2013-04-05-08:42 삭제
ㅡ 10만원권이라도 만들면 혹?



ㅡ그런 계보학도 필요한 것 같아요......세종- 충무공- 정약용 - 안중근



ㅡ그런데 정약용이 팔방미인이 된 까닭은 그 개인적으로 훌륭한 자질도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규장각(규영부)근무 경험이 결정적인 것 같다는 게 내 의견이라네..

거기엔 정조가 중국에서 수입해온 전문서적을 비롯하여 이십만 도서가 있었다하네..

..남다르게 똑똑한 천재가 전문 책자들을 마음껏 섭렵할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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