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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약용과 '처녀풍,소금비'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1/20 17:48 조회수: 326

ㅡ정약용과 '處女風,염우부' 



 

-정약용은 1800년 8월에 발생한 사건을  그 10여년이 지나서 따로 정리해 두었다.

그가 유배를 가기 전에 이미 발생했던 사건의 전말과 그 10년 후일담을 기록해 둔 것이다.

왕조실록에서는 이른바 '정시경 역모 사건'이라 불려졌던 사건이다.

'유배를 가기 전에 들은 이야기'와 '유배살이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가 합쳐진 것이겠다.



거기에 정약용의 새로운 造語, '처녀풍(處女風)'이 등장한다.

'소금비(鹽雨)'를 몰고오는 '처녀풍',

'처녀풍'이 불면 '소금비'가 내린다.

"고금도 장씨 女에 대한 紀事"에 나온다.



 일부 학자들은 "고금도 장씨女 紀事"를 지목하여 정조 독살설을 정약용이 바로 믿은 양 주장한다.

별 객관적 증거도 없이 소문으로 떠도는 독살설을 함부로 믿고서 그런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금도 장씨 딸 紀事"에서 정약용 그 자신이 정조 독살설을 직접 주장한 바는 없다.



 (그런 독살설을 정약용이 과연 믿었는지 여부는 별도로 논해야 할 문제이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인동장씨 사건'이 정조 독살설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려고 "인동장씨 딸 紀事"를 일부러 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조 독살설을 말하려 했으면 정약용은 좀 더 다른 이야기 방법을 취햇을 것이다)



 "고금도 장씨딸(女) 紀事"를 통하여 정약용이 직접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억울함'일 것이다.

가해자 노론 벽파의 횡포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던, 피해자 인동장씨 일가의 억울함이었다.

그 상징 지시어가 바로 강진 앞바다에 분다는 '처녀풍'이다.

그 바람은 원한, 원망의 귀신 바람이다.

왕조실록은 '장시경 역모'사건으로 규정하였지만 정약용의 생각은 전혀 달랏다.



 정약용은 그 '고금도 장씨 처자'가 유배온 전말을 소개하면서 '처녀풍'을 말햇다.

그러면서 자신이 "염우부(鹽雨賦)"를 따로 짓게된 연유를 말해 놓았다.

'처녀풍'이 불면 '소금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소금비'는 '처녀풍' 때문에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금도 장씨女 紀事"는 "염우부"와 한 세트로 읽어야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본다.

그 장씨女 기사를 통하여 정약용이 더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그 장씨 처자의 죽음을 보면서 그 자신의 억울함을 상기한 것은 아닐까?

그 처녀풍이 불어 올때면 정약용의 가슴에도 소금이 뿌려진 듯 쓰라리지 않았을까?

그 무렵은 유배 10년째의 정약용의 억울함도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작도 억울했지만 다시 기약없이 길어지고만 정약용의 유배살이.



 다시 정리해본다,

그 인동장씨 집안 사건은 이미 1800년 8월경에 있었다.

정약용은 고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1801년 봄에 잡혀와 유배살이를 시작했다.

그 역모 사건으로 고금도로 유배온 처자들은 1809년에 다시 억울하게 죽었다.

그럼에도 지방관들의 비리와 협잡에 그 억울함도 다시 덮어지고 말았다.

그 억울함과 원한 때문이었을까?

그 다음해,1810년에 강진 바다에는 '처녀풍'이 불어오고 '소금비'가 내렸다.

그 '소금비'를 보게된 정약용은 1810년 7월28일에 "염우부"를 지었다.



정약용은 그 "염우부"에서 '권선징악의 懲勸'의 천리를 말하였다.

'인과응보, 천명(天命)'도 말하였다.

'둔세무민,遯世无悶'을 다짐했다.



 한편, 1810년에는 유배 10년째 정약용에게도 그 억울함이 더 커진 사건이 있었다.

아들 정학연이 격쟁을 울려 풀려나는가 싶더니, 그 악당들의 반대 상소로 다시 막히고 만 것이다.

1810년 9월의 일이었다. 

도대체 정약용의 유배살이의 끝은 언제라는 말인가?



그 다음해,1811년에도 강진 바다에는 '처녀풍'이 불었으며 '염우, 소금비'가 내렸다.

1811년 7월 28일에 이르러 정약용은 드디어 "고금도 장씨女 紀事"를 완성했다.



 내 의견이다.

아마 '그 장씨女 紀事'를 쓸 때 정약용, 그 자신의 억울함도 함께 말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장씨 집안과 장씨 처자의 억울함이 바로 정약용의 억울함이었다.

오히려 그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려고 그 "장씨女 紀事"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 인동 장씨 사건은 애초 조직적인 역모 사건이 전혀 아니었다. 

지방의 유력가문과 현지 부사사이에 일어난 감정적 충돌이 엉뚱하게 둔갑하고 말앗다.

그들 인동장씨는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직손들이엇다.

그 등장 인물들, '장윤혁,장시경,장현경'은 직계 3대이다.

당색은 '남인'이었다.



 정약용은 '손자 장현경'을 중심인물로 기술했지만, 그 사건 핵심당사자는 '아버지 장시경'이다.

그 사건의 시작은 단순했고, 우발적이었다.

정조가 6월28일에 승하한 후 '공제(한달간의 애도기간)'가 지나지도 않았으니 물론 '인산(因山)' 전 시점이엇다.

그런데도 노론출신,인동부사 이갑회는 그 부친 생신연을 하면서 기생을 부르고 술 잔치를 벌엿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패륜이고 불법적인 행동이었다. 

영남 남인들을 자극하는 행동이었다.



이에 인동장씨 장시경이 그 생신잔치 초청에 불응 불참하면서 질책조로 몇마디 던졌다.

그 몇 마디가 그만 불쏘시개가 되고 말았다.

그간에도 장시경에 사감(私感)을 품어온 이갑회는 그 이전에 장시경이 가볍게 발설한 정조 독살설을 되살려냇다.

(부사 이갑회는 장시경과 인척관계에도 있었으나 인동장씨 위세에 그간 불만이 많았다)



장시경이 이갑회의 부친에게 발설했었던 정조 독살설을 빙자하여 장씨 집안을 역도집단으로 내몰았다. 

이른바 역도 진압에 따른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장시경'과 그 동생 장시욱은 현장에서 사망햇다.

할아버지 '장윤혁'은 대구 감영으로 잡혀와 죽었다.

정약용이 망명인으로 언급한 손자 '장현광'은 그 7년후에 함경도 경원에서 잡혀 대구감영에서 처형되었다.

한마디로 인동 장씨 장윤혁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멸문지화에 이르럿다.



 장윤혁과 그 세 아들,장손자가 다 죽었다.

장씨집안의 남은 처자들은 이곳저곳으로 유배되엇다.

그런 처자 12명중에 7명이 강진 고금도로 쫒겨왔다.

장시경의 처자 2명, 장시경의 동생인 장시호의 처자 5명 합 7명이었다.

그 장시호의 처자 5명에 바로 '고금도 장씨 女 기사'에 나오는 '물에 빠져 죽는 모녀'가 해당한다.



"고금도 장씨女 紀事"를 표면적으로 보면, '지방관 비리 고발 기사'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들의 직무 비리와 해태를 지적하며, 그 지방관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적시하였다.

정약용의 '목민관' 모델에 한참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한편, 紀事에 등장하는 일부 인물의 이름에 오류가 있다한다.

당시 경상 감사는 '신기'가 아니라, 노론 출신 '김이영(金履永,1755~1845)'이다.

그 사건은 '심환지'가 직접 지휘, 관여하였다. 

紀事에 나오는 '時相'이 바로 '심환지'이다.



노론 벽파는 그 사건을 '제2 무신란(이인좌 난)'으로 규정하고서 신속 강력하게 진압해 버렸다.

이른바 정조 독설설의 확산은 차단되고, 노론 벽파의 정권은 단단히 굳혀졌다.

그 사건 이후로 '영남 남인'은 꽁꽁 얼어붙었고, '기호 남인 채당,신서파'는 척결되었다.



 한가지 더 생각해본다.

정약용은 "고금도 장씨딸 紀事"에서 그 날짜 7월28일을 거듭 반복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7월 28일은 정조 임금의 승하일 6월 28일로부터 한달째가 되는 날이다.



강진의 정약용은 매년 6월 28일 무렵이면 정조 임금을 틀림없이 회상했을 터.

정조는 정약용의 '군부'이자 '사부'이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멘토이다.



결국 그 7월 28일경의 '처녀풍'과 '소금비'에는 '세 억울함'이 뭉쳐있을 것 같다,.

정조 임금의 회한, 정약용 자신의 원통함, 인동장씨 집안과 장씨 딸의 억울함이다.

(정조 경우는 꼭 정조 독살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급서하고만 회한이 한없이 깊을 것이다)



 그렇게 정약용이 '처녀풍'을 말하고 '염우부'를 쓴 덕분이라도 되는 것일까?

'천명'을 묵묵히 믿고, '분노'를 삭히고, '둔세무민,遯世而无悶'한 결과일까?



 정약용은 1818년 가을, 57세에 그래도 살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인동장씨 집안사건은 1859년에 재심리되어 1861년에 신원되었다.

정약용이 '그 장씨女 紀事'에서 표명햇던 문맥 그대로이다.

인동장씨 사건이 역모가 아니었음을 조정 스스로 공식적으로 번복한 것이다.



 여기서 한 인간을 기억해보자.

그 "고금도 장씨딸 기사"에는 '10살된 사내아이'가 등장하고 있다. 

푸른 바다에 빠져 죽은 어머니의 막내 아들,죽은 큰 딸의 막내 동생이다.

사건 당시 대구 감영 감옥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어린 아이 '장석규 (1800~1861)가 마침내 살아 석방되어 줄기차게 그 신원 운동에 매달렸다.

그 시대엔 왜 그리 억울한 사람이 많았는지..

장석규의 평생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을 것.

눈물이 난다.



 작은 의문은 계속 남는다.

그 장석규는 정약용이 쓴 "고금도 장씨女 紀事"를 그 생전에 보기나 했을까?

그 장석규는 '강진 다산초당의 남인 유배객 정약용'을 알기나 했을까?

혹 강진 땅 강진 바닷가에서 서로 만나보기나 했을까?

장석규는 정약용의 1818년 해배 소식을 듣긴 들었을까?

정약용은 '그 장씨집안 모녀 사연'를 어떻게 알고 누구한테 들었을까?

장석규는 나중에 정약용의 소내 고향에도 가 보았을까?



 정약용이 남긴 한편 글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200년전 그때와 오늘은 또 얼마나 달라졌다는 것일까?

강진 바다에 이제는 '그 처녀풍'이 그쳤을까?

'그 소금비'를 맞는 사람은 더 없는 것일까?



 

ㅡ고금도(古今島) 장씨(張氏) 딸에 대한 紀事............1811년 7월28일



고금도(古今島)는 옛날의 고이도(皐夷島)이다. 

장씨(張氏) 딸은 망명인(亡命人) 장현경(張玄慶)의 혈족(血族)이다. 

장현경은 본래 인동인(仁同人)으로서 여헌(旅軒) 張先生 張顯光의 봉사손(奉祀孫)이다. 



가경(嘉慶) 경신년(1800, 순조 즉위년) 여름에 우리 정종대왕께서 돌아가셨는데, 

인동 부사(仁同府使) 이갑회(李甲會)가 공제(公除 국왕이나 왕비가 선왕의 상사에 이일역월(以日易月)로 복을 벗는 것)가 끝나기 며칠 전에 그 아버지 생일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녀(妓女)를 불렀다. 



그리고 장현경의 부자(父子)에게 함께 와서 놀기를 청하니, 현경의 아버지가 그에게 답하기를, 

“공제(公除)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잔치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고, 나가서 이방(吏房)의 아전[首史]에게 말하기를, 

“국휼(國恤 국상)이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잔치하고 술을 마시는가? 때를 보아서 하라.”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현경의 아버지는 부사의 아버지와 성(姓)이 다른 친척이었으므로 자주 부중(府中)에 들어가 만나보고 전해 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장현경의 아버지가, “시상(時相)이 역의(逆醫) 심인(沈鏔)을 천거하여 그에게 독약을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 역적을 내 손으로 제거할 수 없다.”하니, 

이갑회의 아버지는 그 말에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었다.



그런데 아전이 와서 전하는 말을 듣자, 이갑회는 자기의 죄를 성토하며 모함하려는 것이라 하고 재빨리 감영으로 달려가, 장현경이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임금 측근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반역의 기미가 있다고 고(告)하였다. 

觀察使 신기(申耆 /<주>,실제 감사는 '김이영'이다)는,돌아가서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으라고 명하였다. 

갑회가 밤에 잘 훈련된 군교(軍校)와 이졸(吏卒) 2백여 명에게 횃불을 들게 하고 현경의 집을 포위하니 불빛에 밤하늘이 환하였다.

장현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랍고 두려워 무슨 변고인지도 모른 채 담장을 넘어 달아났고 

그 아우는 벼랑에 떨어져 죽었으며, 그 아버지만이 잡혔다. 갖은 방법으로 다스려도 잡히는 바가 없이 연루자가 수백 인이었으므로 체포하기 위해 사방으로 나가니 온 마을이 소란하여 모두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를 못했다. 

 

그때는 마침 가을이라 목화가 눈처럼 피었으나, 줍는 자가 없어 모두 바람에 불려서 굴러다녔다. 

조정에서는 안핵사(按覈使) 이서구(李書九)를 보내어 그 사건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수한 문서(文書)라고는 서지(筮紙) 한 장뿐이었는데, 

그 점사(占辭)에는 ‘건마(乾馬)가 서쪽으로 달아났다.’라는 말이 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또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평번(平反)하여 대부분 풀어주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장현경은 마침내 망명(亡命)하였으므로 이에 그의 처와 아들딸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귀양보냈다.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이었는데, 큰딸은 22세, 작은 딸은 14세, 사내애는 겨우 10여 세였다. 

하루는 진영(鎭營)의 군졸 하나가 술에 취하여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는 말로 그를 꾀었는데, 이 뒤로 계속하여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하였다. 



큰딸은 너무도 비분한 나머지 남몰래 항구(港口)로 나아가 조수를 바라보다가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어머니가 재빨리 그녀를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또한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7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때 작은딸이 따라 죽으려 하자 어머니가, “너는 돌아가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하였으므로, 이에 멈추고 뒤따르지 않았다.



돌아가서 보장(堡將)에게 알리니, 보장은 현(縣)에 그 말을 상신하였고,

 현감(縣監) 이건식(李健植,1739~1827)은 검시(檢屍)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윽고 수일 후 해남수군사(海南水軍使) 권탁(權逴)이 장계(狀啓)를 올려 

신지도(薪智島) 수장(守將)과 지방관인 강진현감을 아울러 파출(罷出)할 것을 청했는데, 

이는 고례(故例)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파출당하게 된 건식은 곧 아전과 의논하여 천냥(千兩)을 비장(裨將)에게 뇌물로 주었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을 현에 되돌려주고 장계는 수영(水營)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래서 관(官)은 무사하게 되었고 그 군졸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이듬해(明年) 경오년(1810, 순조10) 7월 28일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파도가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처럼 일었다.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나는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또 이듬해(又明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그 바람을 처녀풍(處女風)이라고 하였다. 

그 뒤 암행어사(暗行御史) 홍대호(洪大浩)도 그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





ㅡ염우부(鹽雨賦)..........1810년 7월28일

-한국고전번역원 역



돈장이라 경오년에 / 敦牂之歲

그 율로는 이칙,7월이요 / 夷則其律

날짜로는 경진일에 / 日維庚辰

필성이 떠오른 시각 / 頂中天畢

                   ㅡ가경(嘉慶) 경오년 7월 28일이다. 

동남방에 바람 일어 / 風發巽維

돋는 해 집어삼키며 / 爰自食日

우르릉 우당탕퉁탕 / 軯礚隱訇

거세게 몰아치더니 / 熛怒激疾

마침내 살마의 섬에서 고삐를 꼬나잡고 / 遂乃摝轡於薩摩之嶴

탐라의 물가에서 깃발 높이 올렸구나 / 褰旗於耽羅之津

온 宇宙 소란피우며 / 哤聒宇宙

온갖 鬼神 불러들여 / 號召鬼神

산과 벌판 휘몰아쳐 / 歕山欱野

돌을 찾고 뿌리 뽑자 / 蹶石擢根

물고기 미처 못 숨고 / 魚不及竄

짐승 미처 못 도망가 / 獸不及奔

천만 마리 말이 뛰듯 / 驫飍矞

빠르고도 웅장한데 / 揮霍砏磤

쇳소리 쩡쩡 북소리 둥둥 / 鏗鎗鐺鞈

눈 어지럽고 귀 깜짝 놀라 / 眩見駭聞

그리하여 바다 물결 높이 솟아 언덕이 되고 / 於是爲魁

빙빙 돌아 굴 이루며 / 盤盓成窟

쏴아쏴아 철썩철썩 / 漰湱澩灂

이리저리 몰아치니 / 漻淚淢汨

은빛 산 들쭉날쭉 봉우리가 일어나고 / 銀山岝而峯起

눈빛 지붕 겹쌓여 지평선에 솟구치네 / 雪屋嶙峋而地拔

아울러 한편으론 먹구름 뭍에 치닫고 / 則有崩雲赴陸

가랑비 허공에 뿌려 / 屑雨漫空

어두컴컴 어둡더니 / 勿罔

넘실넘실 물 불어나 / 㶖㴸鴻溶

바위 때리고 제방치며 / 批巖衝擁

골짝 채우고 산 잠겼네 / 注壑攀崧

지독할사 폭풍우 사물에 끼친 해독 보소 / 而其著物也

침끝 되어 후벼 파고 / 則鍼芒交鑽

독한 기운 흩뿌리며 / 酖毒紛洒

짠물 거품 펄펄 날고 / 䴛沫飛

소금가루 녹아 퍼져 / 粉解

무성하게 자란 초목 / 镺蔓之卉

장조림이 다 되고 / 悉成醓醢

활짝 핀 꽃봉오리 / 蓲蘛之荂

문드러진 생선 되어 / 有同鮑鮾

쪼개지고 찢어져서 / 分磔劈

김치 변해 흐늘흐늘 / 醃漬蔫腇

天地는 참담하여 빛이라곤 간 데 없고 / 天地黯慘而無光

林園은 스산하여 생기를 잃었구나 / 林園蕭索而失彩

능수버들 소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 檉松楓柙

노나무 가죽나무 박달나무 예장나무 / 櫨櫪檀樟

귤나무 유자나무 감나무 아가위나무 / 橙橘柹楟

고욤나무 대추나무 배나무 사당나무 / 梬棗梨棠

개복숭아나무 참복숭아나무 개암나무 밤나무 / 榹桃樼栗

앵두나무 매화나무 산뽕나무 들뽕나무 / 櫻梅檿桑

은부나무 산오얏나무 산앵두나무 / 隱夫薁棣

은행나무 광나무 등의 나무들이 / 平仲女貞

가지 꺾이고 잎 떨어져 / 無不嶊柯隕葉

산야에 모두 쓰러졌고 / 顚踣陵岡

갓대 조릿대 해장대 이대 솜대 왕대 등의

대나무도 / 篠簳箛箠籦籠䈽篾篔簹之竹

어지럽게 부러져서 / 交加毁折

넘어져 쳐졌을 땐 고기 가시 빽빽이 솟고 / 倒垂則魚鯁森起

날려서 굴러갈 땐 표범 털가죽 찢어진 듯 / 飄轉則豹皮㙤裂

거기에다 또 다시 양하풀 여뀌 메밀 단수수 생강 토란 부추 달랑귀 파 마늘 냉이 올매 차조기 고추 배추 개자 무후나물 등의 식물까지 / 復有蘘荷蓼蕺蔗薑芋薤䪤蔥蒜菥蓂茈蘇番椒菘芥武侯之蔬

짓무르고 녹아내려 / 麋爛銷鑠

꼬락서니 추잡구나 / 顔色穢麤

분노를 억제 누그러져 / 拗怒少息

놀란 넋이 안정되자 / 駭魂乍定

논밭 이에 쳐다보니 / 乃瞻田疇

소금물이 온통 덮쳐 / 鹹鹺彌互

빽빽하던 벼포기와 / 䆉稏稫稄

왕콩이며 검은깨들 / 荏菽苣藤

쓰러지고 뭉개져서 / 披靡委頓

사방으로 흩어졌고 / 遐擧亂迸

검은기장 피 흰차조 / 秬黍芑

모두 병이 들었는데 / 靡有不病

지렁이 떼 뒤엉키어 / 䖤蟺澩㺒

갉아먹고 흩날리고 / 連卷飄零

씨싹이 온통 터져 / 刳剔胚胎

영영 밸 수 없는데 / 永不懷孕

쓰고 짠 물 간수 같고 / 如滷

짓이겨져 수렁 되었네 / 蹂躪爲濘

바로 이때를 당하여 / 當是時也

노인 아이 모두 나와 / 旄倪並出

훌쩍훌쩍 흐흐흑 / 啜啜嗸嗸

아낙네들 가슴 헤쳐 / 婦女發胸

소리 높이 통곡하며 / 號號咷咷

이리 뛰고 저리 달려 / 騤瞿奔觸

타는 간장 바싹바싹 / 如煎如熬

하늘 기운 비참하고 / 霄漢爲之慘怛

산악 빛깔 흔들리네 / 山嶽爲之動搖

여름날에 서리 내리고 등림 숲에 불 붙었다 해도 / 雖復炎天隕霜鄧林延燒

그 재앙을 형용하긴 미진하리 / 曾未足以喩其災祆也

오호, 周나라가 성인을 의심하니 초목이 쓰러지고 / 嗚呼周疑聖而木偃

越나라에 음란이 없자 노구 재상이 獻策 바쳤네 / 越無淫而耈獻

'상서와 재앙'은 진정으로  그 행위 따라 이뤄지나니 / 固休咎其類應

스스로 애써 반성하여 권선징악 해야 하고 / 勵自省而懲勸

통명한 사람만은 天命을 알므로 / 唯達人之知命

세상에서 묻혀도 민망해하지 않는다네 / 是用遯世而无悶

 



[염우부(鹽雨賦) : 다산 49세 때인 순조 10년(1810) 7월에 강진(康津)의 유배지에서 폭풍우로 산야의 초목과 곡물이 혹독한 피해를 당한 것을 목격하고 지은 작품이다.

[돈장 : 고갑자에서 지지(地支)가 오(午)에 해당하는 해를 가리킨다.

[이칙 : 본디 악기의 고저청탁을 분별하는 12율 가운데 하나, 그 12율을 12개월에 붙였을 때 이칙이 7월에 해당한다 .

필성 :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한 별자리인데 여름철에는 새벽에 떠오르는 것으로 사료된다. 송 나라 범성대(范成大)의 《石湖集》卷16에 “필성의 별자리에 달이 있을 때 서쪽에서 바람이 일어났다네.[凡當天畢宿 風自少女起]” 하였다.

[살마의 섬 : 살마는 일본 구주(九州)의 국명으로, 곧 일본을 가리킨다.

[등림 : 신선 세계에 있다는 숲 이름이다.

[주 나라가 …… 쓰러지고 : 성인은 주공(周公) 단(旦)을 가리킨다. 무왕(武王)이 죽은 뒤에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숙부인 주공이 섭정하였는데, 성왕을 위시한 주위 사람들이 주공이 혹시 왕위를 탐내고 있지 않나 의심하자 가을에 폭풍이 불어 다 익은 곡식과 거목들이 쓰러졌다 한다. 《書經 金縢》

[월 나라에 …… 바쳤듯 :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를 공격하다 대패하여 치욕적인 항복을 한 뒤에 자기 나라로 돌아와 원수를 갚기 위해 자나깨나 쓸개를 맛보아 각오를 새롭게 하며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함으로써 힘을 기른 뒤에 결국 통쾌하게 원수를 갚았는데, 그 과정에서 범려(范蠡)와 대부 종(大夫種)의 헌신적인 계책이 크게 작용하였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사정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덧글 ()

박형상  / 2013-01-20-18:04 삭제
ㅡ너무 길지요?....대충  요령껏...건너뛰며 ........읽어주시길...

ㅡ지금은 <완도 고금도>이지요..

우리 동창 중에 완도 고금도는 출신은 없는지요?
송기병  / 2013-01-21-06:30 삭제
박 변!

하도 길어서 밤을 새워 읽었네야...ㅎ
박형상  / 2013-01-21-08:12 삭제
ㅡ송회장님 관심있을만한 <처녀풍>...인데.......건너 뛰소오.
허주회  / 2013-01-21-10:07 삭제
읽기도 힘드는데 쓰느라고 고생이 많았네.
나웅인  / 2013-01-21-10:50 삭제
아마 그해 태풍이 심하게 불었나보네.

작년 여름의 태풍에도 염우비가 내려 해남 땅끝쪽은 그 넓은 들에 벼농사가 다 망쳐지고

나무들도 말라가고 있더구만.

자신의 처지와 일화와 자연현상을 잘 표현한 다산의 지혜로움과

우리같은 무지렁이에게 자상한 설명을 해 준 박변호사에게 감사드리네.
박형상  / 2013-01-21-12:04 삭제
ㅡ쌩유..읽어주어 감사하네..

ㅡ그런데 장흥 지방쪽에선 <염우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얼른 안나는데...하긴 내가 읍쪽의 내륙 출신이라서..

...그쪽 해남 진도 쪽은 <염우>가 자꾸 있나보네그려..

...그 표현에서도 실제로 <염우>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ㅡ어쨋거나 그 시절 정약용이 "처녀풍,소금비"라고 간명하게 말해놓은 것도 나에게는 대단해 보인다네...
조석현  / 2013-01-22-05:39 삭제
그 원한, 억울함이 얼마나 컸을까?

좋지않는 자연현상이 인간이 잘못해 

특히 원한에 사무쳐 일어난다고 보는 옛 사고의 단면같네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죄가 없고

인간은 자연에게 죄를 짓는 존재...



어느 인간의 역사인들 억울함이 없겠는가만

우리가 유독 몹쓸 인간들도 많아 그 억울함이 하늘을 찌르니

그 해원상생의 키도 여기에 있다. (결자해지)

개화기 신흥종교를 일으킨 이들은 이리도 보았다 보네



어쨋든 다산, 박변 모두가 대단허이..........
박형상  / 2013-01-22-14:43 삭제
《Re》허주회 님 ,

그 글의 전체 분량의 절반은 <정약용 선생의 원문글 재인용>....인데...

정약용 선생 역시 그때 그렇게 할 말이 많으셧던 모양.....

정약용 선생은 '짧게 압축된, 절구 율시' 보다도 실제로 '장편 고시,연작시' 등이 꽤 많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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