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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녕 조씨에 관한 어떤 한시?
작성자박형상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1/10 19:55 조회수: 309

ㅡ'창녕 조씨'에 관련한 어떤 한시 해석? 







조선 시대 중종조에 '영천 申潛(1491~1554)'이 있었다. 

'시서화 3절'이었다.

고령 申씨, '신숙주'의 증손자로 당대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만 기묘사화 여진이라 할 '안처겸 옥사'에 연루되어 

1521년, 나이 30세에 장흥 땅에 유배와 무려 17년 유배살이를 했다.



어찌보면 정약용보다 더 불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약용은 1801년, 나이 39세에 18년 유배살이를 했다.



영천 신잠, 그가 장흥 유배생활을 하면서'창녕 조씨,曺輔之'란 인물을 만났다.

그때 그 '조보지'에게 준 시이다.



 ㅡ조석현 동문에게 질의드립니다.



ㅡ고령 신씨와 창녕 조씨간의 상계에 어떤 연원이 있는지요?

단지 고령과 창녕이 옛 가야 고을에 속하는 이웃 고을이란 사정만으로 

아래 시처럼 "分派自吾宗"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지요?



ㅡ또 그 '조보지'를 혹 '망기당 조한보?'로 볼 수 있는지요? 

아니면 창녕조씨 누구인지요?



燈下寫懷  贈輔之



輔之見烏次  分派自吾宗

譜系誰云遠  情懷頗自濃

身閑在田野  氣朴到羲農

笑語時相對  愁心或可悰

                     -烏次長興號

 

(졸역)曺輔之를 장흥 땅에서 보나니, 그 분파는 우리 집안에서 나왔네.

조상 계보는 비록 멀다해도, 그 정회만큼은 자못 깊고 진하다네

몸은 한가히 田野에 있다지만, 氣朴함이야 복희신농 세상과 같다네

우스개 소리로 때 맞춰 상대하니,愁心이 혹 즐거움이 되네그려



 

月夕對曺輔之 寫懷



自笑男兒事   東西未可期

冠山曾不到   吾子거能知.....거 = '言+巨' /관산 = 장흥

今夜庭前話   他年何處思

堪嗟人與地   去去每相離



(졸역) 스스로 우스워라 대장부 일, 동서를 기약하지 못한다네

장흥땅에 이전에 온 것 아닌데, 내 어찌 그대를 알았겠는가.

오늘밤은 뜰앞에서 이야기를 하나, 다른 해엔 어느 곳을 생각해야하나

안타까와라 땅에 묶인 몸, 가고 갈수록 매번 이별을 해야 하니

덧글 ()

조석현  / 2013-01-10-23:06 삭제
조한보 선조는 저희 직계인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부제학파)의 6남으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부친과 함께 영천으로 돌아가 은거, 절의를 지킨 조변웅(대사간공파 시조)의 아들 진사 망기당입니다.

경주 등지에 후손이 세거하고 있습니다.



조한보는 성균관에서 동맹휴학, 요즘으로는 학생운동하다 장형을 받고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받아,

경전과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명유가 되었다. 도교나 불교에 가까와 선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이언적과 성리학 논쟁이 유명하다.(태극무극논쟁)



그런데 조한보는 생몰년 미상이나 중종때 철학자로 1469년 진사시에 합격,1518년에 이언적과 논쟁을 하니

일단 조보지와는 동일 인물이 아니며.....



조보지는 누구인 지 알 수 없습니다.

고령은 후기가야의 맹주 대가야가 있던 곳으로

창녕 비사벌을 자신의 본관 지역 고령의  대가야의 하나의 분파로 본 듯합니다.



신라는 561년 비사벌에 창녕비를 세우며 전군지휘관회의를 하고

562년 대가야를 신라에 병합하고 맙니다.
박형상  / 2013-01-10-23:28 삭제
ㅡ예전에는 그 字를 만드는 쉬운,또 통상적인 방업은 그 이름 끝자에 之를 붙이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김인후>의 자는 <후지>이지요...그래서 조한보는 <조보지>라 불리운 것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ㅡ또 두번째 詩의 뉘앙스는 "유배를 오기 전 서울에 있을 때도 당신의 이름이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장흥에 와 보고서야 뜻밖에 당신을 마주치게 되었다"는 취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 아닌지요?



ㅡ또 조한보의 생몰연대가 불상인만큼 고향은 물론 경주쪽이더라도 혹 전국을 '유랑,유람'할 수 있는 것 아닌지요?

더구나 1519년에 이언적과 논쟁을 햇다면 영천 신잠은 1521년에 장흥에 유배를 왔고, 또한 그 시는 영천의 문집(관산록) 앞 부분에 출전하고 있기 때문에 1520년대에 두 사람이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조한보>가 꽤 장수를 하고 있어야 그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지만..두사람이 서로 만난다는게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조석현  / 2013-01-11-00:04 삭제
신잠의 연대를 중간에 언급된 다산의 연대로 착각한 것으로 정정합니다.

1521년 신잠 39세, 조한보는 1469년 진사시 합격이 20세라면 72세쯤 됩니다.



망기당 조한보와 조보지의 동일 인물 가능성은 분석한대로이겠네



그리고 조한보의 세거지가 경주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대사간공파가 경주에 많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니



조한보가 해당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네
나웅인  / 2013-01-11-10:54 삭제
두 분의 글 잘읽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녹슨 제 머리에 청량제가 되고있어 큰 자극이 됩니다.

요즘엔 도무지 책읽기가 진도가 나가지 않아 걱정입니다.

무슨 시름이 그리 많을까요?

두 분이 부럽습니다.
조석현  / 2013-01-13-21:53 삭제
《Re》박형상 님 ,

조한보가 경주에서 살았던 것은 확인되고 있습니다.

경주 강동면 호명리에 있는 호계서원이 유허이고

묘는 호명리 회룡동에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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