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창녕 조씨 조석중(曺錫中)
ㅡ조석현 동문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ㅡ자료1과 자료2의 병존을 위한 추가적인 보충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ㅡ조석중의 문집내역과 문중기록은 어떠하며, 혹 또다른 유념할만한 일화가 남아있는지요?
자료1 ㅡ "...사실 이것을 정확히 지적한 이가 조씨 선조 중에 있었으니 정조 때 이조참판 조석중(曺錫中)이시다. 조(曹)는 서일(西日)로 ‘기운 해’ 형상으로, 조(曺)는 동일(東日)의 ‘떠 오르는 해’로. 그리고 덧붙여 임금을 칭송할 때 ‘해가 떠오른 것 같다.’고 하여 은근히 조(曺)가 ‘왕’임도 드러냈다...
득성 설화에서 ‘동해신룡’과 ‘청룡’으로 표현했던 조(曺)씨의 본뜻을 정말 정확히 풀이한 대단한 선조이시다.
시조공의 사실(史實)을 정확히 파악했다. 조(曺)와 조(曹)의 혼동을 일단락 짓는다. 조(曺) 1획으로 통일하였다. 도래성(渡來姓)인 중국 성씨인 조(曹)씨와 관련이 없는 토착성(土着姓)임을 분명히 했다. 필자의 견해와 같다. 지금은 정착되어 조(曹) 2획은 쓰지 않는다.."
자료2ㅡ (승정원 일기에 관한 글에서 인용) ㅡ".....또한 [일기]의 정확성과 객관성은 애매한 사안을 판정하는 데도 중요하게 기여했다. 창녕 조씨의 성씨 표기는 그런 흥미로운 사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 성씨는 중국(曹)과 달리 획수가 하나인 한자(曺)로 표기하고 있다. 그 계기는 정조 24년(1800) 4월 13일의 결정이었다.
그날 정조는 동부승지 조석중(曺錫中)에게 그 성씨의 획수가 통일되지 않은 까닭을 물었고,
조석중은 원래 한 획이었지만 자신의 6대조인 조한영(曺漢英) 때부터 두 획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조는 '두 획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6대 밖에 되지 않았으니 오래 전부터 써온 대로 한 획으로 표기하라'고 지시했다. 이 기사는, 앞서 지적한 대로 당시의 국왕이 매우 특수한 문제까지 처결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결정에 따라 그 성씨의 표기가 통일되었다는 측면에서 [일기]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ㅡ조석현 동문의 글을 즐겁게 읽다가
나름 반가운 '조석중'이란 인물에 다시 접하게 되었다.
조석중(曺錫中).
정약용 당대의 엇비슷한 나이의 엘리트이다.
정약용(1762~1836), 1783년 소과 합격, 1789년 식년시 문과 갑과(장원) .
조석중(1763~1816). 1789년 소과 합격(진사시 수석), 1794년 庭試 문과 병과
조석중이 정약용에 비하여 그 과거 합격이 늦으나, 조석중은 진사시 수석 합격자이다.
예전 과거 시험은 그 변수가 많아 곧바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소과(사마시) 대과(문과)의 상관성을 따지기도 어렵다.
문과 장원 합격자가 재상이 되는 경우도 그 통계를 보면 퍽 드물다.
돌이키면, '우암 송시열'은 소과 합격자에 불과했고, '퇴계 이황'은 대과 합격이 꽤 늦었다.
'율곡 이이' 같은 시험 천재들이야 분명 따로 있는 것이지만, 그 과거 성적이 그 인간의 전부는 아니었다.
정약용도 그 대과 합격이 자꾸 늦어진데서 그 내심의 기준으로 상처를 입었다.
이제 그만 소과에 만족하기로 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아예 고향 초천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그와 같은 나이의 노론 시파 '윤행임'은 벌써 20세에 대과 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훗날 1801년 신유사옥 여파로 노론 벽파한테 몰려 사사당하고 만다)
정약용을 내내 물먹였던 서용보는 '18세 소과,대과 동년 합격자'인데, 그는 기실 영조 장인의 손자였다.
그런 서용보를 놓고 '소년 등과자라서 공부가 안되어 있다'고 정조 임금이 핀잔을 주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 무렵은 '노론벌열 경화사족'의 자식 하나쯤은 이른 나이에 대과 합격을 사실상 보장받던 때였다.
바꾸어말하면, 한미한 집안이나 시골 출신이 대과에 합격한다는 것 자체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조석중'은 다소 늦은 합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소양은 탄탄하여 '초계문신,적간사관,홍문록,' 등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거쳐갔다.
정조 임금과 대면하여 그 의견을 주고받는 '경사강의'에도 참여하였다.
당색에 있어 '남인'은 아니었고, 범 노론계, 또는 '노론 시파' 계열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남공철과 그 정치적 노선을 함께 하였다.
정약용과의 인연도 있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에도 '조석중' 이름이 언급된다.
정약용이 규영부 교서로 근무할 때 조석중 등과 함께 '화성정리통고' 저술 작업을 함께 하였다.
요즘말로 정조가 공을 들인 수원 화성 신도시 건셜에 관한 '수원성 백서'를 함께 만든 것이다.
그런 공로를 정조한테 평가받아 정약용이 평생 영예스럽게 회고하는 '을묘년 부용정 賞花釣魚 잔치'에
'규장각 각신이 못되는 정약용과 조석중 등'은 함께 초대받는다.
정약용은 '전 승지' 직함이고 조석중은 '부사직'이었다.
(정약용은 그때 정조에게 혼자 불려나와 정조가 보는 앞에서 직접 시문을 쓰는 영광을 입는다)
또한 정조 임금이 승하한 후 찬궁을 바르던 날 정약용은 숙장문 옆에서 조석중과 함께 슬픔을 말하였다는 것이다.
조석중 (曺錫中,1763~1816)을 살펴본다.
1789년 진사시 수석
1794년 문과 병과. 초계문신, 정조와 경사강의 참여, 홍문록
1794년11월15 ㅡ 정약용이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갈 때 조석중은 '교동 강화 지역 적간사관'을 맡는다.
1795년 ㅡ정약용의 자찬묘지명ㅡ."...규영부(奎瀛府)에 들어가 이만수(李晩秀)ㆍ이가환(李家煥)ㆍ이익운(李益運)ㆍ홍인호(洪仁浩)ㆍ서준보(徐俊輔)ㆍ김근순(金近淳)ㆍ조석중(曺錫中) 등과 함께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짓게 하였는데, 용이 맡은 바가 특히 많았다...".
ㅡ을묘년 부용정 잔치에 '전 승지 정약용, 부사직 조석중'등도 참여한다.
1799년 청나라 연행 사신-서장관,
1800년 수찬
ㅡ정약용 자찬묘지명..."..그 이튿날부터 옥후(玉候 정조임금의 안후)가 편치 못하여 28일에 이르러 주상이 마침내 승하하였다. 바로 그날 밤 서리를 보내어 서적을 하사하고 존문(存問)한 것이 드디어 영결(永訣)이 되었으니, 군신(君臣)의 정의가 그날 저녁에 영원히 종결된 것이다. 용이 매양 이 일에 생각이 미칠 적마다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금할 수 없었다. 승하하던 날에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가슴을 치며 목놓아 통곡하였다. 찬궁(欑宮)을 바르던 날 숙장문(肅章門) 옆에 앉아 조석중(曺錫中)과 슬픔을 말하였다...."
1802년 5월28일 - 승정원 승지
"역적 은언군 이은의 처벌을 원하다"는 상소를 올린다.
ㅡ승정원승지 남공철(南公轍)·윤광보(尹光普)·김희순(金羲淳)·이조원(李肇源)·조석중(曹錫中)·조홍진(趙弘鎭)
1802년 통정대부, 충청 관찰사
그 이후 행적 불명 .....
1816년 타계 기록은 있는 것 같다. 여주군 대신면에 그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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