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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녕 '마실' 조(曺)씨 원류(源流)를 찾아서2
작성자조석현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1/05 17:48 조회수: 313

7. 서라벌로 가 출세(出世)한 조계룡



  옥결은 키가 훤칠하고 미남이었다. 예향이 바로 청룡병(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그의 아들 계룡도 풍모가 특이하였다. 그리고 영민하여 옥결은 계룡을 잘 기르면 공후(公侯)가 될 것이요,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다고 예언한다. 실제로 후에 부마도위 창성부원군이 되었다.



  옥결이 계룡을 낳을 때는 571년,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뒤 비사벌의 군사적 역할도 끝났다. 561년 창녕비에서는 최고의 외위인 술간(述干)까지 부여했지만 비사벌은 신라의 직접 지배로 들어갔다. 비사벌은 급격히 쇠퇴한다. 당연히 비사벌 왕자와 왕손은 비사벌에서는 희망이 없다. 따라서 옥결은 계룡의 ‘그 크기’를 보고 계룡을 서라벌로 보내기로 한다.



  옥결은 아내인 예향을 통해 한림학사인 이광옥의 천거로 당시 임금인 진평왕(眞平王:579~632)을 알현(謁見)하게 한다. 당시 성년의 나이 약 17세인 587년경 외조부 한림학사 이광옥이 진평왕에게 외손자를 추천하여 등과(登科)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진평왕은 그 인물됨을 보고 “인경(鱗卿)”이라는 자(字)를 내리고 가까이 두었다. ‘비늘 재상’이니 용의 비늘로 용의 후손을 높여 부르는 말이 된다.



  용모가 특이하고 엄정(嚴正)하였다. 용기가 있었고 언변에도 뛰어났다. 왜구를 무찌른 활약상에 잘 표현되어 있다.「왜구가 내주(萊州 : 동래)에 침범하자 왕께서 방어하라 명하였다. 이에 공은 단기(單騎)로 적진에 나아가 말고삐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타이르니 수많은 왜병들이 엎드려 절하며 “공은 천인(天人)이시다”하면서 물러갔다고 전해진다.」



  신라 삼한벽상 좌명공신(三韓壁上 佐命功臣)이셨고, 덕만공주의 남편으로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셨으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 武官), 상주국대도독(上柱國大都督)을 역임하셨고, 태자 태사(太師)이셨고, 문무왕(文武王)이 되셨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文官)를 지내셨으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셨다.



   삼한의 공신당(功臣堂) 벽 위에 새긴 (선덕여왕)임금의 즉위를 도운 좌명공신(정1품)이셨다. 왜구를 물리쳐 나라를 지킨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이셨다. 위와 같이 계룡은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였고,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음갈문왕(飮葛文王)인 문무왕(文武王)이라까지 칭하여졌다.



8. 조계룡의 배필 공주는?

  : 양가(兩家) 족보 기록의 상위(相違) 사유(事由)와 진실을 찾아서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기록은 조씨 족보와 김씨 족보(경주김씨 선원세보, 경주김씨 세보 권지일)에 동시에 기록하여 부합(符合)된다. 어머니 예향(禮香)도 경주 이씨 족보와 조씨 족보에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진평왕의 사위라면 어떤 공주와 결혼한 것일까? 정확한 기록이 없다. 



  셋째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이는 경주김씨 족보에 세 번째에 진평왕 사위로 등장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셋째 딸 선화(善花)공주는 일찍이 16세 무렵인 585년 백제로 가 무왕(서동요로 알려진 맛동)과 결혼했다. 정비(正妃) 소생 여부가 불확실하다. 정비 소생이라도 적국(敵國)으로 가버려서 서동요(薯童謠) 이외에는 왕실 족보는 물론 모든 기록 자체가 없다. ‘부마도위’인 계룡과 도저히 짝이 될 수 없다.



  또 둘째 천명(天明)공주는 김용수(김춘추 생부:용수갈문왕), 김용춘(김춘추 아버지:문흥갈문왕 추봉)과 결혼하였다. 



  첫째 덕만공주(후일 선덕여왕)의 배필은 김인평(김씨 족보 기록) 또는 음갈문왕(삼국유사 기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 ‘음’갈문왕은 ‘마실’갈문왕으로 ‘조(曺)갈문 문무왕’ ‘조계룡’을 가리킨다. 또 조씨 족보와 경주김씨 세보 권지일에도 부마도위(駙馬都尉)라 하고 있다. 정비(正妃) 소생의 선덕여왕의 남편임을을 말해주고 있다. 위(尉)는 공주[公主:정비(正妃)의 딸]나 옹주[翁主 : 후비(后妃)의 딸]에 주는 작위(爵位)다. 도위(都尉 : 조선시대는 정1품)는 위(尉:종1품~종2품)의 윗 계급이니 반드시 정비(正妃) 딸의 남편이다. 



  그런데 김씨 족보에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인평’(金仁平)이라 기록되어, 삼국유사의 ‘음갈문왕’이라는 기록과 상충되어 보인다. 지금까지 이러한 것들을 해결하지 못해서인 지 그냥 조계룡을 ‘진평왕의 사위’라고만 하여 실제 어떤 공주의 남편인 지에 대해 회피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보에서는 “왕지필음갈문왕인평갑오립치십사년”(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治十四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상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며,「인평 ? 갑오년(634년)」에 즉위하여 14년을 다스렸다.’[王之匹 飮葛文王, 仁平 甲午立 治十四年]로 새긴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3년(634년) 봄 정월에 원년을 고쳐 인평(仁平)으로 하였다.’[三年春正月, 改元 仁平]는 근거로 ‘인평’을 연호로 보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연호로 해석하는 ‘인평? 갑오립’(仁平? 甲午立)은 연호 표기로 걸맞지 않다. 통상 서기, 단기 대신에 연호를 쓴다면 ‘인평 ○년’ 등으로 써야 한다. ‘인평 갑오(634)년에 즉위’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는다. 인평이 연호가 맞다면 일연은 ‘인평 원년 갑오립’(仁平 元年 甲午立)으로 하여 ‘인평 원년 갑오년(634년)에 즉위하여’라고 썼어야 한다. [ 주 21 : 예를 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연호 연대 표기를 쓸 때 ‘원년(632년) 2월 대신 을제에게 국정을 맡기다.’(元年二月 以大臣 乙際 摠持國政)로 쓰는 것 같이, 분명하게 「○년」 방식으로 쓰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분명 연호 연대 표기가 아니다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바른 해석은『왕의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이며, 갑오년에 즉위하여 14년을 다스렸다.』[王之匹 飮葛文王 仁平, 甲午立 治十四]이다. 앞은 관직명, 뒤는 이름이다. 즉 여기서 인평은 연호가 아닌 음갈문왕의 이름이 된다.(음갈문왕 = 인평) 



  이 바른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인평’[女善德王 夫金仁平]이라는 경주김씨 족보다. 사실 왕실 족보를 만들면서 삼국유사의 왕의 배필 ‘인평(仁平)’을 따서 김씨를 붙여 ‘김인평’(金仁平)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가 통상 고려 때 후일에 만들어진 것을 보더라도 삼국유사의 기록을 정확하게 해석한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유사의 동 조항을 인용하면서도 바로 앞에 서술된 ‘음갈문왕’은 빠져있다. 또 결국 조 씨라는 타성바지가 차지한 갈음왕, 본왕을 위축시키는 ‘음갈문왕’을 김씨 족보에는 고의적으로 탈루시킨 것으로 보인다.



  왕실 족보인 경주김씨 선원세보에는 ‘진평왕의 정비인 마야부인과 승만부인, 그리고 자식대에는 ①선덕여왕과 그 남편 김인평, ②천명부인과 그 남편 김용춘, ③사위 조계룡’으로 나온다. 경주 김씨 세보 권지일에서는 ‘①선덕여왕 남편 김인평에 이어 ②사위 조계룡 하성인 태사 부마도위 창성부원군’으로 두 번 째로 나온다. 천명부인이 기록에 없다. 왕실만 나온 것이다.



  기술 순서가 공주 서열 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또 기록 순이 공주 서열 순이라면 계룡은 둘째와 셋째의 남편이 동시에 되버리고 만다. 이것은 조계룡이 진평왕의 사위라는 것을 별도로 쓴 것이지 몇 번 째 공주의 남편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선덕여왕 배필 [ 주22 : 화랑세기 필사본은 덕만공주의 남편으로 김용춘, 김용수를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김용춘, 흠반, 을제를 들고 있고 사신(私臣)이라는 기록이 있는 바, 을제(필자는 조계룡으로 추정)를 빼고는 측근의 정치적인 비서나 신하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정식 배필이라면 당연히 왕실 족보에 올랐을 것이다. 또 왕위 계승을 위해 배필로 삼았다는 주장은 그들 모두 진골이며 그 아들도 진골이 되어 설득력이 전혀 없다.]은 아무 설명없이 김인평이라 해 놓고 사위인 조계룡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로 기술했을까? 그 기록으로 인해 지금까지 김인평과 조계룡이 별도의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조계룡의 배필인 ‘공주’가 없어져 매우 난감해졌다. 



  선덕여왕의 배필로는 자신들이 신라 김씨로 사성하여 진골로 편입한 이름 ‘김인평’(金仁平)만 인정하여 아무 설명없이 간단히 기록한다. 그리고 선덕여왕 즉위 직전 조씨 성으로 다시 돌아가 조씨 시조가 된 조계룡(曺繼龍)은 진평왕의 사위로만 기록하고 선덕여왕의 배필 이름으로는 빼버린 것으로 해석된다. 



  진평왕이 다시 원래의 성을 찾아줘서 ‘조계룡’으로 하였지만 김씨 후손들은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당시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해도) 김씨 성씨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왕을 배출한 왕실 아닌가? 더구나 신라 조정의 진골(眞骨)을 부정하거나 빠져 나간 것이어서 (왕실 족보를 쓰는 입장에서)선덕여왕의 배필로 바로 쓰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마실’)음갈문왕도 빼 버린다. 갈문왕이 드러나는 것은 선덕여왕 통치의 약점이기도 하다 생각한 것일 것이다. 남존여비사상이 강해 여왕 등극도 못마땅해 하는 ‘김부식’이 기록할 리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관계없는 ‘승 일연’(一然)은 「음갈문왕 인평」을 ‘바르게’ 기록한다. 



  그렇지만 정비 소생의 공주 이외에는 왕실 족보에 싣지 않으면서 ‘사위 조계룡’은 빼놓지 않는다. 이는 조계룡이 정비 소생 공주의 사위라는 이야기이다. 또 ‘부마도위’라고 특별히 부를 수 있는 것은 덕만공주 선덕여왕 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한편, 창녕 조씨 족보에 조계룡 부인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공주라면 못 밝힐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신하의 입장에서 군신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부인을 여왕이라 적지 않는 것이리라. 부부라고 내세우기 이전에 임금과 신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계룡의 묘 윗자리에 가묘가 있다한다. 후손들이 그 가묘를 만들었다한다. 선덕여왕이라고 밝히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지금 모든 기록들을 검토하여 밝혀서 확정할 때다. 조씨 선조 중에 정조 때 조석중 이조참판이 이미 밝힌 바가 있다. 



  대신 창녕 조씨 족보에는 여왕의 남편임을 추론케 하는 ‘부마도위, 창성부원군, 문무왕’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신라 때 아버지, 형제, 남편을 봉하여 ‘갈문왕’이라 했다. ‘음갈문왕’의 기록은 없으나 창녕조씨 정언공파 휘희직파 세보에는 ‘문무왕’(文武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실제 왕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문무갈문왕’이라는 뜻이다.



  또 창녕 조씨 족보에서는 조씨 후손들이 신라에게서 사성을 받은 김씨는 쏙 빼 버린다. 따라서 김옥결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에 복속되어 어쩔 수 없이 김씨가 됐지만 지우고 싶다. 비사벌 왕족의 자존심이다. 다행히 다시 조씨를 찾으니 아예 김씨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조의 부친과 조부는 조(曺)씨를 암시한 동해(東海)니 청룡(靑龍)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사실 삼국유사에서 음갈문왕 = 인평이라면 ‘음’갈문왕 = ‘마실’갈문왕 = 조(曺 : 마실 조)갈문왕 = 조계룡 = 김인평이 된다. 조계룡 = 김인평이라면 당연이 선덕여왕의 배필이 된다.



  조계룡이 선덕여왕의 배필이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별도로 아래의 두 기록이 있다. 조석중(曺錫中 : 1763~1816)은 자신이 편찬한 창녕 조씨 지선록(昌寧曺氏知先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을 조, 이름을 계룡이라 하사하였고, 자라남에 진평왕이 장녀를 배필로 삼은 즉 선덕여주이다. 동사(東史)를 보건데 당 태종이 조서(詔書)에서 ‘선덕과 부공(夫公)이 함께 나라 일을 다스리라’ 하였으니 조서에서 부공의 성명을 말하지 않는 것이 가히 안타깝도다.”



  권근(權近 : 1352 ~ 1409)은 권근소기(權近所記)에서는 “ ~ 겨드랑이에 용조(龍曺)라는 글자가 있어 이에 성을 조, 이름을 계룡이라 하였고, 진평대왕의 딸을 상(尙)하였으니 또는 선덕여주 덕만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9. 선덕여왕을 즉위시키고 끝까지 지켜낸 조계룡



   아버지 옥결은 ‘동해신룡’ 용의 아들로 표현된다. ‘동해신룡’은 561년 창녕비에 나타난 ‘마질지술간’으로 비정(比定)된다. 555년 신라에서 비사벌에 하주(下州)와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할 때, 이미 비사벌의 왕족은 김씨 진골(眞骨)로 편입, 김씨 성을 내린 것으로 본다. 해당 기록은 없으나 가야의 김유신 등이 그랬듯 비사벌 왕족도 신라에 편입시켰을 것이다. 마질지술간으로 사실상 최고의 외위(外位)를 부여하여 우대한 점이나 후일 손자인 김인평이 진골 성분으로 성골인 덕만공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봐도 거의 100%일 것이다. 비사벌 출신 진골 김인평이 성골 김덕만과 결혼시킨 것도 파격이다. 당시 골품(骨品)사회에서 진골이 아니었다면 당현히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부터 (금관가야의 김수로처럼) 가야계 김씨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이는 득성 실화에서 ‘태어날 때부터 조 씨가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 조 씨였다 본다. (‘마실’)‘음’(飮)갈문왕으로 ‘마실’ 조(曺)씨의 훈역(訓譯)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명확하다. 왕이 사성을 내려 인정하기 전까지 조(曺)씨는 쓸 수 없었다. 이미 김씨를 사성하여 진골로 편입되었기에. 그래서 출신을 나타내는 ‘마실’을 썼다



  사실 조씨 시조 이전에 조씨는 언제 누구부터인지 기록 자체가 없다. 단지 조부인 동해신룡(東海神龍)은 이름으로 보아도 확실히 조(曺)씨였을 것이다. 먼저 동(東)자는 조(曺)씨 대신으로 쓰인 글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해’신룡은 ‘조’신룡(曺神龍)이 된다. 



  창녕 조씨 원시조는 시조의 조부까지는 확실히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 창녕 고분으로는 7대조 묘까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조부 동해(東海) 조신룡부터 부친 용[王]의 아들[龍子]인 청룡(靑龍) 조옥결까지 김신룡, 김옥결로 불리웠을 것이다. 또 진골 편입 이후에 태어나는 조계룡은 처음부터 김인평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조옥결은 신라의 이예향과 결혼했지만 김옥결로 제대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설화에서 꿈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서라벌 중앙 무대에 진출하지 않고)사라진 비사벌 왕자로 남지 않았나 싶다.(따라서 옥결의 묘까지 비사벌 교동지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아들 ‘인평’에게는 (비운의) 비사벌의 왕 마실 조의 뿌리 의식을 강하게 심어준 것 같다.



  김씨로 편입된 조씨를 다시 복원하면 조신룡(曺神龍) ⇒ 조청룡(曺靑龍) ⇒ 조계룡(曺繼龍)으로 모두 용(龍)으로 이어진다. 물의 왕 용은 조씨 가계에 왕 이상의 가통(家統)과 깊은 관련을 갖는 듯하다.



  571년 김인평을 낳고 579년 진평왕이 즉위하고 580년 경 마야부인 사이에 덕만공주를 낳는다. 자연스런 연대로 추정해 보면 진평왕은 남자 성년인 17세가 되던 587년 경 등과시켜 8년 후인 595년 경 여자 결혼 나이인 약 16세인 덕만공주와 혼인, 부마도위로 삼는다. 615년까지 김인평(45세)과 덕만공주(36세)는 5남 2녀를 둔다.



  후비 승만부인 손씨가 610년(김인평 40세)경 왕자를 낳고 덕만공주의 입지가 불완전해지나 왕자는 628년(김인평 58세) 요절한다. 이때 태사인 김인평은 손씨 소생 왕자의 스승으로 있었다. 김유신보다 24세, 김춘추보다 32세가 많은 태사 김인평은 왕족인 그들의 스승이기도 하였다한다.



  628년 이후 성골인 덕만공주의 왕위 계승작업이 본격화된다. 진평왕은 632년 죽기 직전 631년 2월 진평왕은 김인평에 비사벌가야의 왕손임을 인정하고 원래의 성씨 조씨를 복원시킨다(김인평 61세). 하여 이름도 (비사벌)왕의 후손을 잇는 ‘계룡(繼龍)’으로 한다. 이로써 잃어버렸던 조씨 성을 되찾은 것이다. 



  이때 또한 음(‘마실’)갈문왕으로 봉한다. ‘음갈문왕’에 미리 봉해 진덕만공주의 왕위계승을 원만하게 할 수 있었다 본다. 조계룡만 부마도위로 한 것을 보면 이때 부마 지위도 ‘부마도위’로 격상시켰다 여겨진다.



  당시 성골이지만 여자를 왕을 만드는데 반대가 컸다 생각된다. 그래서 남편을 ‘마실갈문왕’으로 만들어 덕만 측이 실질적인 힘을 가졌어야 했다. 신라에서 사성한 진골 김씨를 버리고 원래의 비사벌 왕족인 조씨 성을 다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계룡의 힘은 막강하였다. 



  당시 시조공은 태사공으로 손씨 왕자의 스승을 지냈었다. 따라서 승만부인 쪽의 지지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비사벌 세력은 물론이고 김춘추, 김유신의 스승으로 구 가야세력을 아우른다. 왜구를 무찌르는 공신으로 힘을 갖추고 있었다. 덕만공주의 배필로 덕만공주와 진평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음갈문왕’은 진평왕 김백정이 동생, 백반에게 준 진정(眞正)갈문왕, 국반에게 준 진안(眞安)갈문왕과 같은 예우만이 아닌 실질적으로 섭정하는 갈문왕이라 생각된다. 선지록에서 보이는 ‘부공(夫公)과 함께 다스리라’는 당 태종의 조서의 내용이나, 정식 연호를 마실갈문왕의 본명 ‘인평’을 쓴 것을 보아도 그렇다. 물론 여자 왕이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또는 당의 요청으로, 남편 연호를 써서 내세운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마실갈문왕’의 역할은 지대했을 것이다.



  631년 5월 칠숙과 석품의 반란 모의를 사전에 색출 처단한다. 632년 1월 진평왕 붕어로 선덕여왕이 등극하여 대신 을제에게 국정을 맡긴다. 634년 갑오년에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로 정식 즉위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즉위 후 ‘원년(632년) 2월 국정을 대신(大臣) 을제(乙際)에게 맡긴다.’(元年二月 以大臣 乙際 摠持國政) 보통 3년 상을 핑계 삼는다. 다른 이유가 없었을까? 



  634년에 그 원년을 고쳐 남편의 옛 이름 ‘인평’(仁平)으로 고친다했으니 당시에는 ‘다른 어떤 선덕여왕의 연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호는 기록에 없다. 잘못된 흠결로 되어 고의 누락가능성이 있다. 첫 즉위의 연호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왕이라고) 당나라가 트집 잡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시 연호를 고쳐 남자인 남편 연호를 쓸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만큼 당시 ‘첫 여왕’인 선덕왕은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보인다. 



  따라서 선덕여왕의 예지력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모란꽃 이야기나 몰래 여근곡에 숨어든 백제 병사를 잡은 이야기 등은 모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여근곡(女根谷 : 여자)에서 병사[男子]를 잡은 이야기는 여왕이 점차 여자의 핸디캡을 벗어나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여기서 ‘대신’(大臣) ‘을제’(乙際)가 누구냐? 하는 문제가 있다. 김부식은 아무 설명이 없다. ‘대신’(大臣)은 직함이 아니라 그냥 ‘큰 신하’라 막연히 적은 것이다. ‘갈문왕’ 등 특정 직위를 적지 않았다. 엄격히 말하면 갈문왕도 본왕의 신하인 만큼 ‘큰 신하’로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는 알려지다시피 사대주의자요 여자가 왕이 된 사실을 비판한 자다. 남편을 일부러 적지 않고 남편이 없는 듯 기록할 수 있다. 특정 직위를 쓰지 않고 ‘큰 신하’[大臣]로 얼버무린 것부터가 그런 의심이 들게 한다. 선덕여왕의 남편을 적지 않고 돌려 적으면서 ‘을제’(乙際)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김부식은 혹 ‘을제’(乙際)란 이름에 비밀을 숨겨놓지 않았을까? ‘을’은 뜻은 새[鳥:‘조’]이므로 ‘마실’갈문왕의 ‘조’(曺)와 음이 같다. 또 ‘을’(乙)은 ‘갑’(甲:본왕)에 이은 두 번 째를 나타내 ‘갈문왕’을 상징할 수 도 있다. 제(際)는 ‘가’로 새길 수 있으니 본왕의 ‘가’[邊] 즉 주위[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이름이 된다. 그러면 ‘을제’는 ‘조가’(曺家)로도 새길 수 있으니 참 흥미롭다. 또 가(家)는 ‘지아비’의 뜻도 있으니 그럴 경우 ‘조씨 남편’이 된다. 이 분석이 맞다면 김부식은 조갈문왕을 매우 격하(格下)시킨 것이다.



  정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을제’의 ‘제’(際)가 ‘제’(帝)의 소리만 따서 변형하여 쓴 한자로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을제’(乙帝)가 되어 두 번째 제왕 즉 ‘갈문왕’의 뜻으로 ‘다르게 쓴’ 용어가 된다. 그렇다해도 당시 갈문왕은 마실갈문왕 뿐이다.



  그리고 ‘을제’가 국정(國政)을 파(破)한 사실이 없다. 선덕여왕 붕어한 647년까지 지속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국정을 총괄할 최측근 신하가 누구란 말인가? 남편인 마실갈문왕(조계룡) 밖에 없다 여겨진다.



  그렇다면 화랑세기에서 전하는 “여왕이 되어 남편으로 ‘을제(乙際)’를 두었다”는 말은 이해된다. 즉위 전의 ‘마실갈문왕’인 조계룡은 즉위 후에는 ‘을제(乙際)’라는 이름으로 하여 계속 국정을 담당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문제의 ‘을제’는 별도의 다른 사람 이름이 아니라 ‘조(曺)갈문왕’ 대신에 쓰는 용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위 후에는 ‘갈문왕’의 용어가 사라진다. 왕이 있는 상황에서 ‘갈문왕’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뜩이나 위협받는 상황에)여자 왕으로서 권위를 세우는데 방해가 되었다 여겼지 않을까? 왕권 강화는 시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을제’라는 ‘큰 신하’의 이름으로 바뀌었을 수 있다. 여하튼 선덕여왕에게는 ‘을제’라는 ‘조씨 남편’(필자의 해석)인 조계룡이 늘 가까이 평생을 지켜주며 국정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은 647년 1월 8일에 돌아가셨다. 651년에 돌아가셨다고 통감에서 적고 있는데 이는 틀렸다.’고 적고 있다. 651년은 마실갈문왕 ‘을제’께서 돌아가신 해다. 선덕여왕이 붕어하자 조계룡이 대권을 행하다 돌아가셔서 생긴 착오가 아닌가하는 해석도 가능할 수 있겠다.



  창녕 조씨 시조 조계룡은 여러 연유로 역사적 사실들이 감추어져 온 것은 틀림없다. 각 씨족간의 이해관계나 군신관계, 남존여비 사상 등으로 왜곡되거나 탈루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여러 사료나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하면 당시 신라조정에서 존경받는 태사요, 문무를 모두 갖춘 실력자이었다. 덕만공주와 결혼하여 선덕여왕을 만드는데 중심축이었고 갈문왕으로서 을제로서 선덕여왕 재임시는 물론 사후까지도 역할을 하였다 보여진다.



10. 창녕 조씨 시조의 원류(源流)를 찾는 의미



  특이한 득성 설화를 가지고 있는 창녕 조씨의 시조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숨어있다. 당시 각 씨족들의 시조의 설화가 그렇듯. 그런데 확실하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진평왕 사위로 기록되고 누구 남편인 지 명확한 직접 기록이 없다. 그러나 여러 사료와 다른 족보 등을 연결하면 놀랍게도 잘 부합됨을 알 수 있다. 또 그렇게 각자가 그렇게 기록하는 연유(緣由)가 있음도 알 수 있다.



  많은 학자와 연구가들이 의문점을 가지고 설왕설래 하고 연구하여 베일을 벗어가고 있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좀 더 광범위하게 창녕 조씨 시조 선조들의 역사까지 고고학의 연구에 힘입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삼한의 대립과 신라 그리고 비사벌의 독자성 유지 등이 그 뿌리[씨족]가 다른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들의 사용하는 지역이나 국호 등이 그 지배자의 씨족[나중에 많은 부분이 성씨의 시조가 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마실’ 조(曺)의 분석이나 성(成)씨, 김(金)씨 등 기타 우리말에 따른 한자의 음 표기, 뜻 표기 등 다양한 분석의 틀도 이용했다. 당시의 말과 글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또 한글은 자음이 중요한 중심이고 모음은 서로 뜻이 넘나들을 수 있다. 당시의 이름이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씨족이나 지역 또는 국명이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지어지고 이어졌다. 따라서 이름을 한글로 한자로 살피고 연결 짓고 통찰하는 것이 사료(史料)와 함께 어울려 타당성을 가지고 유의성을 가져 추론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을제(乙際)를 ‘조씨 남편’으로까지 해석됨을 보여 주었다. 직접 나타내기 힘들거나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은유나 비유 또는 글자를 이용해 숨기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씨 시조공의 자(字)나 이름 그리고 선대의 이름에서 용(龍)과 동(東)자 등을 이용해 이미 조씨와 그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또 옛 선인들이 입장에 따라 불리하거나 나타내고 싶지 않는 것은 빼버리거나 모호하게 기술하였다본다. 조계룡의 정확한 배필 찾는 것이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되어 버리기도 했다.



  과연 옛 것이라, 또 자신의 선조이라서 무조건 그대로 신봉하는 것만 맞는 일일까? 지금 기록이 잘못될 수 있듯 옛 기록도 잘못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관련 자료와 사료, 증거 등을 총동원하여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고 진실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는 것보다 진실을 명확히 알고 밝히고 믿는 것이 진정으로 조상을 숭상하는 일이이라 확신한다. 



  더구나 창녕 조씨 시조공은 그들의 진골 성씨를 버렸다. 조씨로 독립하였다. 따라서 이를 못마땅해 하는 후손들이 기록을 왜곡되거나 축소 또는 생략된 부분이 많다 생각된다. 특히 진골 편입 성씨를 버리고 조씨 창성을 하였기에 선덕여왕의 남편으로 기록하기 싫었을 것이다. 



  조계룡은 마실갈문왕으로 지속적으로 정사를 총괄하여 끝까지 선덕여왕을 지켰다. 하지만 여왕 자체부터 반감을 가진 사가(史家) 김부식은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본다. 그래서 별도로 수수께끼같은 단어 ‘을제’(乙際)까지 등장된 것이 아닐까. 때문에 선덕여왕 즉위 후 조계룡은 표면상 역사의 기록에서 빠져 버리게 된다.



  창녕 조씨의 물줄기 근원(根源)을 시조공 조계룡까지로 국한하는 태도도 시정되어야 한다. 득성 설화로 적어도 2대조까지는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있다. 또 창녕의 교동 고분군을 통해 7대조까지도 묘를 추정해볼 수 있다. 비사벌과 창녕 조씨 선조의 내막은 사료와 고분군들의 발굴 자료를 잘 분석하면 상당부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창녕 조씨는 본고에서 살폈듯 서라벌국의 왕족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주(主) 고분군들의 주인이 곧 창녕 조씨 시조공의 조씨 선대(先代)이지 않는가? 불사국이나 비지국(比只國)도 비사벌과 같다 볼 때 무려 기원전 1세기까지도 조씨 씨족은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마실’ 조씨는 비사벌 지역에 토착한 마한계 토착세력일 것이라는 추론한다. 삼한과 가야, 삼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도 독자성을 잃지 않고 나라 이름을 지킨 지배세력이었다. 그리고 조씨 시조공 조계룡은 신라 조정에서 뿌리를 박고 힘을 가짐으로써 다시 조씨를 찾았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조씨는 고집스럽게 의(義)를 행하며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씨의 이런 역사를 바르게 알고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본고에서 조씨 시조공과 그 선대의 조씨 뿌리를 고찰하여 바로잡고 그 취지를 널리 선양코자하는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의 아니게 관련되는 씨족들이나 관계자들에게 지금 생각과 다른 이야기로 불편해질 수 있겠으나 이것은 전혀 본고의 의도가 아니다. 본고의 모든 추정과 사실은 현재의 자료에 의존하여 필자의 견해가 가미된 것이다.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라 본다. 언제든지 바른 증거에 의해 추정이 잘못되거나 오류가 밝혀질 경우 수정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옛 기록도 쉽게 범했던 자신의 입장 고수를 버리고 오로지 열린 시각과 바른 판단과 통찰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위한 따스한 사랑이 필요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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