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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마실'조(曺)씨 원류(源流)를 찾아서1
작성자조석현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3/01/05 17:46 조회수: 340 첨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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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마실’ 조(曺)씨 원류(源流)를 찾아서





2013.1.1

조석현(曺錫鉉)





1. ‘불의 서울’ 비사벌



  창녕 조씨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부마도위인 태사공 조계룡(曺繼龍)으로 알려져 있다. 그 득성(得姓) 설화가 참 특이하다. 설화에는 아버지 청룡(靑龍) 옥결(玉玦)과 할아버지 동해신룡(東海神龍)까지 나온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창녕 지역 지배자의 후손이다. 창녕은 당시 비사벌(比斯伐)이다. 기원전 1세기경 세워진 진한(辰韓)의 불사국(不斯國) [ 주1 :  삼국 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삼한(三韓)의 조(條) ]이었고 4세기경은 비사벌(比斯伐)로 초기 국가의 면모를 띤 것으로 보고 있다. [ 주2 : 백승옥(白承玉), 비사벌가야(比斯伐伽倻)의 형성과 국가적 성격 ]

  

  진한(辰韓) 사람들은 진(秦)에서 한족(韓族) 사회로 이주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리웠다. 낙랑(樂浪)을 거쳐 마한(馬韓)의 일시적 도움을 거쳐 계속 남하하여 진한을 형성했다한다. [ 주3 : 주보돈, 문헌상으로 본 고대사회 창녕의 향방, p.19 ]  이에 비해 변한(弁韓) 사람들은 토착세력 중심이었다 한다.



  ‘비사벌’은 (위치상)진한(辰韓) 쪽 [ 주 4 :진한과 변한은 뚜렷한 국경선으로 나눠지기보다 변진 24개국으로 포괄하듯 두 종족들이 부족국가를 이루고 서로 어울려 살았다. 그러나 통상 낙동강 이동은 진한 쪽 구역으로 분류된다.]이다. 그러나 사로국(斯盧國)에 대항 했다. 마한 연맹체 목지국(目支國) 진왕(辰王)의 통솔을 받으며 토착세력인 변한(弁韓)으로 뭉쳤다. 진한과 종족이 달랐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비사벌’이란 이름을 계속 이어오고 사로국에 대항할 만큼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신라에 편입된 이후까지도 간접지배를 받으며 독자성이 유지되었다. 이 비사벌의 국명은 신라 통일후 경덕왕(景德王 : 742~764)때까지도 사용되었다.



  삼한은 마한 54개국, 변진 24개국(진한 12개국, 변한 12개국)으로 이루어진 부족국가 형태였다 한다. 목지국 등 마한(ㅁ)은 백제로, 진한의 사로국(ㅅ)은 신라로, 변한(ㅂ)은 가야(ㄱ)로 발전한다. 



  사실 신라를 지배하던 박(朴),석(昔),김(金)에서 박(ㅂ)은 변한(ㅂ)의 토착세력이고 석(ㅅ)과 김(ㄱ)은 이주세력이다. 결국 토착세력인 변한(ㅂ)세력이 밀리고 가야(ㄱ)의 김(ㄱ : 김수로)이 신라의 김(ㄱ : 김알지)으로 지배하게 된다.



  우선 지명 또는 국명과 관련된 ㅁ계열은 ‘물’을 상징하고, ㅂ계열은 ‘불’을 상징한 것으로 보자. 또 ㅅ은 ‘솟대’요 남성이고 ‘새로 세운 것’이고, ㄱ은 ‘큰’ 여성[검 : 熊]이고 ‘갈래진 가’[邊]을 말한다.



  ㅇ은 ‘알’, ‘울’이요, 더 커진 ㅎ은 ‘한’으로 ‘하늘’을 대신한 ‘우두머리’다. 지금 국명인 한국(韓國)은 한인(ㅎ), 환웅(ㅎ), 삼한(三韓)의 우두머리 한(汗)을 이은 ㅇ이 커진 ㅎ계통의 것이다.



  우선 ㄱ계통. 고조선(왕검 ㄱ), 고구려, 가야, 고려, 코리아 등 이름이다. 가야(伽倻)는 분명 고조선, 고구려의 맥을 잇는 나라이름임을 알 수 있다. ‘가야’는 ‘가라’에서 왔다. ‘겨례’[<가라{氏族,から(kara)}<갈라,가르다]도 그렇다. ‘가라’(‘갈래’진 땅)는 ‘고을’[州], ‘골’[谷]이 된다. 옛 지명에 많이 보이는 ‘홀’(忽)도 ‘골’의 한자 차음(借音)이다. 



  금(ㄱ)관가야의 김(ㄱ)수로나 신라의 김(ㄱ)알지 모두 ㄱ계통의 ‘큼’에서 나온다. 왕(王)의 우리말인 ‘임금’도 ‘이[齒]가 큼’(>이사금>임금)에서 ‘큼’(ㄱ)의 뜻이다. 김(金)씨가 금합(金盒)에서 나왔다고 김(<金:gold)으로 쓰는 줄 안다. 그러나 사실 우리말 ‘큼’을 차음하여 한자인 ‘금’(金)으로 표시하고 ‘김’(金)으로 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ㅂ은 ‘불’[火]이다. ‘불’의 변음(變音)은 ‘벌’(나중에 들[野]의 뜻)이다. 옛 지명의 ‘부’리(夫里), ‘부’여(夫餘), ‘변’한(弁韓) 등이 다 그렇다. 성씨 ‘박’(朴)은 우리말 ‘밝’[明]을 음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혁거세나 배달겨레의 ‘배’달(<밝달)도 마찬가지다. 



  특히 창녕의 옛 이름들은 하나같이 불의 ㅂ에 걸린다. 불사국(삼국지), 비사벌(진흥왕순수비), 비자발(比自㶱 : 일본서기), 비화(火)가야(삼국유사 5가야조), 비자화(火)군(신라 757년 이전), 화(火)왕군(757~940년). 여기서 우리말 ‘불’을 한자로 음차(音借)하여 ‘불’(不), ‘비’(非) 등으로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불의 뜻 그대로 ‘화’(火)를 쓰고 있다. 



   따라서 비사벌을 ‘비’(‘불’의 변음)를 ‘빛’[光]으로 보는 통설은 더 근본적인 말밑[語源]은 ‘불’[火]로 바뀌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불은 당연히 비사벌의 진산인 화산(火山) 화왕산의 불 때문이다. 특히 비자화군(非自火郡)의 ‘자화’(自火)는 ‘스스로 불이 나니’ 화산활동을 이른 것이리라. 또 화왕산(火旺山 : 큰불뫼)의 이름을 그대로 지명에 따 화왕군(火王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현재의 이름인 창녕(昌寧:940~)은 ‘불’과 먼 듯하다. 그러나 ‘창’(昌)은 해[日]가 둘이니 ‘불이 큰 것’ 아니고 무엇인가? 또 후에 성을 쌓으니 창성(昌城)이라고 불렀다. 다른 이름인 하성(夏城)의 ‘하’(夏)도 불의 기운이 성한 계절이니 불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땅이다.



  또한 지명으로 자주 등장하는 ‘벌’ 역시 ‘불’의 변음으로 본다. 벌판에 농사를 지을 때 화전민이 그렇듯 먼저 ‘불’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면 땅은 ‘벌겋게’ 타고 ‘벌건’ 흙의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한 벌건 땅을 ‘벌판’으로 부른다. 이것에 초목이 자라면 ‘들’이 되어 농사를 짓는다. 



  여기서 ‘새’로 너른 ‘벌’에 집을 많이 지으면 큰 도읍지(都邑地) ‘새벌’이 된다. 이것이 커지니 나중에 ‘서울’(<서라벌,셔블<사벌(斯伐), 새벌)이다. 수도(首都)의 우리말 서울의 어원으로 본다. 한편 ‘시골’(< 스고을<새골)은 ‘새로 집을 지은 (벌판가의) 갈래진 고을, 골, 골짜기’가 된다. 



  ‘새’[新]의 ‘ㅅ’은 세워져 있는 글자 ㅅ의 꼴처럼 어원은 ‘솟’[立]의 뜻이다. ‘소’도의 ‘솟’대의 예처럼. 곧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어) 솟아 있으니 ‘새’ 것으로 뜻이 바뀐다. 새(ㅅ)로 이주하여 새로 세운 진(ㅅ)한, 사로국, 신라(新羅)가 그렇다.



  그래서 ‘비사벌’(불사벌>불서울)은 ‘불의 서울’의 뜻이다. 비사벌은 당시 서울 경주에 버금가는 ‘서울’이었다. 크고 화려한 고분군들이 이를 증거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창녕은 ‘불’의 지명이 강할까? 그것은 선사시대에 화산활동이 활발한 것으로 알려진 휴화산 ‘화왕산’(火旺山 : 큰불뫼)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화왕산은 억새 태우기 등 ‘불잔치’를 하는 풍습이 내려오니 ‘불’의 기운은 지금까지 내려온다. 땅이름만 보아도 화산활동이 커 큰불이 일어났던 것늘 알 수 있다. 나라가 바뀌어도 ‘불’의 뜻을 지닌 땅이름은 이어내려 왔다. 

  

2. 비사벌 불을 다스리는 물의 왕, ‘마실’ 조(曺)



  불의 기운이 센 땅 비사벌을 다스리는 지배자는 역시 물의 제왕 용(龍)이다. 실제 화왕산 분화구에도 큰 연못이 셋이 있고 샘이 아홉이 있다.[三池九泉] 물은 불을 다스리고 이로써 생명이 탄생되고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 이 삼지(三池) 연못에서 창녕 조씨 시조공이 용의 손자로 태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ㅁ은 물이 있는 땅과 관련된다. 마한과 인천지역인 미추홀에 자리잡은 비류백제가 다 그렇다. 창녕 조(曺)의 본관은 창녕, 당시의 비사벌이다. 그 중에서도 ‘마실’  [ 주5 : 당시의 비사벌 ‘마실’지역은 창녕 교동, 송현동 고분군 아래 현 창녕 시가지 일부로 비정(比定)된다. 지금도 경상도, 전라도, 충정도, 강원도, 북한까지 거의 전 지역에서 마을의 뜻으로 지금도 ‘마실’을 쓰고 있다. ‘마실간다’고 하면 마을의 이웃에 놀러 다닌다는 이야기다. 혼자 가기보다 어느 한 집에 모여 마을의 관심사를 얘기하고 즐거운 놀이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는 모임을 말한다. 단체 무리를 지어 노는 것으로 옛 ‘마실’이 무리를 지은 큰 마을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의 유습(遺習)이라 여겨진다. 여기서 마실 조(曺)와 무리 조(曺)가 상통하는 구석이 있음을 알게 한다. 또 당연히 큰 마을엔 관청(官廳)이 생기고 국읍(國邑)으로 발전하니 관청 조(曺)이기도 하다.]이다. ‘마실(ㅁㅅ)’은 지금 ‘마을’의 옛말로 볼 때는 ‘물(ㅁ)이 있는 땅에 새(ㅅ)로 세(ㅅ)운 마을’이다. 그러나 평범한 마을이 아니라 비사벌 국읍(國邑)인 ‘마실’은 ‘미르’[龍→東日→曺]가 지배하는 ‘마루’(높은)의 ‘마을’이다.



  물의 뜻인 ‘마’는 ‘마로’(높다는 ‘마루’의 옛말)로 뜻이 전이(轉移)되기도 한다. 임금을 부르는 ‘마마’의 ‘마’가 그렇다 생각된다. 그럴 경우 ‘마실’은 사실상 ‘왕’을 부르는 말도 될 수 있다. ‘마실’ 조는 바로 그런 ‘조왕(曺王)마실’이었을 것이다.

  ‘조왕마실’이 지배하는 ‘마실’(國邑인 마을)의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화왕산 아래의 현재 교동, 송현동 고분[교동 고분군]이 있는 지역의 아래 마을을 가리킨다. 사실 현재의 창녕 시가지 일부다.   



  이 ‘마실’은 선덕여왕의 배필을 ‘음갈문왕(飮葛文王)’ [ 주6 : 삼국유사 왕력보 선덕여왕조,  “왕지필 음갈문왕”(王之匹 飮葛文王) ]이라 부른 것에서도 드러난다. ‘마실’을 한자로 음차하지 않고 ‘마실’ 음(飮)의 뜻으로 쓴 이두식 표현이다. 당시 출신 지역이나 성(姓)을 앞에 썼다. 따라서 외자(外字) 음(飮)은 창녕의 ‘마실’이다. 그리고 그 ‘마실’을 지배하는 용에 해당하는 왕, 조(曺)씨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보이는 ‘음갈문왕’은 ‘마실’(‘마실’ 曺)갈문왕’으로 곧 ‘조(曺)갈문왕’이다. 갈문왕은 왕을 보좌하여 본왕을 갈음하는 ‘갈음왕’ 또는 칡[葛](ㅊ,작)+ 문[文](ㄴ,은)으로 ‘작은 왕’[小王]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비사벌을 다스리던 왕은 창녕 조씨 시조의 할아버지 동해신룡(東海神龍=曺神龍) [ 주7 :동해의 동(東 : 東日)이 곧 동쪽의 해로 조(曺)자의 파자 풀이에 해당할 때, 동해신룡은 곧 조신룡(曺神龍)이 된다.]과 그 선조(先祖)로 보인다. 창녕조씨 족보에 따르면 조계룡의 탄생이 571년이다. [ 주8 : 창녕 조씨 정언공파 위희직파 세보에는 ‘시조공 계룡이 진덕여왕 5년 서기 651년에 81세로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어 역산하면 탄신은 571년이 된다.] 할아버지는 통상 한 세대를 30년 잡으면 조신룡은 511년에 탄생된다.



  신라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무찌른 뒤 555년 비사벌에 주(州)를 설치하여 지배한다. 6년 뒤 561년에 전군 지휘관 회의를 비사벌에서 하고 창녕비를 세운다. 그리고 1년 뒤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켜 가야를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



  창녕비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42명의 신하들을 열거한 뒤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촌주(村主) 신라가 진한과 변한의 세력을 끌어들여 국(國)을 구성한 읍락(邑落)을 통일된 촌제(村制)로 정비하고 그 지역 촌주(村主)들에게는 통일된 간(干)을 부여했다.



 2명의 이름이다. 곧 혁총지술간(奕聰智述干)과 마질지술간(麻叱智述干)이다. 지(智)는 42명의 높은 지위의 신하들에게도 대부분 붙은, 높은 지위의 경상(卿相)의 호칭이다. 술간(述干)은 신라가 외위(外位) 11계급 중 2번째 계급이다. 1위는 기록 자체가 없다. 술간(述干)은 사실상 지방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직급이다. [ 주9 : 비사벌 이외에는 이렇게 높은 지위를 준 적이 없다. 과거 가야의 유력 세력인 안라(安羅) 지역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제1비에서 보이는 촌주(村主)의 외위(外位)가 5등~6등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는 창녕 고분의 유물 발굴 등으로 보면 5세기경 신라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다. 이미 신라의 간접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신라는 초기에 비사벌 지배세력을 포용하여 이용하였다. 또 대가야와 일전을 앞두고 군사상 매우 중대하였기에 사실상 최고의 신라 외위(外位) 관직을 내린 것으로 본다.



  그런데 비사벌의 촌주로 두 사람이 나란히 등장한다. 곧 비사벌에는 비등한 두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를 기록한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창녕 마실 조의 가문으로 추정한다. ‘마실’이 키워드다. 마질지술간 = 마실(飮)갈문왕 = 마실 조(曺) 등. ‘마실’이라는 우리말을 한자 소리로 그대로 ‘마질’(麻叱)로 쓰고 있다. 이 ‘마질지술간’이 다름 아닌 당시 50세 정도 [ 주10 : 조계룡의 탄신이 571년이고 1세대를 약 30년 잡으면 조부는 511년경이므로 561년 창녕비 건립시 약 50세가 된다.]인 조계룡의 조부 ‘동해신룡’(東海神龍=曺神龍)이라 여겨진다. ‘조신룡’을 조씨 문중의 족보나 득성 설화에서는 ‘동해신룡’이라 부르고, 신라 조정에서는 ‘마질지술간’으로 부른 것이다. 



  5세기 이전에 신라는 비사벌을 복속 [ 주11 :  555년엔 주(州)를 설치하였으니 그 이전에 복속시켰을 것이고 이미 5세기경 고분에도 강하게 신라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나타난다.]시키고 적어도 창녕비 이전에그 지역 지배자는 ‘진골’(眞骨)로 편입하여 ‘김씨’ 성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 주12 : 금관가야 왕족 출신 김유신에게도 신라의 진골(眞骨)로 편입하고, 이곳 비사벌 왕족도 진골(眞骨) 편입을 한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술간이라는 높은 직위를 부여한 것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미 진골로 편입되어 김씨가 된 이상 ‘조’씨로 직접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마실’이라 부르고 비사벌에서는 ‘동해’(東海)로 불렀다 여겨진다. 



  자존심이 강한 비사벌 왕족. 김씨 성을 받았으나 자체적으로는 ‘김신룡’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조신룡’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조(曺)와 같은 뜻인 동(東)을 써서 ‘동해신룡(東海神龍)’으로 표시한 것으로 본다.



  동해의 ‘동’(東)은 ‘해[日]가 떠 오르는 곳’. ‘조(曺:東日)의 상징’이다. 용은 ‘마실’(ㅁ)의 ‘마로’[높은] ‘미르’[龍]다. 곧 ‘왕’(王)이다. 원래 우리말 ‘마실’의 큰 물(ㅁ)의 용(王:미르:ㅁ)을 동쪽의 해[王]의 뜻으로 한자로 조(曺:東日)를 쓴 것으로 본다.  해[日] 또한 ‘왕’의 상징이다.



  이렇게 득성 설화를 기록한 이는 ‘동해신룡’이라 써서 당시 상황에 문제없도록 하면서 ‘비사벌의 왕’ 임을 글자 속에 숨기고 있다. 그의 아들 옥결(玉玦)을 청룡(靑龍)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靑)은 푸른색[東方色]이고 목(木)이고 방위는 동(東)이다. 또 동(東)자를 파자(破字)풀이하면 ‘해[日]가 동쪽에서 떠오르면서 나무[木]에 걸리는 모습’[木+日=東]이다. 또 왕[龍]을 다시 이어받으니 시조는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부른다.



  용(龍)이 곧 조(曺)임을 보여주는 것은 시조의 협하(脅下)에 ‘용조’(龍曺)로 새겨져있다는 말이다. ‘마실 큰물의 주인’은 미르[龍]이고 용(龍)은 곧 조(曺)임을 보여준다.



  조(曺)는 우리말을 그대로 음차한 것이 아니다. 마실의 뜻을 취해 조(ㅈ)로 썼으므로 ㅅ계통으로 보지 않고 마실의 ㅁ계통으로 해석한다. 필자는 우리나라 마한(ㅁ) 계통의 ‘마실’(ㅁ)로써 토착 세력으로 보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굳이 조(曺)씨 1획을 고집하는 것도 이 ‘왕의 후손’임을 나타내고자하는 근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을 모른 채 후손들이 그냥 그렇게 대대로 내려 왔지만. 



  사실 이것을 정확히 지적한 이가 조씨 선조 중에 있었으니 정조 때 이조참판 조석중(曺錫中)이시다. 조(曹)는 서일(西日)로 ‘기운 해’ 형상으로, 조(曺)는 동일(東日)의 ‘떠 오르는 해’로. 그리고 덧붙여 임금을 칭송할 때 ‘해가 떠오른 것 같다.’고 하여 은근히 조(曺)가 ‘왕’임도 드러냈다. 



  득성 설화에서 ‘동해신룡’과 ‘청룡’으로 표현했던 조(曺)씨의 본뜻을 정말 정확히 풀이한 대단한 선조이시다. 시조공의 사실(史實)을 정확히 파악했다. 조(曺)와 조(曹)의 혼동을 일단락 짓는다. 조(曺) 1획으로 통일하였다. 도래성(渡來姓)인 중국 성씨인 조(曹)씨와 관련이 없는 토착성(土着姓)임을 분명히 했다. 필자의 견해와 같다. 지금은 정착되어 조(曹) 2획은 쓰지 않는다. 



  신라 조정에서는 당시 본관 즉 태생(胎生) 지역을 붙이는 관행대로 ‘마실’을 써서 ‘동해신룡’을 ‘마질지술간’으로 쓴 것으로 본다. 당시 진골로 편입하여 김씨 성을 사성하였다해도 ‘김지술간’으로 쓰면 다른 진골들 ‘김’과 구분할 수 없었으리라. 당연히 출신지역, 본관을 쓴다.



3. 비사벌 인근 지역 또 다른 지배계급, 창녕 성씨

 

  그러면 나란히 등장하는 또 다른 술간은 누구일까? 창녕 성(成)씨로 본다. 그 이름이 혁총지술간(奕聰智述干)이다. [ 주13 : 주보돈은 그의 ‘문헌상으로 본 고대사회 창녕의 향방’이라는 논문에서 혁총지술간을 창녕의 비사벌정 소속으로 확실시하고 마질지술간은 창녕 또는 다른 지역소속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고분군으로 교동지역을 혁총, 계동지역을 마질로 보는 데 필자는 반대로 보고 있다. 김용성은 그의 ‘창녕지역 고총의 묘제의 특성과 의의’에서 필자와 같이 교동지역을 비사벌로 보고 계성지역은 삼국사기의 밀성군(추화군)으로 ‘서화’ 등으로 별도로 불리웠고 신라 복속 전에 가야국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그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아서 연장자이거나 기존 세력으로 추정된다. [ 주14 : 역사학자들은 고분군의 분포나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필자가 성(成)씨 쪽이라고 보는 계성고분군을 기존세력으로, 교동고분군(필자가 조(曺)씨 쪽으로 봄)은 신흥세력으로 보고 있다.] 고분군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계성고분군의 계성지역에서 교동고분군의 교동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본다. 



  창녕을 본으로 하는 유력한 두 성씨는 창녕 조씨와 창녕 성씨다. 그 두 성은 결혼도 안한다 한다. 피가 많이 섞인 일가일까? 경쟁상대 때문일까?



  창녕 성씨는 중국 주 문왕 7자의 후손이고 당나라 때 ‘성경’이 도래했다 한다. 백제 ‘성충’이 있고, 신라에 ‘성저’가 있다고 하고 고려 때 ‘성인보’를 시조로 하고 있다. 창녕에 대대로 살아온 선비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창녕 성씨는 스스로가 밝히듯 중국에서 귀화한 성일 가능성이 있다. 



  창녕 성(成)씨 조상 중 한 분이 ‘혁총지술간’(奕聰智述干)에 오른 것이 아닌 지? 혁(奕)은 ‘크다’의 뜻이다. 그 성(姓)으로 삼은 성(成)도 ‘크다’의 뜻이다. 곧 ㄱ계통의 뿌리임을 드러낸다. 국명(國名) 고조선(ㄱ), 고구려(ㄱ), 가야(ㄱ), 고려(ㄱ)로 이어지는.



   총(聰)은 ‘(귀를 잘 기울어) 듣고 잘 살펴 다스린다.’의 뜻이 있다.  따라서 ‘혁총’(奕聰)은 ‘큰 지배자’의 뜻을 가진다. 이 혁총지술간은 창녕의 기존 세력으로 지금 창녕 시내 아래 지역인 계성(桂城)지구 [ 주15 : 동리와 영산의 양리 등의 소(小) 고분도 이곳 계성고분군의 지배범위로 본다.]를 다스린 것 같다. 



  이에 비해 ‘마실’ 조인 ‘마질지술간’은 마한, 백제 등의 뿌리 ㅁ계통이다. 이들 두 뿌리의 성분은 진한(ㅅ계통)과 조상이 달랐다.  마실 조(曺)는 변한(ㅂ)으로 뭉쳐 마한(ㅁ)의 진왕의 통솔을 받으며 사로국에 대항, 비사벌 독자성을 지켜갔다. 뿌리가 다른 이주민 ‘큰’(ㄱ)계통인 가야(ㄱ) 편입을 거부했다. 그러나 신라에 복속, 간접 지배를 받으며 100여년을 융성하다 시조 조계룡은 신라에 뿌리를 내린다.



  큰(ㄱ) 계통 뿌리의 성(成)씨는 가야(ㄱ : ‘큰’ 김씨)에 편입하여 4~5세기 융성하다 6~7세기까지 명맥을 이어오지만 서라벌엔 진출하지 못했다.



  가까운 지역의 이 두 성씨는 이렇듯 이질적(異質的)이어서 서로 잘 어울리지 않고 결혼도 꺼려했던 것 같다. 토착세력[조씨(曺氏)] 인근에 뿌리가 다른 이주세력인 성씨(成氏)가 자리 잡으니 자연 갈등이 생겼을 법하다. 결혼하지 않는 풍습이 이때부터 내려오지 않았을까?



  영취산 아래 계성지역엔 교동고분군에 버금가는 ‘계성고분군’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계성’의 ‘성(城)’은 통상 ‘재 성’인 새긴다. 「흙[土]을 크게[成] 이뤄 성(城)을 쌓은 것」이다. 성(成)과 음도 같고 뜻도 유사성이 있다. 성씨가 계성지역 지배임을 상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실제 계성지역엔 ‘계성토성’이 있다.



  이곳은 급격하게 흥성하였다 군사적 목적이 사라져 급격히 쇠퇴한 교동지역보다 7세기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작게나마 고분군이 유지된다. 이는 마실 조 가문이 경주로 옮겨간 데 비해 성씨 지배층은 그대로 계성에 남은 때문이 아닐까? 학자들은 계성지역이 교동지역과 달리 군사적 목적 이외에 경제적인 이유 등 다른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혁총지술간의 선조들은 5~6세기에 계성 Ⅰ군 1호(5세기 중반 추정), Ⅱ군 1호(6세기 2/4분기 추정) 등에 본인은 Ⅲ군 1호 추가장(6세기 3/4분기 추정)으로 대형분 등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일대에는 명문토기(銘文土器)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에서는 주(州)자나 대간(大干) 등이 새겨져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대간(大干)은 신라의 직위에도 없지만 그 뜻이 최고의 지위, 곧 왕의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어서 기존 학자들이 ‘소외되어 신라에 반발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자세히 무늬를 보면 새김이 대(大)자 보다는 육(六)자에 가깝다. 대간(大干)의 직위라면 소형분까지 무분별하게 출토될 리 없다. 그렇다면 혹시 육간(六干)은 사라진 초기의 육가야(六伽耶)의 지배자 간(干, 칸, 한)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ㄱ계통의 ‘큰’ 성(成)씨들은 가야 멸망에 가야의 향수와 희망을 유물에 새긴 것이 된다.



5. 창녕 조씨 시조(始祖) 선대(先代) 묘를 찾아서



  창녕의 큰 두 고분군 중 창녕 조씨 고분군을 교동(交洞) 지역으로 본다. 조씨 득성 설화지인 화왕산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6세기 이후 갑자기 쇠퇴한 것도 조씨 시조공이 경주로 근거지를 옮긴 것과 일치한다. 



  창녕읍 동쪽 화왕산성과 목마산성(牧馬山城)이 있는 산지에서 서쪽으로 뻗어 창녕읍 북쪽 구릉(A군), 동북편 화왕산록(B군), 동쪽 송현동(C군)의 교동고분군이 있다. 일제 때는 A군 70여기, B군 80여기, C군 20여기 등 170여기가 있었다 한다. 



  각 지역에 주분(主墳)을 중심으로 작은 봉토분들이 소분(小墳)을 이루고 있는 특징이 있다. 사후에도 생전과 동일하게 생각하여 순장(殉葬)풍습이 있었다. 무덤에도 화려한 유물을 넣어 지배관계를 확실히 하고 생전과 같이 화려하게 조성했다. 이는 마치 생전의 지배관계를 보여준 것 같다. 



  이곳에 창녕 조씨 시조공의 선대(先代) 묘소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 A군 7호분(높이 9.6m)과 B군 89분(높이 9.8m)은 왕릉(王陵)에 해당할 만한 초대형분이다. 경주를 제외한 타 지역에서 거의 볼 수 없다. 유물도 어느 지역보다 화려하게 출토되었다. 계성지역엔 5세기 중반에 최고로 번성하여 최고 수장자(收葬者)가 계성 Ⅰ군 1호분에 묻히는데 교동지역은 조금 늦은 5세기 후반과 6세기 초반에 전성기를 맞는다. 



  7호분은 일제 때 거의 파헤쳐 유물도 다 가져가 버리고 남은 게 없고 수장자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 7호분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으로 추정하고 89호분을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대가 맞다면 가장 화려한 7호분은 「동해신룡[曺神龍]의 증조(曾祖) ~ 고조(高祖) 묘」로 상정(想定)된다. 



  89분은 「동해신룡의 4 ~ 5대 선조 묘」쯤으로 보인다. 학자들의 시대 추정이 맞는다면 6세기 2/4분기의 교동 31호는 「동해신룡의 아버지 묘」쯤 되고 3/4분기에 추가장(追加葬)이 있어 「동해신룡의 자신의 묘」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부분은 창녕 조씨로는 중대한 사항이어서 고고학적 연구와 유물, 사료 등을 면밀히 잘 검토하여 확정해야 할 사항이며, 우선 필자는 현대 편년 연대 추정을 기준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동해신룡은 신라에 의해 최고 외위 관직인 ‘마질지술간’이 부여되었다. 지역민들을 동원해 대가야 정벌을 위한 징집 등 군사상 필요에 의한 마지막 예우였던 것 같다. 이후 고분들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다음해인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킨 신라는 교동지역 비사벌의 군사적 필요성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청룡 옥결의 묘」는 가장 나중에 조성되는 화왕산성 산록의 작은 고분군 속에 있지 않을까?  득성 설화에서도 시조공의 부친은 꿈으로 나타나 이야기한다. 거의 초야에 묻혀 숨어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창녕 지역 고분군에는 반드시 시조공의 선대 묘가 있었을 것이다. 고분군들로 인해 시조로부터 최소한 7대조의 묘까지 있었다 본다. 일제 때부터 도굴이 심하여 유물이 도난당하고 묘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마실 조(曺) 가문은 비사벌의 지배자로 ‘마실’ 용(龍 : 王)으로 대대로 내려왔을 것이다. 그런만큼 창녕 고분군에 조씨 시조 선대의 묘가 반드시 있으리라. 이 선조의 묘를 찾는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6. 비사벌 옥결과 서라벌 예향의 로맨스



  창녕 조씨 득성 설화는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품고 있다. 단군, 해모수, 박혁거세, 김수로, 김알지 등 왕의 탄생과 건국신화들. 이들이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비유, 은유 등으로 실제로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신화나 이야기꺼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창녕 조씨 시조공의 어머니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이예향(李禮香)이시다. 한림학사는 임금의 조칙(詔勅)을 담당하는 벼슬이다. 득성 설화에는 예향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질(腹疾)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이씨 족보에서는 이 말 대신에 ‘20세에 이르러 청룡병(靑龍病)을 얻었다’[至二十得靑龍疾]고 한다. 좀 더 정확한 표현 같다. 선천적인 병 치료로 둘러대는 것을 친정 쪽에서는 상사병(청룡 즉 옥결을 그리워하는 병)이 있다고 한 것이다.



  예향은 550년생이 된다. 옥결 [ 주16 : 계룡의 아버지를 진흥왕으로 보는 시각까지 있다. 비사벌을 순수(巡狩)한 진흥왕이 예향을 몰래 만나 인평을 낳고 숨겨왔다 서라벌로 불러 가까이 두고 덕만과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덕만의 자식은 성골이 되니 덕만을 왕으로 삼으려 애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본래 조씨였다는 용조(龍曺)도 맞지 않고 김씨가 원래 맞게 된다. 또 비사벌의 왕족의 마실 조씨를 복원하여 사성할 이유가 전혀 없다.]의 출생연도도 비슷하다고 보면 이들이 성장하여 만나는 570년 경의 비사벌은 555년 주(州) 설치후 거의 서라벌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시기다. 어디서 처음 어떤 경위로 만났는 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준수한 청년 옥결을 만난 예향은 사랑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예향과 옥결은 화왕산 용지에서 만나 무산지몽(巫山之夢)과 같이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도 설화에서는‘복질을 낫기 위해 정성으로 기도하다 갑자기 운무가 일어 주위가 캄캄해지면서 물속에 끌려 들어가 몽롱한 지경에 정신을 잃었다.’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씨 족보와 창녕화왕산용담록(초당선생문집)에서는 ‘교접하는 용이 위에 있었다.’[交龍其上已]고 한다. 이씨 족보에 의하면 북방 물[龍]이 위에 있고 남방 불에 해당하는 예향의 예(禮)는 아래에 있다. 기운이 잘 교류한 수화미제(水火未濟 ☷☰)의 아름다운 교류를 표현하고 있다. 이(李)가 오얏(자두)이고 붉은 색이다. 청룡(靑龍)과 자이(紫李:紫桃>자두)의 만남은 마치 푸르고 붉은 태극(太極)이 휘감은 것과 같다.



  설화에서는 신비한 자연형상으로 물에 들어가 예향이 정신을 잃고 태기가 있었다고 둘러댄다. 용지와 ‘물에 들어가’ 표현은 곧 ‘물’로 상징되는 ‘마실’ 조가로 시집 온 것의 표현이다. ‘운무(雲霧)로 캄캄해지는’ 등의 표현은 정식 결혼이 아닌 둘만의 밀회(密會)를 뜻한다. 그리고 청룡이 어찌했는 지 등의 구체적인 것은 생략하고 태기(胎氣)가 있어 득남(得男)했다고 전하고 있다. 



  설화에 의하면 두 집안이 정식 혼사를 주고 받은 것이 아니다. 처음엔 옥결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꿈에서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청룡[靑龍 : 조(曺) ] [ 주17 : 청(靑)은 동방색(東方色)이며 동방(東方)에서 뜨는 동일(東日)은 조(曺)와 뜻이 같으므로 ‘청룡’은 성 조(曺)를 뜻한다.] 옥결(玉玦)이라 밝히고 아이를 잘 키우라 하고 있다. 어쨌든 처음엔 승인 받지 못하다 나중에 아이가 생겨 (꿈을 둘러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고)정식 결혼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시가에서는 꿈으로 둘러대고 상사병은 선천성 복질(腹疾)로 바꾼다. 친정에서는 상사병을 낫기 위해 결혼시킨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 옥결은 비사벌의 지배자 마실 조(曺)의 왕손이었다. 계룡이 조씨 성을 받을 때 “태어날 때부터 겨드랑이 밑[脅下] [ 주18 : 협하(脅下)를 폐하, 전하, 합하처럼 부마도위를 부르는 명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에 ‘조(曺)’자 무늬[龍曺] [ 주19 : 용조(龍曺)를 벼슬 이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어룡성(御龍省)이 용조(龍曺)라 불리웠고 조계룡이 사성을 받을 당시 어룡성의 내신이 아니었나 하는 시각이다. ]  가 있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라는 이야기는 원래 조(曺)씨라는 이야기다 [ 주20 : 조계룡을 창녕가야의 왕족으로 보아 가야의 김씨로 추정하는 시각이 있으나, 이는 계성지구나 다른 가야의 이야기일 것이다. 비사벌은 가야계가 아닌 마한계통의 토착민 ‘마실’이라 가야계 김씨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다만, 비사벌을 점령한 신라가 신라의 김씨로 사성하여 진골로 편입하였다본다. 계룡의 조부를 최고의 외위에 해당하는 ‘마질지술간’으로 대우한 것에서 사성과 진골편입은 필연적이다.] 지금은 (사성을 해서)아니지만. 그러므로 신라 성씨인 김 씨로 일찍이 편입, 진골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숨겨오던 출신, ‘비사벌 왕손’인 조 씨를 다시 회복한 것이다.

덧글 ()

조석현  / 2013-01-05-18:49 삭제
우리 선조의 이야기일세.

무언가 석연치 않아 연구해 보니 놀라운 발견의 연속일세

숨겨져 온 비사벌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그 주인공들을 찾고

선덕여왕 당시의 역사도 또렸해지네



사대주의 사가 김부식의 편향과 의도적인 평가절하

그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풀어가고

창녕비의 마질지술간이 우리 조상 조신룡임까지...

더불어 자신의 조상을 못찾고 있는 창녕 성씨까지...



게시판이 한계가 있어 둘로 나눠 연재하네
조석현  / 2013-01-08-22:36 삭제
김덕만 선덕여왕이 우리나라 최초로 여왕이 되던 해가 632년

신라의 김씨에 의해 왕조에 물러난 박씨

박근혜가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되던 작년 2012년



둘다 임진년 흙룡해이니

정확히 23회갑인데....그냥 우연의 일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