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그간에 모태둔 배호 詩
ㅡ그 극장에서 듣던 배호
ㅡ고운기(1961~ )
스피아민트 낱개로 사서 우리 엄마
하나 씹고 나 하나 씹고
필름을 되감는 동안 저 어둠 속에서
시골 극장 구석에 숨어있던 암모니아가 어느새
다가와 턱을 괸 채 일행이 되고
사라호가 지난 다음이었던가
높기만 했던 극장의 지붕은 바람과 사귀지 못 해
천장 어느 쪽에는 상처만 남았는데
상처는 또 어느새 어둠과 암모니아와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스피아민트 단물이 빠지기까지
그래도 오래된 오디오의 진공관 안에 살림을 차리고
저들 가까이서
더러는 두어 줄기 거미줄 같은 세월을 빚어
그이의 목소리는 살고 있었다.
누가 울어 이 한밤
검은 눈을 적시나.
ㅡ(고운기 시집, 자전거타고 노래부르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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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호 (잔 한 잔 권하고 싶다)
ㅡ정일근(1958~ )
“배호의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
그를 만나보고 싶다
차이 나는 나이쯤은 망년지교하자며
그래서 형님, 배호 형님이라 부르며
맑은 소주 한잔 권하고 싶다
삼각지 로터리 돌아가다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그 어디쯤
인심 좋은 족발집에서
안주로 돼지족발 푸짐하게 시켜놓고
그러다가 대취해 술주정을 하면서”
ㅡ(인물시, 정일근,사랑했을 뿐이다, 문학나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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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호
-박라연(1951~ )
“물 마시듯 / 그의 영혼 마신 일 미안해서 한 잔
/ 죽은 시간들이 꿈틀거려 감사해서 한 잔 / 그의 불우 속에 내 몫까지 껴들어
/ 간 것 속죄하면서 한 잔
// 마음 석 잔을 무덤에 뿌려드리니
/ 온몸에 불어나서 「돌아가는 삼각지」를 / 열창하는 가수 배호
// 경기도 양주군 신세계 전 공원묘지가 / 일제히 따라 불렀나요?
/ 세상의 모든 아픈 것들이 몰려와 / 함께 불렀나요?
// 누가 나를 돌리고 있나요? / 탑을 돌듯 무덤을 돌다가
/ 누에가 뽕잎을 먹듯 묘지를 먹기 / 시작했다 비문에 새겨진 사연까지 / 다 먹었다
// 허공에 멈춰 서서 / 사라진 무덤을 내려다보는 / 푸른 나비는
ㅡ(빛의 사서함,박라연,문학과 지성 시인선 35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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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수인선 철도’
-이창기(1959~ )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왜가리 갈대 북서풍과 청둥오리의 2월
스스로 독(毒)을 품게 하던 겨울의, 가난과 갈증의 새벽으로 가는
밤마다 몸서리치며 떨던 바다를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하나뿐인 길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과 홀로 남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 같은
그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륜의 끊임없는 바퀴와 익숙한 체중을 못 잊어하는 옥수수밭에서
숨죽여 지켜보는 아이들의 뜨듯한 가랭이 같은 아직도 귀대면
중무장한 병사의 씩씩한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오래도록 남아서
태업한 꿈속까지 이어지는 나는 수척한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얻어터지며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걷는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70년대(年代) 배호 김종삼 그리고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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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지하철에서 만난 배호
ㅡ안상학(1962~ )
봄비 내리는 날 인사동 가는 길
3호선 지하철 안에서 만난 사내
통기타에 허름한 크로스 가방
욕실용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배호를 부른다.
그의 일대기를 변사처럼 꿰며 노래를 부른다.
그는 갔어도 그의 노래는 남아 있다.
비운에 간 짧은 생애지만 지금도
신화처럼 부활하는 수많은 히트곡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신비한 창법의 주인공
심장을 마비시키는 처절하고 매혹적인 저음 가수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60년대를 풍미한 천재 가수를 아십니까.
가장 짧은 기간 가장 많은 노래를 히트시킨 히트곡 제조기
도시인들의 내면적 우수를 달래준 카리스마
66년 혜성처럼 나타나 부동의 스타로 군림하며
신장염 투병 중에도 특유의 호소력 짙은 창법으로
팬들의 심금을 울린 독보적인 가수
이름만 들어도 가슴부터 찢어지는 배호를 아십니까.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지금도 그의 노래비가 서있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공동묘지에는
그를 사랑하는 여인들의 꽃다발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한 인기스타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 많은 팬들을 비탄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그,
들것에 실려 다니며 아픔을 참고 무대에 올라
마지막 순간에도 노래의 끈을 부여잡고 절규했던 그,
-참았던 눈물인가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어느 시인은, 시인도
배호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과
부르지 못하는 시인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가요계 판도는 백프로 달라졌을 겁니다.
누가 배호 앞에서 가창력을 논하랴
남진 나훈아의 십년 라이벌도 배호의 요절이 준 마지막 선물이었으니.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배호라면 모르는 노래도 사연도 없을 것 같은,
배호 하나로 살고 배호 하나로 죽을 것만 같은,
배호 같은 사내가 쉰 목소리로 배호만 찾고 배호만 부른다.
땟국 줄줄 흐르는 베레모에 비켜서던 사람들도
어느새 하나둘 다가가 천 원짜리 바치고
발장단 손장단 침 질질 흘리며 짝퉁 공연에 넋을 잃는다.
우산을 팔던 사내도 한 수 접고 자리를 잡는다.
노래방에 가면 배호부터 찾는 나도 그가 나인 듯하여
천 원짜리 한 장 바치고 흥얼거리다가
안국역에 내려서도 다 못 들은 그의 공연이 아쉬워
한참을 구파발행 지하철을 배웅하고 있었으니.
ㅡ계간 <시작>2007년,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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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장석남 시인 배호 연작
ㅡ배호 3
―눈이 오는 건 그녀가 내게 오기 때문이야
ㅡ장석남(1965~ )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을 맞는다
눈이 오니까 그녀는 지금
눈길을 오리라
그녀 뒤의 발자국을 눈은 지우리라
자꾸 눈발은 등을 민다 그녀는
등을 밀리며 오리라 리어카 스피커에서
한 생애가 쏟아져나와
쉽게 살얼음이 되는 것 바라보며
사람들은 찬 이마와 머리칼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그녀는 지금
손아귀에 깊은 골짜기를 쥐고 오리라
눈길을 오며 그녀는 아이를 가지리라
재개봉 영화 간판을 올리며 눈발 속의 한 인부가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강화버스 쪽으로 골목 하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막한 불빛을 물고
강화버스가 두런두런 들어선다
골짜기 내게 가까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말없이 손을 잡고 나는
그녀에게 入山한다
눈길을 다시 가며 그녀는 호두나무꽃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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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배호5
ㅡ장석남(1965~ )
이화여고 앞길
나의 행방이 오랜만에 눈발 속에 들었구나
발길은 市政 밖으로 낮게 조아린 길들과 내연하며
꺽어진 한 길목의 꺽인 고백이 되어주고
주머니까지 흘러내린 가슴을
두 손은 꼭 쥔 채 놓을 수가 없구나
덕수궁아, 자꾸
자기 그림자만 물끄러미 쳐다보지마
自己야
단추 떨어져 열린 속도 품이라고
바람든 눈송이들 기웃기웃 찾아들어
가슴을 헐값에 임대 놓고 싶구나
눈이 길을 막으면(제발 막아주었으면!)
내 죽음도 아무데서고 一伯
맞닥뜨려야겠지
그래야겠지
ㅡ<문지시인선156,장석남,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않을 무렵,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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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배호6
ㅡ귀가
ㅡㅡ장석남(1965~ )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버리고 자꾸
어디론가 숨었다 불 꺼진
우리집 길 끝으로 흘러가 보이지 않고
파리한 입술로 뒤통수에서 별만 빛났다
별에서 돌아와 나의 생은
어딘가 유성기판처럼 돌고 있는지
걸음마다 가슴이 울리고 가슴이 울리는
여기는 어디인가 내 아가미에선
낯선 숨소리가 맑게 끓었다
밤이 제 울타리를 허물고 끝에서 끝으로 갈 때
시린 새벽달이 떴다 떠서,
잃은 길을 적셨다
달빛 아래 모든 길을 버리고
깊이깊이 냇물 소리를 내며 집으로 갔다
ㅡ<문지시인선156,장석남,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않을 무렵,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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