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ㅡ'치교 穉敎'에게 보낸다.
-詩, '寄 穉敎 (기 치교)'-치교에게 보낸다.
강진 유배 십년째 1810년,
나이 오십,'지비 知非'에 들어가며 정약용이 쓴 詩이다.
그 詩에 관련한 전후 사정을 얼마간 이해한다면
그 시절 다산 선생의 심정이 훨씬 가슴에 와 닿겠다.
詩 제목에 '치교 穉敎'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처음에는 정약용과 그 같은 해에 문과급제한,
'치교 심상규(1766~1838)'로 오해할만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역본에는 '치교'에 관한 어떤 설명도 일절 없었다)
살펴본다.
필자는 앞의 다른 글, <정약용과 '정수칠,이관기'(1)>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정민 교수가 공개한, 정약용이 "관성冠城 예여汭旅"에게 보낸 편지의 수신자는
'장흥 제자 정수칠'이 아니다,
그 같은 유배객으로 '戚'관계에 있는 '이관기 李寬基'일 것으로 추정했다.
'관성 冠城'이란 명칭은 '장흥의 별호- 관산(冠山)'과 통하는 것이고,
'예여汭旅'는 장흥읍을 흐르는 '예양강(汭陽江)의 客人,旅人'을 지칭한다.
마침 '寄 치교'에서도 '유배객'을 '나그네, 旅'에 빗댔다.
요컨대, 그 '장흥(관성)에 보낸 편지'의 수신자가 여기 詩題에 나오는 '치교'이다.
여기 '치교'에게 부치다'라는 詩의 수신 당사자는 '치교 이관기 李寬基'이다.
'치교'가 과연 '이관기'의 '자, 호'인지 그 확실한 문헌 근거는 못 보았지만
다음의 여러 사정들은 "장흥 유배객 이관기"가 그 '치교'라는 사정를 뒷받침해준다.
정약용은 '장흥의 누군가'에게 보내는 그 편지에서 '戚' 관계라 말했는데
詩,'치교에게 보내다'의 서두에서도
"나의 증조부가 그대의 증외조"라는 '戚 관계'로 그 말문을 열고 있다.
(그 당시 순조실록 등에도 '정약용,이관기를 포함한 그 여섯 유배객들'은
서로 인척관계이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다시 더 살펴보니, 이관기의 모친이 '나주 정씨'이고,
정약용의 작은 할아버지 '정지눌의 외손'이었다.
또 "둘 다 '남토 南土'로 표락된 신세"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1801년 신유사옥 冬獄 (황사영 백서사건)' 여파로 둘 다 남녁 지방에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관기는 장흥'으로 나뉘어 유배되었다.
또 "서로간에 30리 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부분도 대략적으로 부합한다.
강진 장흥의 읍간 거리는 20리 남짓이나,
'강진군 도암면 다산 초당'과 '장흥군 어느 配所'를 고려하면 '상거 삼십리'도 무방하겠다.
또 '치교 이관기'는 그 본관이 '연안 이씨'인데,
詩에 나오는 "연원延原, 연능延陵"은 바로 '연안 이씨'와 관련한 지명,명칭이다.
연안 이씨 집안의 큰 인물로
연원(延原)부원군 이광정(1552~1627), 연능(延陵)부원군 이호민(1553~1634)이 있다.
詩에 나오는 "서쪽 사람들 지금도 생각한다"는 내용은 그들 본관이 '연백(연안)'으로
'西道' 출신이어서 '황해도 西道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표현이다.
정약용은 크게 한탄한다.
"삽십리 지척에도 불구하고, 마치 촉나라와 노나라 사이의 먼 거리이듯,
십년이 되가도록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 옆에 '천권의 책'을 쌓아두었다,
주역의 '삼오參伍'를 궁구한다"
"어떻게하면 그대의 소매를 잡고, ..웃는 얼굴로 맑은 술잔 비우며,
속에 쌓인 말 털어놓을 수 있나...."라 했다.
아,
고향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고 아득하기만 하여
이제는 마음을 접고,
"죽으면 의당 이땅에 묻히겠지"라 포기하려니
그 유배살이의 참담함이 오죽했을까.
강진 유배객 정약용 선생은
동병상련의 정,
해묵은 병(沈疴)의 아픔으로
바로 옆고을 '장흥 유배객 이관기'와
그 <관성 예여 편지>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추측 하나 더.
그 두 사람간에 오가는 편지나 물건(茶) 심부름은
바로 '장흥 제자 정수칠'이 맡아 했었겠다.
이하, 詩 <記 치교>를 소개한다.
ㅡ'치교'에게 부치다.
[寄 穉敎]
-정약용
나의 증조부가 / 我之曾祖父
그대로는 증외조지 / 爾之曾外祖
골육같이 깊은 사랑 / 骨肉有深愛
계보가 같은 뿌리란다 / 群芳本同譜
우리가 다 南으로 와서 / 與爾皆南征
둘 다 이 땅에 떨어져 있는데 / 雙飄落玆土
서로 삼십리 거리에 있으면서 / 相去三十里
멀기가 '파'와 '노'만 같아 / 邈若巴與魯
지금 十 년이 다 되도록 / 如今十年滿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다니 / 未敢謀一覩
하늘 땅 사이 그 얼마나 넓어도 / 二儀許大寬
새들은 날개치고 춤추는데 / 禽鳥浩翔舞
어찌해서 꼼짝 못하게 얼어붙어 / 如何溓不起
끝까지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던가 / 植立以終古
발이 묶인 불쌍한 참새도 / 哀哉縛足雀
하늘을 차고 날 날개야 없으랴만 / 豈無沖天羽
그물에 걸린 고기를 그대 보았지 / 君看掛網魚
물풀 찾아 모일 엄두 내겠던가 / 暇念藻荇聚
예부터 호랑이에게 물린 자는 / 由來傷虎者
방에서도 늘 호랑이가 보이는 법 / 密室常見虎
들리는 말로는 조정 논의들이 / 傳聞廊廟議
우리의 애매함을 알고는 있으면서 / 頗知枉罹苦
애써 구제하려고는 들지 않아 / 但無力拯志
말을 한대야 늘 아양이나 떤다네 / 所言恒媚嫵
두레박줄은 짧고 우물은 깊은데 / 繘短井更深
시원한 물 무슨 수로 긷겠는가 / 安能巽水取
말 달리듯 세월은 빨라 / 流光疾若馳
어느새 늙고 병들어가는데 / 荏苒迫摧腐
비구름 서교에 일어 / 密雲自西郊
어느 때나 비가 쏟아지려는지 / 何時作雷雨
弱妻는 황야에서 울부짖는데 / 弱妻野號咷
승냥이와 이리들은 되레 화를 내고 / 豺狼猶盛怒
흉년 들어 먹을 것 없는 백성들 / 凶年民食絶
쌓인 시체가 숲 속에 버려졌다네 / 積尸委蓁莽
잘살던 자들도 의지할 곳 없는 판인데 / 安居尙顚連
나그네(旅)가 곤궁 면할 턱 있는가 / 旅瑣那免窶
가까운 친척도 눈이 다 차갑도록 / 姻親眼俱冷
야박해진 풍속 말도 못하지 / 衰俗不可數
통하는 자가 먼 친척보다 나은 경우도 있어 / 疏者或踰戚
관곡 먹으며 마을에 붙어 있지 / 館穀寓村塢
밥이야 그런대로 창자 채우지만 / 糲飯雖充腸
해진 옷에 찬바람이 분다네 / 寒風吹破裋
'충주'와 '천원'은 떨어져 있어 / 忠州隔川原
높은 산에 올라 부모 계신 곳 바라보면 / 悒悒躋屺岵
마음은 슬퍼지고 뼈가 찌릿한데 / 心悲骨髓酸
하늘에는 가을 구름이 날았다네 / 秋雲飛玉宇
그대 선조는 후덕한 분이었고 / 念爾祖德厚
화려한 벼슬도 그치질 않았지 / 蟬聯赫簪組
'연원'은 청백리에 기록되었고 / 延原錄淸白
'연릉'이 다시 그 뒤를 이어 / 延陵復繩武
西쪽 사람들 지금까지도 / 西人到今思
따뜻하게 감싸준 德 생각하고 있다네 / 德力深煦嫗
자녀 교훈에도 소홀함이 없었고 / 惠訓旣不倦
왕실에도 많은 공로 쌓았으니 / 謨勳在王府
十대까지는 죄 있어도 용서할 만한데 / 世宥宜至十
五대도 못 가서 그 은택이 끊기다니 / 澤斬嗟未五
젊어서부터 동량 재목이었는데 / 英年棟梁材
늙도록 罪에만 시달리다니 / 到老淹罪罟
陶山 詩나 하나하나 화답하며 / 細和陶山詩
물려받은 조상의 법도나 따르게 / 悵望追繩矩
나는 나이 벌써 '오십'이 다 되어 / 吾衰逼知非
백년에 이미 절반을 살았으니 / 百年已亭午
앞으로 산대야 얼마 더 살겠는가 / 自知壽不長
겨우 실오라기 같은 숨 남아 있는게지 / 所殘僅一縷
다행히 이 언덕 하나 생겨 / 幸玆得一丘
정원도 채마밭도 손수 꾸몄더니 / 手自治園圃
내 심은 꽃 비단과 맞먹고 / 我花抵文綉
전골 육포 대신 茶 마시고 / 喫茶當脯
때로는 좋은 물고기도 먹는데 / 美魚時入吻
이는 주인이 그물 친 덕이라네 / 施罛賴賢主
산 언덕 의지해서 집을 짓고 / 縛屋依山阿
샘물 파고 진펄밭 개간하고 / 治泉拓榛楛
전답도 한 뙈기 사서 / 遂買田一稜
올해 찰벼를 심어보았더니 / 今年試種稌
닷말이나 거뜬히 수확하여 / 銍之得五斗
그것이면 식량도 족하다네 / 亦足餱糧補
골 깊어 인적은 뜸하고 / 深居少人跡
지나는 것이라곤 노루 사슴이라네 / 經過有麕麌
일천 권이나 많은 서책들만 / 書史一千卷
산골집에 가득 쌓여 있는데 / 縹緗照澗戶
육예만을 전공하느라고 / 專精攻六藝
四部 섭렵할 겨를이 없다네 / 未遑涉四部
알기 어려운 '주역'의 단상 뜻을 / 茫茫彖象旨
'3, 5'로 짝맞추며 연구하노라면 / 硏幾極參伍
마음이 더할 수 없이 즐겁고 / 至樂良在衷
때로는 나 자신 손뼉을 친다네 / 手掌時自拊
하늘이 내게 주신 탕목읍이 / 天畀湯沐邑
바로 이 탐진 포구에 있으니 / 乃在耽津浦
죽으면 의당 이 땅에 묻히면서 / 死當埋此地
가래 한 자루 동자에게 주면 되지 / 一鍤付僮豎
무엇하러 꼭 썩은 살을 끌고 / 何必曳朽胔
길손들에게 수모당하며 갈 것인가 / 苦受行路侮
요즘 들어서는 국화꽃이 / 邇來菊有華
찬란하게 담 주위에 피어 있고 / 璀璨繞垣堵
山에는 단풍마저 붉게 물들어 / 山葉亦酣紅
그윽한 산 정취 굽어볼 만한데 / 巖壑幽可俯
어떻게 해야지만 그대 소매 잡고 / 何由捉君袂
웃는 얼굴로 맑은 술잔 비우며 / 怡然酌淸酤
속에 쌓인 말 다 털어놓고 / 快寫胸中言
해묵은 병이 시원하게 낫도록 할까 / 頓令沈疴愈
[주]-도산陶山-송(宋) 육전(陸佃)의 호. 육전은 원래 왕안석(王安石)의 당이었으나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들고 나오자, 그는 반대의사를 제시했기 때문에 왕안석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오직 전례(典禮)에 관한 일만 맡았으며, 유독 詩에 능하여 당음(唐音)의 기풍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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