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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ㅡ"다반향초"에 관한 또 하나의 의문
작성자박형상 작성일2012/10/28 22:14 조회수: 348

ㅡ"다반향초"와 또 하나의 의문



정민 교수의 책, <조선시대 차문화>가 출간된 직후 지난 2011,5,19경에 써본 글인데 

이번에 조석현 동창의 글에 접하고서 다시 약간의 손질을 거쳐 올려봅니다.

그간 정약용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내 자신이 한시 운율을 제대로 깨우치못한 점 때문에 

여간 찝찝한게 아니었는데, 우리 조석현 동창의 해박한 지식 앞에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시의 세계에 관하여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ㅡ"다반 향초"에 관한  또하나의 의문

ㅡ<정민,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2011,4>를 읽고,

ㅡ2011,5,19, 초고 수정





웬만한 전통찻집 다원에 가거나 

茶書,茶詩를 보다보면, 

<다반향초> 네 글자와 마주치게된다.



"다반향초 茶半香初"

이를 두고 그간에 여러 해석이 오갔었는데, 



정민 교수는 <조선의 차문화>에서 

"차 마시고, 향 사르니"라고 그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



그 접근 요체는 <다>와 <향>을 따로 분리해 본다는 것이다.

<다반향초>에서의 향(香)은 '다향(茶香)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간에 분분했던 해석들,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

-찻잔에 차를 반쯤 따르니 향기가 막 피어난다,

-차를 반쯤 끓이자 향기가 처음으로 풍겨온다,

는 등은 모두 '요령부득'이라고 그는 정리한다.



그는 <다반 + 향초>로 분리하고서

<차를 마시다가>+<향을 사른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2단계,

별개의 구분된 행동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산 허균,추사 김정희,다산 정약용,초의선사, 자하 신위.."등의 

여러 다시(茶詩) 사례를 내세우며

자신의 주장을  꼼꼼히 예증해낸다.



특히 홍현주가 쓴 <손님와서 차 마시고 향을 막 피우니 客來茶半與香初> 라는 시구절이

<다반 + 여與 + 향초>로 되어있는 점을 강조한다.

즉 <다반향초>의 향이 만약 茶香이었다면 그 중간에 여(與)를 끼울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위와같은 정민 교수의 견해에 일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가 해결되니 또 다른 의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그 별개의 진한 향내(연기) 앞에서 은은한 차맛,차향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겠는지?

(즉 '주객전도'가 되는 것 아닐까?    아무래도 '차<향'이 되고말 것이다)

-그간에 "마시는 茶"의 미묘한 맛,멋,향을 내기 위해 온갓 까달스러움을 다부리며 

  이것저것 격식찾고 온갖 신경을 다 써왔는데, 

  왜 "사르는 香"쪽의 실체와 종류(이름),격식에 관한, 그 구체적인 문헌기록은 따로 남아 있지 아니한지?

-그 부분 사정을 카버해줄 다른 추가적 논리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 香은 혹 공간과 시간, 그 상황에 관한 상징 지시어가 아닐까?



(하긴 정약용 선생 경우는 <'독루香'을 사르고, '소룡단'을 달인다>고 

그 香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함께 제시하였다)



한편, 정민 교수는 "자하 신위가 추사 김정희와 함께 <다반향초>라는 말을 유행시켰다"고 하면서

조선 후기 차문화의 새로운 시대 풍조로 판단하는 것 같으나,



한걸음 더 돌이켜 보건대, 

'다반향초'라 함은

<유자孺者>들이 <불자,불승,불학,불심>을 대화하고 접하게 되면서 

그때서야 각광받게된 "사회적 화두"정도 아닐까? 



그러니 <유자들> 관점에서야 조선 후기에 새롭게 유행된 시대풍조라  볼 수도 있겠지만

<불승들> 입장에서 보면 <다반향초>는 여전히 새로울 게 없는 전통적인 격식이었다.

(다만 고려의 전통이 조선에 온전히 승계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고려 때의 "원감국사 충지(1226~1292)"의 <한중우시 閑中偶詩>를 보자.

(필자의 고향, 장흥 출신이다)



그간에는 다반향초를 분리시킴이 없이 '다향일체'로 한몫에 해석했으나

정민 교수의 견해대로 일응 분리시킬 수 있다고 본다.



ㅡ"한중우시(閑中偶詩)"

                                  원감국사 충지

閑居心自適 (한거심자적)     한가로이 살아가니 마음은 자적하고 

獨坐味尤長 (독좌미우장)     홀로 앉았으니 그 맛이 더욱 좋구나 

古栢連高閣 (고백연고각)     늙은 동백은 높은 누각에 뻗쳐있고 

幽花覆短墻 (유화복단장)     그윽한 꽃들은 낮은 담을 덮었네



甕甌茶乳白 (옹구차유백)       질그릇 발우에는 차는 우유빛 

榧机篆煙香 (비궤전연향)       비자나무 책상에는 

                                        (1)"차 향기 피어나네"

                                        (2)"하늘거리는 연기 향기롭네"



雨歇山堂靜 (우헐산당정)        비 그친 산당은 고요한데 

臨軒快晩凉 (임헌쾌만량)        툇마루엔 저녁 기운 상쾌하도다



살펴본다.

적어도 원감국사 詩에 등장하는 香은 "(1)다반향초로 일체화된 차향기"로 보기 어렵다.

"(2)하늘거리는 연기 향기롭네"로 서로 떼어내 보아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공간적으로 "茶"는 발우 안에 들어있고, "香"은 비자나무 책상 위에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별개의 향이 피어오르면서 생기는 가시적인 연기를 함께 묘사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정민 교수는 고려시대 충지의 詩를 자신의 주장에 관한 예증 사례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고려와 조선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채 조선후기에 집착했을 법하다.)



다시 정리해본다.

"다반향초" 논란의 결론은 유보하되, 설령 정민 교수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따로 유념해 볼 부분이 있다. 



<다반향초>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 유행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비록 그 중간에 단절이 있었긴하나,

佛家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향"을 "다반사(茶飯事)"로 여겨오던 것 아니었을까싶다.



그리고 그 옛 시절에는 "차+향 = 禪"이었을 것 같다.

"禪", 그 깨침의 자리에 이르는 디딤돌로 "차"와 "향"이 놓였을 것이다.

(앞의 원묘국사가 그 詩題를 '한중우시'로 삼았을지언정 

그 핵심 詩語,詩眼은 '獨坐味' - 그 주제는 '禪 생활의 희열' 정도이겠다)



 여기서 내 私見은 그렇다.

靜坐處茶半香初는 '禪의 과정,방법,수단'이다. 

                   '다선일여,茶禪一如'를 말한다. '다향有二, 다향不二'이다.

妙用時水流花開는 '禪의 경지,목적,결과'이다. 

                   禪의 '삼매경'을 뜻한다. '妙用 順理'의 무아경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절구,율시' 속에 포함된 한시 구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자족적인 한쌍 대련(對聯) 형식으로 중생 앞에 등장되었을 것이다.

초의 선사에게 "茗禪"이라는 號를, 그 두 글자를 남겨준 추사 김정희가 아니던가.

그 유니크한 천재, 김정희라면 능히 가능하고 그로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유자 입장에서 "다禪일여"의 禪이 꺼끄러우면 "다반향초"라 대신하면 된다.

예컨대, 송시열 족속이나 골수 노론들은 "다禪일여"라는 佛禪을 상상하기도 듣기조차 어려울 것.



그래서 그 앞선 시절에 똑똑한 허균은 좁은 방안에서 '정좌 참선'을 하면서

"茶를 반쯤 따라놓고 / 香 한심지 살라보네"라고, 

"다반 소향, 茶半 燒香"이라 살짝 돌려 말했을 것도 같다.

정민 교수는 그 앞의 숲은 정교하게 보았을 뿐 정작 그 뒤의 산은 놓쳤을지 모른다.

덧글 ()

박형상  / 2012-10-28-22:18 삭제
ㅡ조석현 친구의 글을 뒤늦게 보앗습니다. 우리 동창들에게 한시 강의 좀 부탁드립니다.

ㅡ그간에는 정민 교수의 주장에 일응 동조하면서 그 미진한 부분을 지적해보는 쪽이엇는데 

조석현 친구의 반론을 보고 "결론 유보"로 돌아섯습니다요....
조석현  / 2012-10-28-23:33 삭제
홍현주의 시를 별도의 향으로 본다면 '客來 + '茶半與香初'(2 + 212)로 보는 것인데

한시 해석상은 '客來茶半 + 與香初'(22 + 21) 가 순리인 것 같네 

다음 구의 '小閣如山 + 夜色虛'(22 + 21)와 같이.



그때는 여전히 '손님 오자 차 끓이니 + 차향기가 함께하네'의 해석이네.

다음 구의 '산같은 작은 집 + 밤빛만 비었네'와 맞네



與는 일응 차향이 먼저 함께 하지만 손님도 같이 맡는 중의의  뜻까지 풍기네



원감국사시는 행도 다르고 완전히 분리된 별도의 향이 확실하네
나웅인  / 2012-10-29-12:13 삭제
역시 이 시는 어려운 문제로구먼. 

에고 머리야~~~~
박형상  / 2012-10-29-12:25 삭제
ㅡ끽다거...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나..

ㅡ웅인 거사, 차나 한잔 마시러 내려갈까?
조석현  / 2012-10-29-13:09 삭제
유교에서 명상이 없던 것도 아니니

靜座는 坐禪의 유교적 표현으로 보이고



분석에서도 밝혔듯

앞은 靜이고 뒤는 動인데

참선으로 보면 앞은 사마티요 뒤는 위빠사나
나웅인  / 2012-10-29-13:22 삭제
《Re》박형상 님 ,

광주오면 연락허소. 

차건 술이건

오랫만에 한 번 본다는 것이 중요허제.
박형상  / 2012-10-29-14:35 삭제
......<靜坐處에...茶半香初이면> ....<妙用時에 水流花開이니라>....고 토를 달면 어떨련지요?

'靜+ 動'의 변증법적 지향일 수도 있겠으나, 그냥  前後관계의 인과적 귀결로 보아도 무방할 듯.
조석현  / 2012-10-29-22:30 삭제
고요히 앉은 자리에 다사의 단면이 정적으로 그려 지니, 다인은 사마티의 집중명상에 든다.

이윽고 차를 마시고 (위빠사나의 지혜로) 바라보니 물은 흐르고 꽃은 피누나. 



차를 매개체로 다인은 다도인이 된다.

살폈듯 기+승+전+결의 완벽한 구조다

그러나 '기승'이면 '전결'이다는 조건과 귀결은 어색하다



즉 정좌처(기)에 다반향초(승)로 잇고, (여기까지 靜이고 다인은 사마티로 본다)

묘용시에 일대 전환(전)을 거치니  (動적인 전환 - 客에서 主로, 茶에서 茶人으로)

다인은 수류화개(결)의 경지에 든다가 자연스러울 듯



茶道는 茶事를 통해 결국 茶人에게서 완성되니

이 시는 이를 훌륭하게 나타내고 있다.



향이 차향이든 별도의 향이든

이 시를 전체의 다도를 읊는 대의는 손상됨이 없이 완벽타.

이 시가 온 우주의 진리를 다 품고 있어 필자는 열광한다.

졸고는 그 부분을 짚어내려 애썼다.
조석현  / 2012-10-29-23:17 삭제
座는 坐의 오타네
조석현  / 2012-10-29-23:29 삭제
그리고 조주는 喫茶去했다지만 

喫茶來가 어쩐가?

'차 한 잔 마시러 오게나'
박형상  / 2012-10-30-08:30 삭제
ㅡ잘 읽었네..

ㅡ정민 교수는 <與>에 관련한 <다반>과 <향초>를 분절된 구조로 파악하면서 <다반향초與酒邊>이라는 또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네. 그가 제시한 이른바 '다반향초 분절론' 사례가 꽤 풍부 합당하여 굳이 그런 주장을 전면 부인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고, 다만 그런 주장과 병립할 수 있는 별개 사정은 가능하다고 판단되네..

ㅡ더구나 <燒香. 焚香..>까지 있고보면 .오히려 '茶생활의 또 다른 유형'으로 파악해야 하지않을까싶어...
박형상  / 2012-10-30-08:48 삭제
ㅡ또한 茶생활의 '격식성 여부'과 '무정형성 시비'가 한편에서 거론되고있기도 한다지만, 이른바 茶시(또는 다선시, 또는 禪시)의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런 시비가 연장되는 것 같군....

ㅡ내가 "인과적 귀결"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뜻은 그 부분이라네...만약 앞의 <7+7>을 최대한 간략히 줄이라고한다면, 추사 김정희는 <정좌+묘용>으로 줄였을 것이고 <다반향초, 수류화개>는 버렷을 것이라는 것이고...

...그때의 <묘용>은 <정좌>에서 연원하는 것이라는 것이지.....즉 <정좌>없는 <묘용>은 없다는 것이고, <정좌>를 버린 <묘용> 혼자 있게된다면 추사 김정희가 그 쌍폭 대련을 써둔 본지가 실종되고 마는 것 아니겠나싶어......



...석현의 글을 보면 ,<기+승+전+결>이라는 같은 비중의 4분법 틀을 제시한다고는 하지만, 그 설명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결국은 '시간적(또는 공간적,상황적) 전후관계'의 인과적 논리에  의지하고있는 것으로 보이네...그렇다고 <7+7>을 '공간적 좌우관계'나 '관념적 병렬관계'로 보기는 무리라는 것이지.......<기승전결>4분이라지만 .....결국은 <일어날 起>+<맺을 結> 아니겠나.싶어...<승.전>은 상황에 따라 略할수도 있다는것이지...
박형상  / 2012-10-30-09:06 삭제
ㅡ<정+동>이분구조도 그렇게보여....석현이가 제시한 그 나름의 <정,동>논거에 일리가 있기도하지만,

실제의 茶생활(또는 다선)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동+정> 아닌가샆어....앉은 자세..때로는 일어서기도하며.....다구를 준비하거나 챙기고.....꿇이고,...,붓고..(또는 함께 향을 피우고..)..動하다가 ....이제는  ..음다, 음미를 하면서.....고요한 침잠,명상의 靜적 세계로 빠져든다...고 보는게 .....더..자연스럽지 아니할까?....바로 그 묘용 절정의 순간에 '수류화개'의 경지가 보인다는 것이고...('수류화개'는 '동적, 물리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정적, 추상적 상징-생산,결실,승화...' 아니겟나)

<靜,流,開>그 문자해석에 의거하여 <靜,動>을 꺼내볼 수도 물론 있지만,...석현이의 <기승전결> 분석구조대로.... 간명하게 <起 = 動> <結 = 靜>으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때로는 <정中동> <동中정>을 끌어올 수도 있을 것 같고.......
박형상  / 2012-10-30-09:19 삭제
ㅡ그런데 정민 교수와 나, 석현이와 나 사이에는 그런 근원적 인식 차이가 있는 것 같아..



ㅡ정민 교수는 이른바 '다반향초 분절론'을 주장햇으면서도 그 사회적 역사적 의미 맥락에 유념하지 못햇다는것이네...그 숲은 나름대로 합당하게 보앗지만 그 뒤 山과 禪을 못 보앗다는 것....이른바 '다반향초'를 자신의 시구로 등장시키고, 스님과 드러내놓고 교류하는 일군의 사람들(또는 선비,지식인)의 특징, 그 사회적 흐름을 잡아내지 못햇다는 것...사회적 교류,대화, 소통의 매개체로서 茶생활 모임의 실체와 내용에 더 천착햇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정민 교수도 茶에만 너무 매몰되어있는 것 같아... 내 개인적 주장이네만, 노론 골수들, 그 시절 보수골통들은 '다반향초,다선일여,명선..' 이런 말을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쓰지 못했다는 것.
박형상  / 2012-10-30-09:39 삭제
ㅡ그리고 석현이와 차이는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

..........석현이는 '茶人'으로서  이른바 '다반향초'詩를 ........'茶詩,茶道'의 정점으로 올려보는 반면에....

.....나는 ..그 '다반향초'나 '대련 문구'를 ........禪詩 일종으로 보되...늦추어말한다해도 '茶禪시'로 본다는 것.

아마 '양자택일 이분법'이라면 ..석현이는 "다>선"......나는 "다<선"으로 나뉘어질것 같아...그리고 그 부분은 옳고그름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일 뿐이고....



요컨대, 내 의견은 그렇네...이제는 세상이 또 달라진만큼 ....'다반향초'는 '禪의 생활화''茶생활 속의 禪' 정도로 보고싶네....'茶禪'의 여적 정도?



.....그런 의미에서 원감국사의 詩에 나오는 詩眼, "獨坐味"를 絶唱으로 평가하고 싶네그려.....

그 시에서는 "선>'다+향'"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茶詩史에서도 그 시를 절대로 홀대해서는 안될 것으로 판단되고....그런데, 추사나 자하 시대에 벌써 그랫었지만 ..오늘날은 이미 이른바 "竝坐미,多坐미,連坐미"의 시대인지라..."獨坐미"의 의미가 또 달라졌지만 그런대로 또 적응해나가야하겟지..



ㅡ 아..그리고 정민 교수는 '다반향초'를 일반화,일상화시킨 '자하 신위'의 '관악산 산방' 이름이 '다반향초실'이고,,그곳이 '北 禪院 다실'이엇다고 말하고있네그려...나도 그런 '다반향초실' 하나 가지고 싶네....또 거기에 석현이 같은 친구들을 초대도 하고...



ㅡ이래저래 말이 꽤 길어지고말았네.........널리 양해해주시길.......
나웅인  / 2012-10-30-09:46 삭제
우리 동기들이 이토록 인문학에 관심이 많구나.

요즘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더군다나 박변호사나 석현군도 한문학이 전공도 아니잖여?

좋은 친구들이다.

부럽당.

앞으로도 다른 부분 역사나 문학등 인문학에 대한 대화가 오가는 홈피가 되었으면 

나같은 시골 무지렁이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텐데.

동기제현들의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조석현  / 2012-10-30-09:58 삭제
정좌+묘용으로 축약에 동의하네. 

다시 축약하면 정+묘, 마지막엔 妙로 보고 싶네.

차로 시작해서 선으로 남겠지. 

차로 시작해서 다인으로,

 다인은 다도인으로, 다도인은 道로



역시 관심사로 나뉘네

나는 自利, 自覺에 중점을 둔 소승이고

형상은 사회까지 아우르는 대승 위주인 것 같네
조석현  / 2012-10-30-10:06 삭제
茶事가 動에서 靜으로 가는 부분도 동의하네

단지 이 시가 靜에서 출발하여 動으로 가고 있네

물론 文理 그대로의 형식으로는



그러나 내면은 자네의 지적대로

動이 점점 精緻해서 靜으로 가는 것이 맞네



역시 靜中動, 動中靜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고

다만,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구가 다 대표적인 명상법인

사마티와 위빠사나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네



그리고 마지막 구의 위빠사나는

석가가 유일하게 얘기한 대로

선의 정점을 찍는 일인 것 같네

간화선 위주의 우리나라엔 낯설지만
박형상  / 2012-10-30-10:14 삭제
ㅡ경청해주어 석현이 고맙네...

ㅡ그리고 한국식 간화선에 비판적이라면 그런 석현이가 더 가깝게느껴지네그려...

<위빠사냐>에 대해서는 책만 사놓고 아예 읽지를 못해 뭐라 말할 형편이 전혀 아니네만, 

우리네 "간화선"은 좀 튀겨서 말하자면 '지적 사기' 수준 같아. 평소 불만이 많은 입장이라네...

ㅡ 또 <위빠사냐>에 대해 강의도 해주길 당부드리네..
박형상  / 2012-10-30-11:25 삭제
ㅡ웅인이...저 앞의 겸사,<시골 무지렁이>를 <隱士, 處士>로 바꾸어 듣겠네....
나웅인  / 2012-10-30-11:37 삭제
고맙네. 그리 생각해줘서.

광주오면 연락허소.
조석현  / 2012-10-30-12:15 삭제
그리고 수류화개를 물리적이 아니고 추상적으만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나는 실재하는 현상을 보는데 자각후에 달리 보이는 것으로 보았네.



한시가 결코 허구가 아니고 실재에 포인트가 있다는 점과

깨달음의 경지가 物에 비추어 의탁되는 것일세

실제 茶亭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을

다인은 깨달음에서 보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수류화개의 의미를 모든 차원에서 분석했네

時空이며 곧 宙宇



一析三極이고 三位一體이니

하나에서 비롯된 우주는 三間(時間,空間,人間)으로 가고

그 큰 셋은 하나가 되니

物我一體,깨침의 경지로 원래 근본을 알고 행하는 것 아니겠는가?
박형상  / 2012-10-30-13:19 삭제
ㅡ'호생관 최북'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 水流花開>를 보내드리네...



ㅡ그런데 빈말이 아니라.........禪에 覺하듯 한곳에 집중하면......

....酒에 興하고도....色에 醉하고도....茶에 味하고도.....

.....그 나름 열심이면 혹 <水流花開>가 가능한 것 아닐까?
조석현  / 2012-10-30-14:13 삭제
맞네 집중이 사마티고

매사에 즉시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이 위빠사나이네



술을 마시며 술을 마시는 줄 알고

차를 마시며 차를 마시는 줄 알고



술 마시며 옛 애인 생각하고

차 마시며 다른 걱정하지 말고



空山無人 水流花開

허허 오염시킬 인간 종자만 없군



空山이 아니라 無爲로 가득찬 滿山이요

다 비워냈기에 물도 자유자재 흐르고 꽃도 피우네



그 시는 숫자로는 < 0  1>인데

空山의 空은 만물이 뛰노는 活空이라 곧 滿空이니



0 = 1

공에서 만물이 나오니 空卽是色( 0 = 1 )



노자가 말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사람이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지 않는 自然이며

자연을 따라 사람의 도를 행하라는 이야기



그러면 사람도 자연과 같을 지니

우리 뫔 속에서도 수류화개하지 않겠는가?



우리 뫔 속에 생명의 물이 흐르고

아름다운 꽃이 핀다면 그 얼마나 좋겠나?



'뫔'은 '몸과 맘'이 하나됨을 보여주는, 몸=맘을 나타내는,

내가 즐겨 쓰는 용어일세
박형상  / 2012-10-30-16:22 삭제
ㅡ 뫔!........멋진 표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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