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다반향초"와 또 하나의 의문
정민 교수의 책, <조선시대 차문화>가 출간된 직후 지난 2011,5,19경에 써본 글인데
이번에 조석현 동창의 글에 접하고서 다시 약간의 손질을 거쳐 올려봅니다.
그간 정약용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내 자신이 한시 운율을 제대로 깨우치못한 점 때문에
여간 찝찝한게 아니었는데, 우리 조석현 동창의 해박한 지식 앞에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시의 세계에 관하여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ㅡ"다반 향초"에 관한 또하나의 의문
ㅡ<정민,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2011,4>를 읽고,
ㅡ2011,5,19, 초고 수정
웬만한 전통찻집 다원에 가거나
茶書,茶詩를 보다보면,
<다반향초> 네 글자와 마주치게된다.
"다반향초 茶半香初"
이를 두고 그간에 여러 해석이 오갔었는데,
정민 교수는 <조선의 차문화>에서
"차 마시고, 향 사르니"라고 그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
그 접근 요체는 <다>와 <향>을 따로 분리해 본다는 것이다.
<다반향초>에서의 향(香)은 '다향(茶香)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간에 분분했던 해석들,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
-찻잔에 차를 반쯤 따르니 향기가 막 피어난다,
-차를 반쯤 끓이자 향기가 처음으로 풍겨온다,
는 등은 모두 '요령부득'이라고 그는 정리한다.
그는 <다반 + 향초>로 분리하고서
<차를 마시다가>+<향을 사른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2단계,
별개의 구분된 행동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산 허균,추사 김정희,다산 정약용,초의선사, 자하 신위.."등의
여러 다시(茶詩) 사례를 내세우며
자신의 주장을 꼼꼼히 예증해낸다.
특히 홍현주가 쓴 <손님와서 차 마시고 향을 막 피우니 客來茶半與香初> 라는 시구절이
<다반 + 여與 + 향초>로 되어있는 점을 강조한다.
즉 <다반향초>의 향이 만약 茶香이었다면 그 중간에 여(與)를 끼울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위와같은 정민 교수의 견해에 일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가 해결되니 또 다른 의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그 별개의 진한 향내(연기) 앞에서 은은한 차맛,차향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겠는지?
(즉 '주객전도'가 되는 것 아닐까? 아무래도 '차<향'이 되고말 것이다)
-그간에 "마시는 茶"의 미묘한 맛,멋,향을 내기 위해 온갓 까달스러움을 다부리며
이것저것 격식찾고 온갖 신경을 다 써왔는데,
왜 "사르는 香"쪽의 실체와 종류(이름),격식에 관한, 그 구체적인 문헌기록은 따로 남아 있지 아니한지?
-그 부분 사정을 카버해줄 다른 추가적 논리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 香은 혹 공간과 시간, 그 상황에 관한 상징 지시어가 아닐까?
(하긴 정약용 선생 경우는 <'독루香'을 사르고, '소룡단'을 달인다>고
그 香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함께 제시하였다)
한편, 정민 교수는 "자하 신위가 추사 김정희와 함께 <다반향초>라는 말을 유행시켰다"고 하면서
조선 후기 차문화의 새로운 시대 풍조로 판단하는 것 같으나,
한걸음 더 돌이켜 보건대,
'다반향초'라 함은
<유자孺者>들이 <불자,불승,불학,불심>을 대화하고 접하게 되면서
그때서야 각광받게된 "사회적 화두"정도 아닐까?
그러니 <유자들> 관점에서야 조선 후기에 새롭게 유행된 시대풍조라 볼 수도 있겠지만
<불승들> 입장에서 보면 <다반향초>는 여전히 새로울 게 없는 전통적인 격식이었다.
(다만 고려의 전통이 조선에 온전히 승계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고려 때의 "원감국사 충지(1226~1292)"의 <한중우시 閑中偶詩>를 보자.
(필자의 고향, 장흥 출신이다)
그간에는 다반향초를 분리시킴이 없이 '다향일체'로 한몫에 해석했으나
정민 교수의 견해대로 일응 분리시킬 수 있다고 본다.
ㅡ"한중우시(閑中偶詩)"
원감국사 충지
閑居心自適 (한거심자적) 한가로이 살아가니 마음은 자적하고
獨坐味尤長 (독좌미우장) 홀로 앉았으니 그 맛이 더욱 좋구나
古栢連高閣 (고백연고각) 늙은 동백은 높은 누각에 뻗쳐있고
幽花覆短墻 (유화복단장) 그윽한 꽃들은 낮은 담을 덮었네
甕甌茶乳白 (옹구차유백) 질그릇 발우에는 차는 우유빛
榧机篆煙香 (비궤전연향) 비자나무 책상에는
(1)"차 향기 피어나네"
(2)"하늘거리는 연기 향기롭네"
雨歇山堂靜 (우헐산당정) 비 그친 산당은 고요한데
臨軒快晩凉 (임헌쾌만량) 툇마루엔 저녁 기운 상쾌하도다
살펴본다.
적어도 원감국사 詩에 등장하는 香은 "(1)다반향초로 일체화된 차향기"로 보기 어렵다.
"(2)하늘거리는 연기 향기롭네"로 서로 떼어내 보아야 자연스러울 것 같다.
공간적으로 "茶"는 발우 안에 들어있고, "香"은 비자나무 책상 위에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별개의 향이 피어오르면서 생기는 가시적인 연기를 함께 묘사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정민 교수는 고려시대 충지의 詩를 자신의 주장에 관한 예증 사례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고려와 조선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한채 조선후기에 집착했을 법하다.)
다시 정리해본다.
"다반향초" 논란의 결론은 유보하되, 설령 정민 교수의 주장에 따르더라도,
따로 유념해 볼 부분이 있다.
<다반향초>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 유행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비록 그 중간에 단절이 있었긴하나,
佛家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향"을 "다반사(茶飯事)"로 여겨오던 것 아니었을까싶다.
그리고 그 옛 시절에는 "차+향 = 禪"이었을 것 같다.
"禪", 그 깨침의 자리에 이르는 디딤돌로 "차"와 "향"이 놓였을 것이다.
(앞의 원묘국사가 그 詩題를 '한중우시'로 삼았을지언정
그 핵심 詩語,詩眼은 '獨坐味' - 그 주제는 '禪 생활의 희열' 정도이겠다)
여기서 내 私見은 그렇다.
靜坐處茶半香初는 '禪의 과정,방법,수단'이다.
'다선일여,茶禪一如'를 말한다. '다향有二, 다향不二'이다.
妙用時水流花開는 '禪의 경지,목적,결과'이다.
禪의 '삼매경'을 뜻한다. '妙用 順理'의 무아경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절구,율시' 속에 포함된 한시 구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자족적인 한쌍 대련(對聯) 형식으로 중생 앞에 등장되었을 것이다.
초의 선사에게 "茗禪"이라는 號를, 그 두 글자를 남겨준 추사 김정희가 아니던가.
그 유니크한 천재, 김정희라면 능히 가능하고 그로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유자 입장에서 "다禪일여"의 禪이 꺼끄러우면 "다반향초"라 대신하면 된다.
예컨대, 송시열 족속이나 골수 노론들은 "다禪일여"라는 佛禪을 상상하기도 듣기조차 어려울 것.
그래서 그 앞선 시절에 똑똑한 허균은 좁은 방안에서 '정좌 참선'을 하면서
"茶를 반쯤 따라놓고 / 香 한심지 살라보네"라고,
"다반 소향, 茶半 燒香"이라 살짝 돌려 말했을 것도 같다.
정민 교수는 그 앞의 숲은 정교하게 보았을 뿐 정작 그 뒤의 산은 놓쳤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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