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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약용과 '떨어진 연꽃'(2)
작성자박형상 작성일2012/09/13 16:03 조회수: 318

ㅡ정약용과 '떨어진 연꽃(2)'





이른바 "시들은 연잎(敗荷)"은 정약용의 詩 중에서 아주 이례적이다. 

다들 '유배객 정약용 개인의 심경과 모습'을 빗댄 시라고 그렇게 이해한다.

연꽃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이제는 꽃대궁으로 하늘을 치받는 처지가 되었다.

정약용 그 자신 같다.

애상적이다. 센티멘탈하다. 서글프다.



먼저 통념대로 그 詩를 감상해보자.

유배 8년째,1808년 47세 초가을이다.



ㅡ시들은 연잎

[敗荷]



들 밖에 새로 닥친 가을빛이 / 野外新秋色

쓸쓸하게 시들은 연잎 위에 앉았네 / 蕭然上敗荷

예쁜 꽃이야 이미 졌지마는 / 已收芳艶了

고심스런 그 마음을 어이하리 / 奈此苦心何

하늘을 치받든 꽃대궁 아직 있고 / 尙有擎天柄

달 잠긴 물결도 그대로 있는데 / 猶餘蘸月波

그 뉘라서 작은 악기를 들어 / 誰將小絃管

날 위해 슬픈 노래 들려주려나 / 爲我度悲歌





(또 다른 번역이다.

요즈음 잘나가는 '정민 교수의 번역본'으로 접해보자.



  ㅡ'시든 연잎'

들 밖에 가을 빛이 새로 이르러

쓸쓸히 '시든 연잎' 위에 앉았네.

여여쁨은 어느새 시들었어도

고심하는 마음이야 어이하리오.

여태도 하늘 받친 자루가 있고

달빛 잠긴 물결도 외려 남았네.

뉘 장차 자그만 관현악으로

날 위해 슬픈 노래 들려주려나.)



 

ㅡ여기서 제기해 보는 문제 하나.

"시들은 연잎(敗荷)"을 통설처럼 꼭 정약용 개인의 내면적 감상(感傷)으로만 한정해야 할까?

또 "시들은 연잎"이라는 번역이 과연 적합한 것일까?

그가 당부한 '그를 위한 悲歌'라는게 꼭 그 혼자를 위한 것일까?



또 다른 접근도 가능하지 않을까?

통설적 해석과도 병립 가능한, 나의 독자적 가설을 제시해 본다.

(통념적 해석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한가지를 더 보태본다)



왜 "蓮"대신에 "荷"를 사용했을까?

왜 "悴(췌),衰(쇠)"대신에 "敗"로 시작했을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원래 '연꽃 전체에 관한 통칭'으로 "荷,芙거,芙容,"등을 사용한다.

우리가 통칭하는 "蓮" 개념과 다르다. 그들에게 '蓮'은 '연의 열매, 蓮子, 蓮實'이라는 제한적 의미이다.

그리고 '연꽃'부분은 "함담,菡萏"이라 표현한다. 

그 줄기는 "茄(가)",그 뿌리는 "藕(우)"이다.

그런데 우리는 "蓮"을 '연꽃,연잎,연줄기,연뿌리'까지 포괄하는 전체 범칭으로 사용하여왔다, 

정약용도 다른 詩에서는 그런 통칭 의미로서의 "蓮"을 사용했다.

그런데 "시들은 연잎(敗荷)"에서는 유독 "荷"를 선택했다.

그 "荷"에 또다른 추가적 의미는 없는 것일까?



다음은 "敗"이다.

대부분 경우는 "敗"를 "시들다"라고 옮기고 있는데, 

그렇게 "시들다"는 의미 정도라면, 아예 "췌,쇠"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悴,衰'가 아닌 "敗"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敗"를 차라리 "떨어진"으로 옮기는 것은 어떠할까?



 정리해본다.

원제詩 "敗荷"를 대부분 경우는 "시들은 연잎"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아예 "패배한 蓮花, 떨어진 연꽃(蓮荷)"이라고 옮길 수 있겠다.

('연꽃,연잎'을 따로 가릴 필요없이 통칭 "蓮,荷"로 본다는 말이다, 

어의적으로는 정약용 경우도 '蓮 = 荷'였을 것이다)

그가 '연꽃과 연잎,연줄기'을 굳이 가려가면서 "敗荷"를 썼을 것 같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보자.

"蓮, 荷"을 바라보는 정약용의 시선이 '이중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피고 지는, 순환 회귀의 자연 현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기고 지는, 勝敗 관점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개인적 관점'에 '사회적 관점'이 중첩되어 있다.



그는 '꽃의 조락'을 '인간의 승패'로 비유하고 있다.

상당한 강박관념의 반영이라 보여진다.

그 잠재적 스트레스는 어디서 온 것일까?



 다시 살펴본다.

정약용은 '개인 정약용'이면서 '정씨 가문의 자식'이었다.

그는 늘 '8대 옥당' 가문의 후손임을 자랑했었다.

그럼에도 기실 '직계3대 선조'들은 '3대 포의'로 벼슬이 없었다.



 정약용만 해도 진주목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정약용이 대과에 합격한 다음에야 그 아버지가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을 뿐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대과 출신'은 아니었고 '소과,진사 출신'이었다.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라는 친구 덕분에 다시 '음직 출사'를 하였던 것이다. 

정약용의 고향, 소내의 정씨 가문은 경제적으로도 전혀 넉넉치 못했다.



 그런 쇠락한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워야 할 원초적 사명이 정약용에게 부여되었다.

정씨 4형제중 '가장 영민하고, 남다르게 성실하고, 도전적인 막내 정약용'만이 가능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참 잘 나가던 그가, 

정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던 그가,

정씨 가문의 출중한 자식이던 그가,

어느 날 그만 천리길 남도 땅에 유배되고 말았다.

벌써 유배 8년째이다.

기약도 없다.



 다시 더 돌이켜본다.

"荷".

정씨 집안에 "荷"자는 각별하다. 

가문의 상징이다.

'문장' 글자라 할 수 있다.



 정씨 집안의 선영이 "충주 荷潭"에 있다.

그 '하담 선영'에 묻힌 아버지 정재원의 호는 "荷石"이었다.

정약용의 큰 형은 고향집 앞에 "望荷樓"를 만들어 놓았다. 

"望荷", 

거기에  걸린 편액이 "望荷"이다.

정약용은 "望荷樓 記"를 썼다.



모두 "荷,荷,荷"이다.

荷"는 더구나 '君子,儒者의 꽃' 아니던가.



ㅡ 이제, 원제 "敗荷"로 되돌아 가본다.

정약용이 그 시 제목을 굳이 "敗荷"라고 명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혹 "荷씨 가문의 敗將"을 잠재적으로 연상한 것은 아닐까?



 가문을 일으키지 못하고 거꾸러진채 세월을 축내는 그 자신을 두고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아버님에게도 면목없어 

마치 '敗將'이라 여기듯 스스로 '敗荷'라 불러본 것 아닐까?



 정씨 가문의 기대주, 정약용은 '충주 荷潭 선영'에 여러번 찾아갔다.

고향 소내에서 삼백리 길이었다.



'관례를 올린 후에', '혼인후 아내를 데리고서', '소과에 합격했을 때', '대과에 합격했을 때', 

금정찰방 좌천생활이 끝났을 때'.. 그때 그때 충주의 '하담 선영'을 찾아갔다.

그곳 '하담 선영'의 어머니,아버지 묘소 앞에 감사드리며 다짐했다.



 그리고 1801년 유배살이를 시작하면서도 '충주 하담선영'에 들렸었고

18년 유배를 마친 후에 고향에 돌아가서도 '충주 하담선영'에 찾아갔다.

정약용은 '荷潭 선영'에 관하여 '아홉편' 詩를 남겼다.



 그 중에 '荷潭 선영'에 유배를 오기 전에  남긴 詩 '荷潭別',

유배가 끝난후에 찾아가 남긴 詩 '上墓'를 따로 감상해보자.

그 집안의 "望荷",

그 집안 자식의 "敗荷"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ㅡ'하담'에서의 이별 .....신유년,1801년3월2일,신유사옥으로 장기로 유배가는 길

 [荷潭別] 

-부모 무덤에 하직인사를 올리는 일이다. 

-하담(荷潭)은 충주(忠州) 서쪽 20리 지점에 있음



아버지여 아시나이까 모르시나이까 / 父兮知不知

어머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 母兮知不知

가문이 금방 다 무너지고 / 家門欻傾覆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어요 / 死生今如斯

이 목숨 비록 부지한다 해도 / 殘喘雖得保

큰 기대는 이미 틀렸습니다 / 大質嗟已虧

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고 / 兒生父母悅

쉴새없이 만지시고 기르셨지요 / 育鞠勤携持

하늘 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렸더니 / 謂當報天顯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리도 못돼버려 / 豈意招芟夷

이 세상 사람들 거의가 / 幾令世間人

아들 낳은 것 축하 않게 만들 줄을 / 不復賀生兒



 

ㅡ어버이 묘에 오르다......1819년 4월17일, 강진에서 해배된 후 돌아와서 참배

[上墓] 



나는 氣를 늦게 받아 났기에 / 我生受氣晩

아버지가 내 막내라 하시었는데 / 父曰嗟余季

언뜻 삼십 년을 지나는 동안에 / 忽忽三十年

한 번도 뜻을 기쁘게 못 해 드렸네 / 未或愉其志

무덤 속이 비록 어둡고 아득하지만 / 窀穸雖冥漠

옛사람은 여묘살이를 하였다오 / 昔人猶廬侍

멀리 생각건대 신유년 봄에는 / 尙憶辛酉春

통곡하며 묘소를 하직하고서 / 痛哭辭靈隧

말도 먹이지 못한 채 떠나면서 / 未暇秣馬行

금부의 관리에게 핍박당하였네 / 逼迫禁府吏

이후로는 영해 밖으로 떠돌면서 / 漂流嶺海外

구 년이 어언 두 번이 되었네 / 九載於焉二

봉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나무는 / 墳前一雙樹

가지 잎새가 예전처럼 푸르른데 / 柯葉依然翠

인생은 도리어 너만도 못하여 / 人生不如汝

버림받는 게 어이 그리도 쉬운고 / 棄捐何容易





ㅡ필자 견해를 재정리해본다.

"敗荷"는 "시들은 연잎"보다는 곧바로 "떨어진 蓮荷"라 옮길 수 있겠다.



 정약용 그 자신의 개인적 차원의 조락도 물론이지만,

그 "荷潭의 자식", "정씨집안 기대주"의 아쉬운 패배를 암시하는 차원에서

"하담의 荷"를 일부러 선택하여 "패하(敗荷)"라 명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인정하기 어려운 '참담한 패배'를 두고,

詩, "敗荷"를 통하여,

그 누구한테서 위로라도 받고싶고, 뭔가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그 고립된 처지, 그 처절하고 참담한 속마음(苦心)을 

그 자신도 모르게 살짝 바깥으로 드러내고 만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원제 "敗荷"를 다시 옮겨본다.



 ㅡ떨어진 연꽃(敗荷)



 들판에 새로 닥친 가을 기운이 / 野外新秋色

떨어진 蓮荷에 쓸쓸히 내려앉았네 / 蕭然上敗荷

한창 때 芳艶이야 이미 다했지만 / 已收芳艶了

苦心스런 그 마음을 어찌 알리요 / 奈此苦心何

하늘을 치받든 꽃대궁 여전하고 / 尙有擎天柄

잠긴 달 물결도 그대로 남았는데 / 猶餘蘸月波

그 누가 작은 악기라도 들어 / 誰將小絃管

날 위한 슬픈 노래 들려주려나 / 爲我度悲歌

덧글 ()

박형상  / 2012-09-13-16:06 삭제
ㅡ친구들, .....상당히 길어졋네만 .....

<시들은 연잎(1)>과 <떨어진 연꽃(2)>을 ....한번 대비해서 읽어주게나..

<시들은 연잎(1)>은 통설이고, <떨어진 연꽃(2)>은 내 독자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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