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 알려드립니다.
  • 본 사이트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준수합니다.
  • 회원은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내용과 타인의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및 기타 권리 를 침해하는 내용물에 대하여는 등록할 수 없으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주민번호, 휴대폰번호, 집주소, 혈액형, 직업 등의 게시나 등록을 금지합니다.
  • 만일 위와 같은 내용의 게시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게시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제목

정약용에게,'그가 왔다"
작성자박형상 작성일2012/07/24 07:33 조회수: 331

ㅡ정약용에게, '그가 왔다'



 



-"사람이 오다"라고 

간명하게 끝나는 정약용의 몇 詩가 있다.

그 詩題라는게 "사람 이름 + 至"로 그만이다.

어느날 정약용을 찾아온 친구, 지인.

그 사람이 너무 기뻐서 더 보태 설명하고 말 것이 없었다.

"그가 왔다!"



정약용은 내내 사람이 그리웠다.

어려운 벼슬살이, 가망없는 유배살이'로 친구마저 거의 없어졌다.

워낙 '대궁(大窮)'이라서

"남은 친구는 '이주신,윤무구' 두 명 뿐이다"고 자탄한 적도 있었다.



 서울 생활 중에는 '남고 윤지범'

남도 천애땅, 강진 유배기간엔 

그래도 '윤규렴,윤욱경' 해남 윤씨 외가집 일족이 반가왔고,

누구보다도 서로 죽이 맞은 '스님 혜장', 

강진까지 직접 찾아준 '파평윤씨 윤영희'가 고마왔다. 

그 송옹(외심) 윤영희는 해배 후에도 아주 가깝게 오갔다.



 기실 정약용이 '그가 왔다'고 맞이한 사람들,

그들도 알고보면, 사연이 있는 사람들,

남들보다 훨씬 편치 못한,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남고 윤지범과 송옹 윤영희는 평생 물먹은 환로(宦路),

당색이 남인이라서 벼슬살이 한번 제대로 못했다.

아마 '동병상련'의 정이 통했으리라.



"그가 왔다"

와준 것,본 것만으로 기뻤다.



 

ㅡ'남고'가 오다

[南皐至]...............1796년,34세,가을..남고가 수원(화음)에서 왔을 때이다.



화음의 외로운 객을 여기서 또 만나다니 / 華陰孤客此重逢

말쑥한 야인 티가 얼굴에 나타나네 / 野態蕭然上瘦容

한창 나무는 잎 늙는 걸 견뎌내지 못하지만 / 芳樹不堪成老葉

가을 산은 제 혼자서 새 모습을 꾸민다오 / 秋山能自作新峯

눈 앞의 희노애락 술이면 그만이고 / 眼前哀樂都憑酒

고요하게 살다 보니 종소리도 듣기 싫어 / 靜裏興居懶聽鍾

옥토 척토 관계 없이 풍년이라고 들리는데 / 聞道年豐均沃瘠

묻노라 너 어찌하여 일찍 귀농 않았던가 / 問渠何不早歸農



어스레 아침 해가 들창에 비쳐오니 / 曈曨初日上朝窓

숲 그림자 너울너울 새 그림자는 쌍쌍이네 / 林影鬖鬖鳥影雙

가을빛은 서에서 와 백악에 남아 있는데 / 秋色西來餘白嶽

동으로 가고픈 마음 창강과 같이 한없구나 / 歸心東出有滄江

닥쳐올 추위 걱정 매화하고나 상론할까 / 寒愁漸與梅相講

서릿발 견뎌내기 국화보다 못잖다오 / 霜氣唯應菊不降

늘그막에 친구 좋은 것 안 지는 오래지만 / 久識老蒼交結好

순후한 맛 풍기는 그것이 좋아서지 / 愛他風味近淳厖



 

ㅡ'남고'가 오다[南臯至] 

-정사년1월....................1797년,35세때이다



매화도 아직 있고 버들 가지 푸릇푸릇 / 梅花未落柳條新

서울에 봄이 들자 친구가 왔네그려 / 京國春回見故人

배 고프고 추웠지만 눈 속에서도 죽지 않고 / 雪裏飢寒能不死

밤 늦도록 등불 앞에서 우의를 서로 다지네 / 夜闌燈燭許相親

거듭거듭 성을 쌓고 망루를 또 세우고 / 粉城樓櫓重重設

화살 꽂고 기 들고 해마다 순행한다지 / 赤羽旌麾歲歲巡

화봉에는 은택이 더 많다고 들었는데 / 聞道華封恩澤厚

우리 함께 요임금의 수복 비는 백성 되세 / 爲君同作祝堯民



[주]화봉에는 백성 되세 : 그대 임지에 임금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니 그대도 우리와 함께 임금의 수복을 빌어드리세. 

요(堯) 임금의 시대에 화라는 땅의 봉강을 지키는 사람이 요 임금을 위하여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 

이 세 가지가 성취되도록 빌었다는 고사. 화봉삼축(華封三祝). 《莊子 天地》



ㅡ남고 윤지범(1752∼1821) 초명-윤지범(尹持範),자-이서(彛敍),호-남고(南皐)

   죽란시사 주맹(사백), 윤선도 후손이라는 이유로 '평생 어려운 벼슬살이'를 했다.

   1797년에 기껏,'임천군수'. 그것도 정조 임금의 특별배려로 가능했다.

   그런 선배의 불행한 삶을 정약용은 그를 기리는 '묘지명'으로 구구절절하게 정리했다.





ㅡ'혜장'이 오다

[惠藏至] 

-정묘년, 봄 ..............1807년 강진에 있을 때임



굳건하고 어질고 호탕한 사람 / 矯矯賢豪志

때로는 표연히 산을 나선다네 / 飄然時出林

눈 녹아 비탈길은 미끄럽고 / 雪消厓徑滑

모래 둘러싸여 들집이 움푹하네 / 沙繞野堂深

얼굴에는 산중의 즐거움 가득하고 / 滿面山中樂

세월 따라 변하는 몸 마음 안 쓴다네 / 安身歲暮心

말세 인심 대개가 비루하고 야박한데 / 末流多鄙薄

지금 이렇게 진실 솔직한 자도 있다네 / 眞率見如今



 ㅡ혜장(1772~1811), 대둔사 스님, 1805년 가을, 백련사에서 첫 만남이 있었다.

정약용의 제자,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에 여러모로 큰 큰 도움이 된다.



 

ㅡ'윤금호(규렴)'가 오다.

[琴湖 尹奎濂 至].............1807년,47세,4월, 강진에 있을 때이다.



오갈이 든 궁한 신세 날 찾는 자 다 싫은데 / 窮居畏約厭人過

눈물바람으로 서로 보니 그대가 웬일인가 / 沾灑相看奈爾何

다정한 벗 말로에 와 흙 버리듯 다 버렸는데 / 末路交歡如棄土

대를 이은 가문 전통 그 여파는 있네그려 / 故家文采見餘波

세 번 쫓겨난 전계가 슬퍼했단 말 못 들었고 / 不聞展季悲三黜

구가를 지어 부른 영균을 꽤 배웠다네 / 頗學靈均作九歌

어찌하면 숲 속에다 이웃 가까이 집을 짓고 / 安得園林卜隣近

남은 생애를 우리 몽땅 함께 지내며 보내볼까 / 盡將餘景共婆娑



[주]세 번 쫓겨난 전계 : 노(魯)의 대부(大夫) 유하혜(柳下惠)가 사사(士師)로서 세 번씩이나 물리침을 당하고서도 노 나라를 떠나지 않았음. 그는 자(字)가 계(季)이고 이름은 획(獲)이다. 《荀子 成相》

[구가를 …… 영균 : 초(楚)의 굴원(屈原)이 내쫓김을 당한 뒤 동황태일(東皇太一)ㆍ운중군(雲中君)ㆍ상부인(湘夫人) 등 구변의 노래를 지어 불렀음. 영균(靈均)은 굴원의 자(字)임. 《楚辭 九歌》



ㅡ금호 윤규렴 .....외가쪽 사람.. 다산보다 몇 살이 어려, 서울 시절부터 지내던 사이였다. 

                         1807년 4월, 그가 기별없이 다산을 찾아왔다. 

 

 

ㅡ'욱경'이 오다

[燠卿至]........1808년,47세, 가을, 강진에 있을 때이다.



늙어가면서 내 살던 곳도 잊었더니 / 漸老忘吾土

그래도 살아서 네 얼굴 보는구나 / 猶生見汝顔

유랑민 집을 빌려 붙여 살고 / 借居依雁戶

먹기 위해 고기잡이 가까이한단다 / 謀食近魚蠻

붉은 꽃숲 아래서 빗소리 듣고 / 聽雨紅林下

푸른 조릿대 사이에서 등불 돋우며 / 挑燈翠篠間

마음이 아픈 것은 건릉에 있는 나무 / 傷心健陵樹

가을빛을 멀어 못 잡는 것이란다 / 秋色杳難攀



[주]건릉(健陵) :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정조(正祖)의 능.



ㅡ윤욱경 -  외가집 해남 사람.1798년에 서울 정약용 집에 찾아왔었다. 

          정약용이 각별하게 아꼈던 '그의 동생 윤지익(자-계진)'은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그 동생 윤계진 묘지명을 정약용이 써주었다.



 

ㅡ'송옹'이 오다

[淞翁至]  

-병술년 9월23일 ...........1826년,65세,9월..해배 후 고향에 돌아와 있을 때이다.



한 번 서로 축하하고 한 번 서로 쳐다보니 / 一回相慶一相看

하늘이 우리를 위해 특별히 선심 쓴 거로세 / 天爲吾曹特例寬

벼논 바람 쌀쌀한데 산길은 멀기만 하고 / 稫稄風凄山路遠

국화 그림자 거꾸로 비쳐와 물가 정자 썰렁쿠려 / 菊花影倒水亭寒

친구들 드물어라 오래 산 것이 부끄럽고 / 親交屈指羞留滯

세상길에 머리 돌려라 험난함이 놀라운데 / 踐履回頭駭險難

오늘 밤엔 스스로 협착한 국량 넓히어 / 今夜自恢河鼠量

그대 홀로 마심을 연민하여 힘써 즐긴다오 / 憐君獨酌强爲歡

   ....송파수작(松坡酬酢) 에서



 ㅡ송옹 윤영희(1761~1828 ?), 파평 윤씨, 남인, 자-외심,송옹

                  1786-문과 급제, 초계문신,홍문관 부교리,  

                   1791-진안 현감,가리포 첨사,..파직,... 1794-정언,

                 -1791년도 '시관 사건'으로 관직생활 내내 '파직,좌천,유배,투옥,지방 한직'를 거듭한다,

                   1819-은거하다가 '교리' 재등용  1826-귀거



                  ㅡ정약용 만년을 포함하여 변치 아니한 '평생 친구'이다. 

                  ㅡ1805년경에 강진 유배지를 직접 찾아온 일도 있다.

                  -정약용은 주역연구 결과를 윤영희에게 처음으로 알리며 이해를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덧글 ()

허주회  / 2012-07-24-09:34 삭제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멀리 있어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전화만 와도  반갑고 하면 더 좋고,,  

그래도 "유붕자원방래하니 불역 낙호아"가 으뜸이겠지.
송기병  / 2012-07-24-18:55 삭제
지독한 사랑!   '다산 사랑'  

자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네마는...

박 변! '다산 사랑'도 좋지만 운동도 게을리 마시게, 강건해야 '권토중래'도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박형상  / 2012-07-25-11:56 삭제
ㅡ'주회至'!

ㅡ'기병至'!
정완식  / 2012-07-26-20:21 삭제
박 변, 더위에 잘 지내시는지? 나도 자네가 올려주는 어려운 글 덕분에 더운 줄 모르고 열씨미 지내고 있네. 감사~
박형상  / 2012-07-31-14:20 삭제
ㅡ'완식至'!

연번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파일
12 ㅡ조선의 차문화, '미공개 편지'부분에 관련하여 (5) 박형상 2012/10/30 291  
11 ㅡ"다반향초"에 관한 또 하나의 의문 (25) 박형상 2012/10/28 347  
10 ㅡ정약용과 '황엽사' (8) 박형상 2012/10/13 343  
9 정약용과 '떨어진 연꽃'(2) (1) 박형상 2012/09/13 317  
8 정약용과 '시들은 연잎(1)' (4) 박형상 2012/09/12 331  
7 정약용과 '불식(不識),모르겠네' (10) 박형상 2012/08/12 461  
6 정약용과 '시참,수조가' (4) 박형상 2012/07/31 340  
5 현재 보고 있는 게시글정약용에게,'그가 왔다" (5) 박형상 2012/07/24 331  
4 정약용과 '삼장사'(1) (10) 박형상 2012/07/19 366  
3 정약용과 '이학규' (8) 박형상 2012/07/14 346  
2    답변글[RE]Re..정약용과 '이학규' (0) 박형상 2012/07/14 260  
1 정약용과 '여마동' (7) 박형상 2012/07/10 344  

맨처음이전 5페이지123다음 5페이지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