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정약용과 '삼장사'(1)
-정약용은 18세이던 1779년에 아내 홍씨와 함께 '장인 홍화보'가 절도사로 근무하는 진주에 가게된다.
거기서 마침 '진주 의기사' 사당을 보수하던 장인의 부탁으로 "진주 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를 짓게된다.
그 記文에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라 하면서
'삼장사'를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 기문에 덧붙인 "촉석회고" 시에는 '壬辰之難。三壯士殉節於此'라고 부기해놓고 있다.
1795년 봄,34세 때에도"送이호군격 爲진양절도사"라는 시에서 '진주 삼장사'를 언급하였다.
또 '목민심서, 병전육조'에서도 '촉석루下삼장사'를 말하고 있다.
*金千鎰,崔慶會,黃進等。臨死作詩曰。
矗石樓下三壯士。一杯笑指長江水。長江萬古流滔滔。波不竭兮魂不死。
其後 申維翰作詩曰。天地報君三壯士。江山留客一高樓。
그런데 다산 선생의 詩를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 각주' 태도는 여러모로 미흡 모호하다,
'진주 삼장사'에 관련하여 '본디 삼장사'가 따로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본디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키는데,
다산은 선조 26년(1593) 6월 진주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9주야를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은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황진(黃進)-또는 고종후'을 가리킨 것이다" 라고만 말하였다.
이런 입장에 있는 일부 견해는 영남에서 말하는 삼장사는 '김성일,조종도,이노'이고
호남에서 말하는 삼장사는 '김천일,최경회,황진(고종후)'라고 줄여 구별해버린다.
한편,진주 촉석루에는 영남 유림이 1963년에 '삼장사추모계' 명의로 세운 '촉석루중삼장사 기실비"가 있다.
여기에는 '김성일,조종도.이노', 영남 선비 세 분를 '삼장사'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니 '1593년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한 세 분'을 응당 '진주 삼장사'로 지칭할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지식을 가지고 진주 촉석루를 방문하는 일반인들로서는 크나큰 혼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정리해본다.
우선, 다산 정약용의 입장을 살펴본다.
젊은 정약용의 글에 등장하는 '삼장사'는 '순절 삼장사'라는 제한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계사년,'진주성 2차싸움에서 순사한 세 분'을 '진주 삼장사'로 지칭하였을 뿐이다.
(정약용의 장인인 당시 진양절도사 홍화보의 詩도 그렇게 되어있다)
정약용의 심중에는 이른바 '영남 삼장사'는 아예 없었다.
나중에 '목민심서'에 가서도 (후일 영호남간에 논란될 '삼장사' 시를 두고)
'김천일,최경회,황진' 세 사람의 '임사작시(臨死作詩)'로 소개하고 있다.
한편 1803년경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진주 촉석루에 가보았던,
진주 유배객 '김려(1766~1822)'의 글에도 '순절한 삼장사'가 나올 뿐이다.
그런데 '삼장사 논란'에서 먼저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른바 영남 삼장사중의 '김성일 선생'은 진주성 2차 싸움 이전에 이미 병사하였다는 사정이다.
나머지 '조종도,이노' 두 분도 진주성 2차 싸움에는 직접 참여한 바가 없다는 점이다.
'이노' 같은 분은 임진난에 관련한 '선무원종공신' 명단에도 아예 없었다.
(단지 그 200년후 순조대에 이르러서야 추증이 되고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호남 유림간에 왜 '진주 삼장사' 논란이 벌어졌던(벌어지고있는) 것일까?
영남의 일부 역사교수들까지 가세하여 왜 '영남 삼장사'를 고집하는 것일까?
영남유림측 주장은 '촉석루中삼장사'라는 詩를 김성일 선생이 먼저 지었다는 이유때문이다.
'삼장사'란 용어와 詩文의 연고권을 내세운 것이다.
또 '이노'가 쓴 '용사일기'에도 그 '촉석루中삼장사' 詩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다시 살핀다.
해당기록의 초간본이 아닌,재간본에 부록형식으로 병기,추기되었다는 '서지적 논란'은 별론으로 하고,
설령 그 詩를 학봉 김성일 선생이 먼저 썼다한들,
진주성 2차싸움에 참여하지도 아니했고, 순사한 바도 없는 그 세 분을 두고서
'촉석루 삼장사'로 모셔 부르기는 뭔가 부족하고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일 아닐까?
그런 詩를 짓게된 연유를 들어보아도 역시 그렇다.
임진년,진주성 1차 싸움도 일어나기 전에 '김성일,조종도,이노' 세 분이 촉석루 안에 모였는데,
'조종도'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물에 빠져 자살하자'고 제안하자,
이에 '김성일'이 이를 만류하면서 '후일을 기약하자'고 그런 '삼장사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학봉집 부록,연보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이 처음 진주에 이르렀을 때, 목사 이경(李璥)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숨어 있었으며,
성은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선생은 '조종도, 이노'와 함께 눈을 들어 산하(山河)를 바라보다가 분통함을 참지 못하였다.
'조종도'가 손을 잡고 함께 강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한번 죽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대로 죽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
서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나서 학봉 선생이 '삼장사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코믹하다할 정도로 그 사연이 미미하고 기대에 못 미친다.
그럼에도 '촉석루中삼장사 기실비'만을 진주 촉석루에 세워두고서
그 세 분만을 떼어내 '진주 삼장사'라 따로 기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이 '삼장사'를 존숭 추모함은 그런 연유로 지어진 '삼장사'라는 문학적 시문 때문인가?
그 진주성 2차 싸움에서 몸바쳐 순절했던 역사적 비극 때문인가?
노블레스 오블레쥬, 싸우지 않고 죽지 않했다면 '삼장사'라 감히 칭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詩文만을 남기고 간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를 생각할 수 있는가?
그래도 '영남 삼장사'라야만 옳고, '촉석루中삼장사'를 굳이 따져야한다면
아주 쉽고 편하고 적확한 방법이 있겠다.
'촉석루記文삼장사'와 '촉석루殉節삼장사'로 구별하면 될 것이다.
정약용 선생이 '촉석루下삼장사'라 표현한 만큼
'촉석루 안에서 詩를 읊은 분들'과 '촉석루 아래로 순사한 분들'을
'촉석루中삼장사'와 '촉석루下삼장사'로 구별해주면 될 것이다.
(다산 선생이 '촉석루下..'라는 표현을 하게된 이유가 혹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겟다.
장인이 먼저 진양절도사였다가 나중에는 그의 아버지 정재원이 '진주 목사'로 가게되어,
다산 선생도 그 나름대로 진주 사정이나 '진주 삼장사'에 정통하게 될만한 입장이다)
몇해전 진주 시의원 한분이 '진주 삼장사'에 관한 역사의식의 혼돈과 불편함을 지적하면서
'진주 삼장사비를 따로 세우자'고 용기있게 제안한 바도 있었다.
백번 양보하여 학봉선생이 지었다는 '촉석루中삼장사'詩에 어떤 가치가 있다하더라도
순절한 세 분, '진주 삼장사'와 혼동을 피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보다 적절한 위치에
'학봉선생 촉석루 시비'정도라면 족하지 않겠는가?
학봉선생 문집과 연보에도 '촉석루中삼장사'가 아닌, '촉석루'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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