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정약용과 '이학규'
-다산 정약용 (1762~1836)은 그 훌륭한 천품과 자질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진대로 남다르게 불운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 시절 그에 못지않게 불행한 이가 또 있었다.
아니 불행만큼은 더 했을지도 모른다.
'낙하생(성수) 이학규 (1770~1835)',
다산보다 8년 늦으나 1년 먼저 갔다.
벼슬이 없었음에도, 서교를 믿지 아니했음에도
'邪學죄인'이 되어
다산보다 더 오랜 유배를 당했다.
'남인 출신'에다가
나중에는 남인의 '차세대 재목감'이란 이유였다.
그의 남다른 文材가 시샘을 받은 것이리라.
벼슬 없이도 젊은 나이에 규장각에 나가 '규장전운'의 교정,
'어제홍재전서'의 수교를 보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 집안 사람들,
여주 이씨, 외조부 이용휴, 외삼촌 이가환,
같은 평창 이씨, 9촌숙 이승훈,이치훈
전형적 남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부인 나주 정씨가 정약용과 10촌지간이었다.
그 때문에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능주에 유배를 갔다.
그런 일을 당한 후배 이학규를 두고서
"서학을 아니했는데 이름이 있어 시기 비방을 얻은 것이다"고
다산 선생도 안타까와 했다.
1801년,
장기에서 강진으로 정약용이 적소를 옮겨올 때
이학규는 능주에서 경상도 김해로 이배를 갔다.
'도합 24년',
긴 긴 유배살이를 했다.
청춘이 고스란히 망가졌다.
그 유배 기간에 다산과 글로써 교류했다.
다산의 '탐진악부''탐진농가,탐진어가,탐진촌요''전간기사'를 보고
그는 '영남악부''강창농가,남호어가,성동초가''기경가사'를 지었다.
다산 선생을 본받아 열심히 공부하며 여러 분야에 많은 글을 남겼다.
다산 선생보다 8년을 더 살고
정작 해배된 후에도
그 집안이 이미 망하고 말았기에
달리 돌아가 머무를 곳도 없었고,
그 여생 또한 쓸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첨도 못했다.
때론 남양주에 있는 다산 선생을 찾아가기도 했고,
'자하 신위(1769~1845)'와 만년 교류를 했었다.
뜬 구름 세상에서
오직 '자하 신위'가 그를 알아주었다
그는 '성수 이학규'의 부음을 듣고
'애도시 3수'를 지었다.
그 애도시의 마지막 詩이다.
"이학규와 정약용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있다.
哀 李醒叟
ㅡ 자하 신위
君與茶山一代才。그대와 다산은 일대의 재사이니
若論風品似歐梅。시품을 논하면 '구양수와 '매요신'이로다
悲歌畢竟無窮達。비가는 끝내 궁달과 무관했고
僞體堪憑有別裁。위체는 별재에 비길만 하였다.
西海賜環靑眼在。풀려난 몸 서해에서 반갑게 만났더니
忠州傳訃大江來。충주에서 부음이 큰 강 건너 전해왔네
吾衰更爲斯人慟。나 쇠한 몸으로 이 사람 애통해 하오니
誰辨黃鍾瓦缶雷。어느 누가 '황종' '와부' 분별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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