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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용성"에 대해
작성자윤영종 작성일2012/03/14 13:08 조회수: 332

우리의 동기 박용성(여수고)에 대해 쓰여있는 여수 동부매일 신문의 글을 옮겨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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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습관처럼 공교육의 문제를 얘기하지만 여수에는 각 과목별로 우수한 교사들이 많은 편입니다. 그 중에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는 분도 계십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여수고등학교 박용성 선생님입니다. 이분은 대한민국 최고의 논술교사 중에 한 사람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분입니다. 이분과 어느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할 때는 그 치열함과 논리 정연함에 저도 긴장을 하게 됩니다. 이분과 함께 대화를 하면 1시간이 10분 같고 2시간도 10분 같습니다. 

 

박용성 선생님이 <학교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1년 동안 동부매일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박용성 선생님은 이 칼럼을 통해 <학교>하면 <폭력>이 떠오르는 요즘에 그래도 아직 학교는 살만한 곳이라고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조단조단 말해 주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우리 시민들께서 많이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학교 안의 따뜻한 세상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주 한 번씩 같이 공유하기로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세상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선생님의 글의 세상도 함께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학교 가는 길 1

 

사랑은 가끔 자본주의를 뛰어넘는다

 

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인다. 자잘한 나무만, 풀만, 벌레만, 개울만, 바위만, 보고 살다가, 그렇게 눈이 좁아져 있다가, 문득 산에서 나오면 그것들이, 그 나무들이, 그 풀들이, 그 벌레들이, 그 개울들이, 그 바위들이, 어우러져 얼마나 아름다운 산을 만드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오래 전, 학교를 나와서 몇 년 쉰 적이 있다. 이 지겨운 수업만 안 하면 선생 노릇도 해 볼 만하다고, 농담처럼 진담처럼 그렇게 지루해하다가, 덜컥 학교를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은 많았다. 그렇게 사는 재미가 쏠쏠했다. 제법 태깔도 났다.



그런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세 해가 갔다. 가끔 외로웠다. 그럴 때면 다니던 학교에 가서, 교문 밖에서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나온 아이가 “아저씨” 하고 나를 부를 무렵, 내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해직은 호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아내는 내가 민망해할까 봐 서랍에다 용돈을 넣어두었지만, 그래도 아니었다. 해고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궁핍이 주는 고통보다 큰 것은 영혼이 고갈되는 느낌에서 왔다. 그러다 서약서를 썼나? 어쨌든 학교로 돌아왔다, 비틀거리면서. 



그런데 거기에 아이들이 있었다. 때로는 귀찮게, 짜증나게, 밉게까지 보인 아이들이, 그 나무들이, 그 풀들이, 그 벌레들이, 그 개울들이, 그 바위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아아,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로. 그것들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오랫동안.



그러고서 18년이 지났다. 물론 처음처럼 가슴은 뛰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버릇처럼 하루를, 또 하루를 죽여 나갔다.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정물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고, 나도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박제처럼, 그 죽음 같은 고요에, 몸을 맡겼다. 그게 편했다.

그러다 아팠다. 지난 여름, 병원에 몸을 누였다. 수술대에 세 번이나 올라가면서, 가을이 왔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다시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이 나를 눌렀다. 정체 모를 그 짐은 감당하기가 힘겨웠고, 함께 엄습해 오는 공포는 정말이지 두려웠다. 



하지만 신은 내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그리고 ‘선생’이 되었다. 잘 살아야겠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잘 해야겠다, 그 마음으로 돌아왔다. 신께서는 잠깐 산에서 나를 끌어내리시더니, 나를 다시 산 속 오두막으로 돌려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서른세 명의 ‘학생’이 있었다. 

 

강양두 강영민 김민재 김현승 박준용 서국환 서민기 손현석 송민수 송현욱 신희원 이승재 이창민 정현명 고동민 공명현 김동화 김보선 김영광 김의진 김지혁 김형준 노경호 박경훈 박진성 선준상 이기영 이용진 임승현 전명석 최강건 황원택 황창환 

 

나는 누가 나무인지, 풀인지, 벌레인지, 개울인지, 바위인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그들을 나무로 풀로 벌레로 자라게 하고, 개울로 바위로 흐르게 하고, 그리하여 끝내는 더욱 푸르게 해야겠다는, 그래서 생명 넘치는 산으로 나도 함께 어우러져야겠다는 생각뿐. 그래서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이 편지를 쓴다.

 

그대가 내게 저녁 한 끼를 사 준다면,

저녁 밥값보다 많은 차비를 들여서라도

내, 달려가리 그대에게.

 - ‘사랑은 가끔 자본주의를 뛰어넘는다’에서

덧글 ()

이용균  / 2012-03-15-12:08 삭제
상당히 오래전 전교조 대표로 나와

 방송토론에서

논리정연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박용성 선생의 모습이

아직도 나에게는 인상깊은 장면의 하나로 다가오곤 한다.
이세경  / 2012-03-16-22:53 삭제
용성이 졸업 직후에 보고 처음 대하네 너무 반갑다 글은 곧 사람이라 

올곧고 순정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주옥같은 글이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