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 알려드립니다.
  • 본 사이트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준수합니다.
  • 회원은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내용과 타인의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및 기타 권리 를 침해하는 내용물에 대하여는 등록할 수 없으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주민번호, 휴대폰번호, 집주소, 혈액형, 직업 등의 게시나 등록을 금지합니다.
  • 만일 위와 같은 내용의 게시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게시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제목

역사속의 10월 26일
작성자김원배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1/10/25 16:54 조회수: 333


10월 26일 의미있는 역사가 있었던 날입니다.


1597년 10월 26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13척의 왜선을 격침 시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명박문을 살해합니다.

1920년 10월 26일,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지역에서 일본군에 최종 대승을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다까끼 마사오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민들은 자위대 창설식 행사에 참가한 자를 심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



[청산리 대첩]


1. 정의: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부터 26일 새벽까지 일본군과 독립군 연합부대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2. 참전부대

ⓐ일본측

관동군
일본육군 5개 사단
일본 항공대

ⓑ독립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국민회군(國民會軍)
한민회군(韓民會軍)
신민단(新民團 = 대한신민회)
의민단(義民團)
광보단(光保團)


3.배경

1920년 6월 화룡현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에게 일본군이 대패하자, 일본군 사령부는
대대적인 독립군 소탕작전을 계획하고 전개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출병할 명분을 얻기 위해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훈춘사건이란 일본군이
중국 마적단에게 지시하여 훈춘성을 공격하게끔 하여 중국인 70명, 조선인 7명,
다수의 일본인을 살해하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인은 3개 사단을 만주로 출동시켰다.
이후 일본은 중국측에 17일 0시를 기해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4. 경과


ⓐ제 1전투: 청산리 전투

일시: 10월 21일 오전 9시
행동부대: 북로군정서
지휘관: 김좌진, 이범석
장소: 청신리골짜기 백운평 부근
대상: 야마다, 가노 보병연대
작전: 유인매복


여기에는 오솔길 하나만 있었고 양쪽에 절벽이 있다. 김좌진이 1제대, 이범석이 2제대를
지휘하였고, 골짜기로 유인하여 보병연대 하나를 전멸시켰다.
독립군은 완벽히 엄폐되어 있어서 직접 공격이 통하지 않았고, 당황한 일본군은 기관총을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매복장소를 알 수 없어서 맞지 않았다.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절벽 위에 있는 독립군을 제거하고자 별동대를 보냈으나
이마저도 독립군의 사격에 전멸당하였고, 남은 적들도 독립군의 집중 사격을 견디지 못해
퇴각하였다. 독립군측 피해는 미미하였으나, 일본군은 여기서만 300명이 죽었다.


ⓑ제 2전투: 완루구 전투

일시: 10월 21일 오후~22일 새벽
행동부대: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한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광보단 연합부대
지휘관: 홍범도
장소: 이도구 완루구
대상: 일본군 동지대
작전: 유격교란


여기는 숲이었는데, 홍범도의 부대를 가운데 두고 양 쪽에서 일본군들이 진격해왔다.
홍범도는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 적군 진격 시차를 교묘히 이용하여 가운데로 퇴각하였다.
곧 양쪽에서 오던 일본군은 서로를 홍범도의 독립군으로 착각하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작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독립군의 군복이 일본군 군복과 얼추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측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일본군끼리 싸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 3전투: 천수평 전투

일시: 10월 22일 새벽
행동부대: 북로군정서
지휘관: 김좌진
장소: 이도구 천수평
대상: 기병 제 27연대 전초기병중대
작전: 기습


독립군이 새벽에 기습을 감행하여 무방비상태의 기병대를 전멸시켰다.
김좌진 부대는 이 작전 후 곧바로 홍범도와 연합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제 4전투: 874고지 전투

일시: 10월 22일 새벽
행동부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지휘관: 김좌진, 홍범도
장소: 이도구 어랑촌
대상: 가노 대좌 등 일본군 정규부대 5000명
작전: 방어전

이 전투는 청산리 대첩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랜시간 격전을 벌인 전투이다.
독립군 2천명과 일본군 5천명이 싸웠으며, 일본군의 화력이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이 지형과 전술을 잘 이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어랑촌 아낙네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총알을 뚫고 독립군에게 조달했다는 일화와,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이 기관총을 몸에
묶고 고지로 올라오는 일본군에게 탄환이 떨어질 때 까지 난사하다가 전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휘관 가노가 죽고, 1천명이 넘는 전상자를 냈으며
독립군은 1백명이 죽었다.

ⓔ제 5전투: 맹개골 전투

일시: 10월 23일 오후 3시
행동부대: 북로군정서
장소: 맹개골 삼림
지휘관: 김좌진
대상: 일본군 기병 1개 소대 (30명)

ⓕ제 6전투: 만기구 전투1,2

일시: 10월 23일 저녁/ 24일
행동부대: 북로군정서
지휘관: 김좌진
장소: 맹개골에서 20리 떨어진 만기구 삼림지대
대상: 일본군 보병 50명/ 일본군 100명


ⓖ제 7전투: 천보산 전투

일시: 10월 24일
행동부대: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지휘관: 이범석, 홍범도
장소: 천보산
대상: 일본군 정규부대
작전: 연합공격

ⓗ제 8전투: 고동하 전투

일시: 10월 25일 ~ 26일
행동부대: 대한독립군
지휘관: 홍범도
장소: 고동하계곡 밀림지대
대상: 일본군 2개 소대
작전: 유격기습

고동하 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10월 26일 낮에 백두산 북쪽 안도현 방면으로 철수함으로써
청산리 독립전쟁은 끝이났다.
일본군은 2천명의 전사자와 1천 3백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이에 격분하여 곧 간도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김현수

덧글 ()

김여환  / 2011-10-26-04:05 삭제
나쁜놈들은 죄다 10월 26일에 뒤졌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