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인순이의 본명)이 부른 '아버지'가 화제다.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래왔는지/ 눈물이 말해준다
점점 멀어져 가버린/ 쓸쓸했던 뒷모습에/ 내 가슴이 다시 아파온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
제발 내 얘길 들어주세요/ 시간이 필요해요
(중 략)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인순이의 '아버지'를 듣고 많은 사람이 감동했다고 한다.
뉴욕 카아네기홀 무대에 두번씩이나 섰던 인순이이기에 그녀의 가창력을 논하는 것은 찌찔이 소릴 듣기 쉬울 것이다.
그러한 인순이이긴 하지만,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팠던 것은 그 가창력을 뛰어넘는 그녀의 풍부한 감성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혼혈아인 김인순의 아버지는 이국만리 미국이란 땅에 떨어져 사는 흑인 아버지이니 그녀의 감정은 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우리와 같은 세대(김인순은 57년생)를 살았던 김인순이기에 나 또한 매우 울컥했었던 모냥이다.
일요일 초저녁, 집에서 인순이 노래를 TV를 롱해서 들었던 나는 어느새
'인사동'이란 이름을 가진 동네 주막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순이가, 이미 고인이 되신 나의 '아버지'를 불러냈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신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호남민국에서도 최남단, 바다가 가까운 오지에서 태어났던 나는 아버지의 농삿일을 도우면서 자랐다.
고교시절 난 광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어느 쌀쌀한 초겨울날 나의 아버지께서 광주엘 올라오셨다.
농한기를 이용해서 아들에게 쌀과 김을 갖다 주러 오신 것이다.
아들과는 달리, 평소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나의 아버지는 "밥 굶지 말아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이내 일어나셨다.
자취집 골목길을 총총히 빠져나가시는 아버지의 휜 등과 그 뒷모습이 너무도 쓸쓸하게 보여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그 말 한마디가 그때는 왜 그리도 힘들었던지......
40년 가까이 지난 이제서야, 그것도 술기운에, 뇌까리는 것이었다. "아버지! 사랑했습니다. 등이 잔뜩 휘었던 나의 농사꾼 아버지!!"
난 어느덧 막걸리를 두 말째 비우고 있었고, 내 곁에선 나와 동년배인, 그 주막의 주모가 함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밤이 꽤 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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