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HOME
  • 자유게시판
  • 알려드립니다.
  • 본 사이트는 대한민국 저작권법을 준수합니다.
  • 회원은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내용과 타인의 저작권을 포함한 지적재산권 및 기타 권리 를 침해하는 내용물에 대하여는 등록할 수 없으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주민번호, 휴대폰번호, 집주소, 혈액형, 직업 등의 게시나 등록을 금지합니다.
  • 만일 위와 같은 내용의 게시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게시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제목

우리는 무엇으로 만나나
작성자김원배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11/08/23 11:18 조회수: 349


♧ 열가지 중 아홉 가지가 떠나더라도 당신을 위한 한 가지가 남아 있다면 충분하다.

- 루 쉰-


우리는 무엇으로 만나나


라티 어원을 가진 단어 페르소나(Persona)는 원래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의 배우인 인간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원에 충실하게는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특히 그의 실제 성격과는 다른 한 개인의 모습,


 


인상'을 뜻하며, 어의의 변천에 따른 철학 용어로는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자유로이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 개별적 존재'라는 뜻이다.


 




타인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실제의 나는 어떠하고, 나는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


 


내 경우 이러하다. 좀 먼 타자는 나를 '매우 냉철하고 지적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는 주도면밀히


 


성취하는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으로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매우 감정적이며, 주도면밀하기는커녕 하고자 하는 바를


 


그냥 퍽 하다가 운 좋게 이루기도, 철퇴를 맞기도 하는 비정규직(상태가 좋을 땐 프리랜서)여성'이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깊이 이해하려 하고 진리를 궁금해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인지 늘


 


고민하는 '여정에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남들이 보는 내가 단단한 차돌 같다면, 실제의 나는 구멍 뻥뻥 뚫린 현무암이고,

보이고 싶은 나는 열심히 물을 머금었다 뿜었다 하며 단련되는 현무암에 가깝다.

다행인 것은 실제의 나와 보이고 싶은 나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인 자기 개념(Self-concept)에 그다지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게


 


없다는 건 건강한 소통의 시작이다. 자기를 어느 정도 공개(Self-disclosure)해야 하는 소통의 장에서


 


 두꺼운 심리적 화장을 하지 않고 마음의 '쌩얼'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쌩얼'을 보이는데, 그게 보기 싫고 이미지의 혼란을 가져온다며 내게 구멍을 메우고

차돌처럼 화장하고 나오라고 강요할 권리가 타인에겐 없다.

탈을 벗을 권리, 실제 나로서의 페르소나를 고요히 선언할 권리는 내게 있다.

이미지의 혼란을 수습하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말을 직업으로 해 왔고, 말에 대해 가르치고 글을 쓰며 내가 얻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러한 자유로움이다. 이름 글자의 이니셜을 딴 아이디가 jayoo(자유)인 것은 참으로 내게


 


잘 어울리는 우연이다. 어떤 말로도 자기를 수식할 수 없고, 아닌 것을 그런 것처럼 만들 수 없다.

아이디 같은 우연이 있을 뿐. 말 밖에 자기가 있지 않다. 말 안에 자기가 있을 뿐이다.

한때 차돌처럼 빈틈없이 보인다면 그렇게 살리라 각오도 해 봤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하다 여겼지만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니고, 나는 다만 '나로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물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낯선 타인을 만났을 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매끈매끈한 이미지와는 다른,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구멍 숭숭 뚫린 나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말과 행동을 한다.

물론 첫인상에 결박되어 생각처럼 잘 안되는 경우도 있다. 최근 한 기업에서 있었던 강연에서도 그랬다.

회사 상부에서 마련한 교육에 초빙된 강사로서, 나는 낯선 그들에게 회사 자체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아래로부터의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무기력한 조직원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페르소나로서의

자신의 소통을 돌아보는 시간이길 바랐는데 잘되지 않았다. 나의 내공이 부족했거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경우와 직녀는 일 년에 한 번 칠석날 까마귀와 까치가 몸을 잇대어 놓아 주는

오작교에서 만나 사랑의 회포를 푼다. 새벽닭이 울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또다시 긴 이별이다.

견우는 밭을 갈고 직녀는 베를 짜며 다시금 홀로 지내야 한다.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소중한 만남,

다시는 못 볼지 모르는 스쳐가는 인연 사이에서 우리는 상대를, 타인을, 무엇으로 만나나.

마음의 '쌩얼'이 정답이 아닐까.

우리 견우와 직녀들이 밭을 갈고 베를 짜며 다져야 할 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보일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다.

덧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