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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고이 가소서  이창학
작성자최장일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06/05/22 11:21 조회수: 303

이창학 은 고 김세진ㆍ이재호 추모가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곡ㆍ작사자입니다


 


 


그 날은 오리라, 자유의 넋으로 살아.

벗이여 고이 가소서, 그대 뒤를 따르리니.

그날은 오리라, 해방으로 물결 춤추는

벗이여 고이 가소서, 투쟁으로 함께 하리니.

그대 타는 불길로, 그대 노여움으로

반역의 어두움 뒤집어 새날 새날을 여는구나.

그날은 오리라, 가자 이제 생명을 걸고.

벗이여 새날이 온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

벌써 20년인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던데, 그새 강산은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나 보다. 그러나 세월의 더께를 인정하기가 참 힘들다. 모두 그렇겠지만 기억은 아직 뇌리에 선하고, 그 노랫소리들은 귀에 울리고 있기에.

난 부끄러웠다

81학번인 나는 졸업 후에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학교 동아리 '메아리'에서 하던 일의 연장이기도 했고, 그 땐 그렇지만 내겐 당연한 선택이었다. 전공이 원자핵공학이었지만 졸업 후 첫해에는 감리교청년연합회 문화선교위원회의 노래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김세진·이재호 두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나던 86년, 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노래분과 '새벽'을 후배들과 다시 조직하면서 창작·공연 활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직도 또렷한 기억. 86년 전방입소 반대투쟁이었다. 두 친구가 우리 곁을 떠난 4월 28일이 월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 일요일에 TV 뉴스에선 서울의대 점거 농성 기도가 진압되었다는 말로 들끓었고. 그래서 난 서울대의 전방입소 반대투쟁은 그리 끝날 것이라고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그날 4월 28일. 토론 세미나에 정치적 시위나 행사, 그리고 조직적인 창작·공연 활동에 눈코뜰 새 없이 보내던 내게 오랜만의 하루 휴가가 주어졌다. 과천에 살고 있던 나는 못 보았던 책들을 좀 집중해서 읽고 싶어 과천의 도서관에 갔었다. 저녁 늦은 무렵, 커피나 한잔하고 쉬러 나오는데, 잘 알던 서울대 후배들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서울대생이 시위 도중 자기 몸을 불살랐단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바로 그 날이었다.

광주민주항쟁 다음해인 81년도에 입학한 나로서는 학우들의 죽음이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학 1학년 때 김태훈 선배의 도서관 투신을 목격했고, 그리고 황정하 선배가 시위를 위해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서지면서 떠나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그리고 녹화사업으로 군에 죽어간 학생들의 소식들….

하지만 불을 살라 자기 몸을 태우고 절규하면서 떠나간 후배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정말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전태일 열사도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내겐 좀 먼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두 후배들이다. 그러나 같은 캠퍼스 아래에서 얼굴 부딪히며 울며 웃고 함께 하던 어느 83학번 후배들과 다름없을 것이라 여겨지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슬픔이 밀려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사회변혁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난 이런 후배들에 비추어 이 비극적이고 폭압의 시대를 과연 떳떳하게 항거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많은 반문을 해보고, 뒤돌아보고… 하지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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