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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태훈 열사의 넋을 오늘에 다시 기리며...
작성자최장일 이메일[메일보내기] 작성일2006/05/22 10:36 조회수: 165

또 5월 27일이다|    ----------  소소한 일상 2005년 05월 28일 00:35  
대부분의 동지들이 울산으로 가버린 오후,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회가 있었다.
참 오랜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회의에 가면
건강이 부쩍 좋아진 박준성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모처럼 <하종강의 노동과 꿈> 사이트에 갔더니(박선생님의 근황을 미리 살피려고^^)
김태훈 열사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오라,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 
박준성 선생님과 나는 함께 있었던 것이다.
(박준성 선생님은 투신 이후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나는 투신하던 광경을 오늘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낮에 회의장에서 만나 둘이서 그런 얘기를 처음으로 나누었다)
그 글과 김태훈 열사의 영정은 덧붙이기로 한다.

 24일 밤 네오와 미류님을 만난 자리에서 
술김에 잠시 떠올리기도 했지만,
하필이면 오늘 그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만났으니,
일체의 감상을 배제하고 무미건조하게 24년 전의 일을
간략하게 되새김질한다.

 
-81년 5월 27일이다.
-1년만에 광주는 다시금 뜨겁고도 치열한 이슈가 되었다.
-아침부터 학교는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일진일퇴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엔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잔디밭에 모여앉아 카드놀이도 하고, 그랬다.
-오후의 어느 시간, 모두들 녹초가 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말하자면 소강 국면이었다.
-어디선가 높은 곳에서부터 굵고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도서관 6층에서 지상을 향하여, 한줄기 굵고 선연한 빛줄기가 내려꽂혔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순 침묵의 순간이 흘렀고
-그 낙하지점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다음 순간, 그 곳을 향해 최루탄이 날아들었고
-잠시 학생들이 흩어진 사이에
-학생회관에 자리잡은 보건진료소에서 들것이 달려나왔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몸뚱아리, 그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곧 끝났다.

-81년 5월 29일이다.
-자취방에서 조금 늦게 나섰다.
-1교시 수업에 약간 늦었다.
-강의실 밖에 학교버스가 두대 서 있고, 교수와 학생들이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소모임 활동에 열심이던 몇몇의 친구들이 저만치 도망쳐 갔다.
-약화학 교수와 학생담당 학장보 교수가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맨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안양에 있는 유한양행 공장을 견학하러 간다고 했다.
-버스가 후문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맨 앞자리로 뛰어나갔다.
-두 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은 김태훈 선배의 장례식 날입니다. 우리를 학교로 되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너 뭐야? 학장보 교수의 싸늘한 반응.
-난데없이 수업을 팽개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너 영웅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약화학 교수의 무심한 목소리.
-나는 그 자리에서 통곡을 했다. 나한테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쏟아지다니.
-교수들이 이윽고 약속을 했다. 안양까지만 가자.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가라.
-그렇게 우리는 안양에 갔다가 곧 돌아왔다.
-학교는 이미 상황이 끝난 다음이었고, 
-최루탄 매캐한 교문 안 잔디밭에서 누군가 초라한 우리 모습을 찍었다.
-그 사진 어딘가에 있다.
-아주 평범한 학생이던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찍혔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해 가을 나를 서울을 떠나게 했고, 한학기 쉬게 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5월만 되면 이른바 요주의 학생들은 교수와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나도 한번은 집에 가서 좀 쉬라고, 출석 신경쓰지 말고 쉬다가 오라고, 지도교수가 그러길래
-그러겠노라고 하고서 집에 내려갔다가 이내 학교로 돌아간 기억도 있다.

 그 후로 숱한 죽음의 순간을 목도했거나 죽음 이후를 함께 서러워하면서
나의 20대가 지나갔다.
그것은 내 인생을 궁극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말하자면, 80년 5월의 광주가 내 인생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 시기에 청춘의 한 시기를 보낸 사람이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간에 이미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다.
나는 20대 초반의 어느날 우연히 어떤 사건을 마주하였고
그 이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노라고 하자.
고 김태훈 열사의 넋을 오늘에 다시 기리며...

>> 박준성 선생님의 글

전두환 X 국풍 X 
5월 27일에는 광주학살을 규탄하며 한 젊은이가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다. 그의 이름은 김태훈(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광주태생으로서 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한해 동안 고민해 왔다. 김태훈씨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서울대는 이 사건으로 연 3일간 시위를 벌인다. 이후 84년 복학생협의회는 김태훈씨를 비롯한 민주열사들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는데 짭새들은 이것마저 훔쳐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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